특강 목적40일제4강/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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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목적 40일 제 4 강
말씀 / 히브리서 12:1-13
암송요절 / 히브리서 12:2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인생의 세 번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처럼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가치를 두는 것에 가치를 두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을 닮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닮아가기 원하십니다. 이 시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잘 닮을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품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깊이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자라나기를 원한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교제에 관해서 이야기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함께 자라고 함께 발전하는 법을 교제를 통해서 배웁니다. 우리가 한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여러분이 다른 크리스천들과 더 많이 만날수록 영적으로 더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생각에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성장을 도우시는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앞에서 말한 성경과 사람들 특히 나의 아내나 남편, 자녀들, 친구들, 훌륭한 목자님들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하도록 훈련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서도 나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심지어 내가 죄를 지어서 실수한 것을 통해서도 내가 성장하도록 선하게 쓰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고난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누워있습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아야만 하는 딸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든데 한꺼번에 두 사람, 세 사람을 감당해야 합니다. 밤마다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을 시켜야 합니다. 밤마다 시도 때로 없이 울어 재낍니다. 마음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긴장의 연속입니다. 피로는 누적되어 갑니다. 이 고생이 언제 끝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면역성이 약한 아이들은 조그만 환경의 변화에도 병에 잘 걸립니다. 이런 아이들을 업고 병원을 드나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병들면 다른 아이들까지도 병이 쉽게 옮아갑니다. 하나가 나았다 싶으면 다른 아이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병원가는 것이 지겹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살이 피둥피둥 찌는데 엄마는 몸이 반쪽이 되어 갑니다. 거기다가 남편까지도 챙겨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서 동문회다, 신입생 환영회다, 선배들과의 면담이다 하면서 술을 먹고 하숙방 자취방에서 밤을 새웁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면 허무합니다. 그러다가 죄를 짓습니다. 직장인들은 어떠합니까? 상사와의 갈등, 부하와의 갈등, 업체와의 갈등 속에서 일을 하다 보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닙니다. 긴 출퇴근 시간, 일주일에 한 번 보아야만 하는 가족들, 이와 같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고난, 시험,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왜 하필 저입니까?”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마치 여러분의 삶은 편안하고 행복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편안함이나 안락함이 아닙니다. 이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선진국이 천국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 아무 문제도 시험도 고통도 없는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백, 수천, 수 만년 동안 아니 영원히 그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 땅이 천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분명 실망하게 됩니다. 이곳은 편안한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바로 우리의 성품을 개발하는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고통이 필요합니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성품을, 성품은 소망을 낳습니다. 여러분의 잘못이든, 다른 사람의 책임이든 사탄의 계략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탓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에는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닮아 가는 것입니다. 내 삶에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한 목자님이 제가 애용하는 봉고차를 전봇대에 긁어 놓았습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그 마음을 잘 알 것입니다. 접촉 사고가 났을 때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 아십니까? 사람은 자동차를 자기의 몸과 같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긁히고 꾸겨진 자동차를 보았을 때 저는 마음이 매우 쓰렸습니다. 긁힌 얼굴을 하고 다니면 그 기분이 어떠합니까? 되도록 다른 사람들 앞에 자기 얼굴을 내 보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꾸겨진 차를 타고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고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우게 하셔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운전을 배울 때는 그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문을 완전히 찌끄려뜨렸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목자님들이 운전을 배우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자동차의 상처 난 자국 속에서 우리 죄를 위해 상처 입으신 예수님의 손과 발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손과 발, 옆구리의 상처를 깨끗이 지워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지니고 계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바로 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도록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못 박혔던 손과 발은 나에 대한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양들의 허물로 인한 십자가의 상흔을 가져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가 리더를 키우기 위해서는 그들의 허물을 감당해 주고 비록 실수를 하지만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이루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이 쓰러지고 넘어지고 깨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기까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 예수님은 우리가 달려야할 목표요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십니다. 그는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시는 분이고 믿음을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은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수많은 고통과 시험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바로 다음날 자신이 죽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드셨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의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지극히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마음으로 힘들게 싸우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게셋마네라는 동산으로 가시는 것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동산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라는 무게를 지시고, 큰 고통 가운데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곳에 함께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2) 예수님은 그 큰 고통 가운데 함께 있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친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영적인 가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교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인생의 고통을 혼자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여기서 기도할 동안에 그곳에 함께 있어달라고 하셨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뇌가 예수님을 덮쳐올 때,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4:34).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곧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그리고 내일 일어날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내가 반드시 당해야 하는 일 말이다.” 여러분들 중에 대부분은 내가 꼭 당해야 하는 일을 다른 날로 미룰 수 없을 때, 그 기분을 아실 겁니다. 예수님이 그 고통에 대해서 반응하시는 모습이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14:36)”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한다면 이것이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입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 “하나님 아버지 저 정말 이것이 싫어요”, “하나님 아버지, 이 고통이 저에게서 없어지면 좋겠어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저에게서 없앨 수 있는 분이잖아요.”와 같이 말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말입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덧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양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처를 갖게 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의 두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를 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상처를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계시면 좋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상처 난 그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3).”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고난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승화시킨 사람은 우리 앞을 비추이는 희망의 사람입니다. 고난은 자랑이 아니라 아름다운 슬픔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변화하기 위한 첫 단계는 옛 태도, 옛 습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죄와 싸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죄에는 쾌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에 욕심과 죄의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대한 의심을 키웁니다. 그리고 거짓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거짓된 확신을 갖게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소원이 들어올 때 죄와 싸워야 합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 위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이 들어올 때 생각을 죄에 몰두하기보다 다른 데로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회개란 예수님의 태도와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성숙한 생각은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숙의 정도는 성경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과 얼마나 일치한 행동을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행동을 반복함으로서 새롭고 거룩한 습관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거룩한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합니다. 삶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문제 하나를 해결할 때마다 또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메꿉니다. 우리는 그런 문제들을 통해서 새롭게 믿음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훈련을 받을 때에 이 훈련을 가볍게 여기거나 낙심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해 질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가 가심으로 우리를 겸손케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한 분을 붙들게 하십니다. 일을 열심히 해 놓고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데 비난을 받음으로 섬기는 마음의 동기를 순수하게 하십니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가운데 빠져서 살 때에 가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하십니다. 병들 때에 연약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십니다. 긍휼의 마음을 품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십니다(6).” 우리는 고통 속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다른 방법으로는 배울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웁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영적 무력감에서 우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는 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아주 깊이 생각하시고 당신과의 교제 가운데로 우리를 다시 이끄시기 위해 무엇이든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훈련을 받을 때에 인내해야 합니다(7). 하나님의 훈련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복해서 훈련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반복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모세는 80년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일생 동안 하나님의 훈련을 받으면서 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직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품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우리 삶의 각 사건들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면서 그리스도와 같이 빚어가는 연단 과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것, 실수, 죄, 그리고 상처까지 쓰셔서 합력하여 선을 만드십니다. 이 모든 것을 비벼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빚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를 받을 때에 공경해야 합니다. 더욱 복종하여 살려고 해야 합니다(9). 렘29:11절을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통, 불의, 죄, 혹은 그에 따른 고통스러운 결과에 대해 감사할 것을 기대하지 아니하십니다. 대신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과 문제를 사용해서 당신의 목표를 이루신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목적은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계획하실 때 모든 백성이 거룩해 질 것을 의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에도 우리 모두가 거룩해질 것을 소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도 거룩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한 선결 조건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한 그릇이 되면 언제든지 쓰실 수 있습니다. 거룩의 핵심은 사랑의 심정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의 강령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성령의 첫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거룩은 겉만 번지르르한 허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장한다, 변화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라고 있는가를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와 친절,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훈련을 받을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신자로서 여러분의 최고의 간증은 여러분이 받은 상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지 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것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처럼 반응하시나요?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통 받을 때, 그때가 바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는 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겪고 계신지 다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반응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빌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말씀 / 히브리서 12:1-13
암송요절 / 히브리서 12:2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인생의 세 번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처럼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가치를 두는 것에 가치를 두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을 닮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닮아가기 원하십니다. 이 시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잘 닮을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품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깊이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자라나기를 원한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교제에 관해서 이야기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함께 자라고 함께 발전하는 법을 교제를 통해서 배웁니다. 우리가 한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여러분이 다른 크리스천들과 더 많이 만날수록 영적으로 더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생각에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성장을 도우시는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앞에서 말한 성경과 사람들 특히 나의 아내나 남편, 자녀들, 친구들, 훌륭한 목자님들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하도록 훈련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서도 나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심지어 내가 죄를 지어서 실수한 것을 통해서도 내가 성장하도록 선하게 쓰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고난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누워있습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아야만 하는 딸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든데 한꺼번에 두 사람, 세 사람을 감당해야 합니다. 밤마다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을 시켜야 합니다. 밤마다 시도 때로 없이 울어 재낍니다. 마음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긴장의 연속입니다. 피로는 누적되어 갑니다. 이 고생이 언제 끝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면역성이 약한 아이들은 조그만 환경의 변화에도 병에 잘 걸립니다. 이런 아이들을 업고 병원을 드나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병들면 다른 아이들까지도 병이 쉽게 옮아갑니다. 하나가 나았다 싶으면 다른 아이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병원가는 것이 지겹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살이 피둥피둥 찌는데 엄마는 몸이 반쪽이 되어 갑니다. 거기다가 남편까지도 챙겨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서 동문회다, 신입생 환영회다, 선배들과의 면담이다 하면서 술을 먹고 하숙방 자취방에서 밤을 새웁니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면 허무합니다. 그러다가 죄를 짓습니다. 직장인들은 어떠합니까? 상사와의 갈등, 부하와의 갈등, 업체와의 갈등 속에서 일을 하다 보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닙니다. 긴 출퇴근 시간, 일주일에 한 번 보아야만 하는 가족들, 이와 같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고난, 시험,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왜 하필 저입니까?”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마치 여러분의 삶은 편안하고 행복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편안함이나 안락함이 아닙니다. 이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선진국이 천국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 아무 문제도 시험도 고통도 없는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백, 수천, 수 만년 동안 아니 영원히 그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 땅이 천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분명 실망하게 됩니다. 이곳은 편안한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바로 우리의 성품을 개발하는 곳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고통이 필요합니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성품을, 성품은 소망을 낳습니다. 여러분의 잘못이든, 다른 사람의 책임이든 사탄의 계략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탓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에는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닮아 가는 것입니다. 내 삶에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한 목자님이 제가 애용하는 봉고차를 전봇대에 긁어 놓았습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그 마음을 잘 알 것입니다. 접촉 사고가 났을 때 사람들이 왜 싸우는지 아십니까? 사람은 자동차를 자기의 몸과 같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이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긁히고 꾸겨진 자동차를 보았을 때 저는 마음이 매우 쓰렸습니다. 긁힌 얼굴을 하고 다니면 그 기분이 어떠합니까? 되도록 다른 사람들 앞에 자기 얼굴을 내 보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꾸겨진 차를 타고 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고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우게 하셔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운전을 배울 때는 그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문을 완전히 찌끄려뜨렸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목자님들이 운전을 배우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자동차의 상처 난 자국 속에서 우리 죄를 위해 상처 입으신 예수님의 손과 발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손과 발, 옆구리의 상처를 깨끗이 지워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지니고 계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바로 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도록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못 박혔던 손과 발은 나에 대한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양들의 허물로 인한 십자가의 상흔을 가져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가 리더를 키우기 위해서는 그들의 허물을 감당해 주고 비록 실수를 하지만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이루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이 쓰러지고 넘어지고 깨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기까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 예수님은 우리가 달려야할 목표요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십니다. 그는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시는 분이고 믿음을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은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수많은 고통과 시험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바로 다음날 자신이 죽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드셨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의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지극히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마음으로 힘들게 싸우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게셋마네라는 동산으로 가시는 것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동산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라는 무게를 지시고, 큰 고통 가운데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곳에 함께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2) 예수님은 그 큰 고통 가운데 함께 있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친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영적인 가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교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인생의 고통을 혼자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여기서 기도할 동안에 그곳에 함께 있어달라고 하셨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뇌가 예수님을 덮쳐올 때,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4:34).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곧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그리고 내일 일어날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내가 반드시 당해야 하는 일 말이다.” 여러분들 중에 대부분은 내가 꼭 당해야 하는 일을 다른 날로 미룰 수 없을 때, 그 기분을 아실 겁니다. 예수님이 그 고통에 대해서 반응하시는 모습이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14:36)”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한다면 이것이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입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 “하나님 아버지 저 정말 이것이 싫어요”, “하나님 아버지, 이 고통이 저에게서 없어지면 좋겠어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저에게서 없앨 수 있는 분이잖아요.”와 같이 말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보십시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말입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덧입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양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처를 갖게 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의 두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를 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그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상처를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계시면 좋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상처 난 그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3).”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고난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승화시킨 사람은 우리 앞을 비추이는 희망의 사람입니다. 고난은 자랑이 아니라 아름다운 슬픔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변화하기 위한 첫 단계는 옛 태도, 옛 습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죄와 싸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죄에는 쾌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에 욕심과 죄의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대한 의심을 키웁니다. 그리고 거짓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거짓된 확신을 갖게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소원이 들어올 때 죄와 싸워야 합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 위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유혹이 들어올 때 생각을 죄에 몰두하기보다 다른 데로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회개란 예수님의 태도와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성숙한 생각은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숙의 정도는 성경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과 얼마나 일치한 행동을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행동을 반복함으로서 새롭고 거룩한 습관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거룩한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합니다. 삶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문제 하나를 해결할 때마다 또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메꿉니다. 우리는 그런 문제들을 통해서 새롭게 믿음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훈련을 받을 때에 이 훈련을 가볍게 여기거나 낙심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해 질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가 가심으로 우리를 겸손케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한 분을 붙들게 하십니다. 일을 열심히 해 놓고 인정을 받기를 원하는데 비난을 받음으로 섬기는 마음의 동기를 순수하게 하십니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가운데 빠져서 살 때에 가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게 하십니다. 병들 때에 연약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십니다. 긍휼의 마음을 품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십니다(6).” 우리는 고통 속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다른 방법으로는 배울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웁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영적 무력감에서 우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는 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아주 깊이 생각하시고 당신과의 교제 가운데로 우리를 다시 이끄시기 위해 무엇이든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훈련을 받을 때에 인내해야 합니다(7). 하나님의 훈련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복해서 훈련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반복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모세는 80년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일생 동안 하나님의 훈련을 받으면서 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직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품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우리 삶의 각 사건들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면서 그리스도와 같이 빚어가는 연단 과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것, 실수, 죄, 그리고 상처까지 쓰셔서 합력하여 선을 만드십니다. 이 모든 것을 비벼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빚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를 받을 때에 공경해야 합니다. 더욱 복종하여 살려고 해야 합니다(9). 렘29:11절을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통, 불의, 죄, 혹은 그에 따른 고통스러운 결과에 대해 감사할 것을 기대하지 아니하십니다. 대신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과 문제를 사용해서 당신의 목표를 이루신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목적은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계획하실 때 모든 백성이 거룩해 질 것을 의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에도 우리 모두가 거룩해질 것을 소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도 거룩해지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한 선결 조건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한 그릇이 되면 언제든지 쓰실 수 있습니다. 거룩의 핵심은 사랑의 심정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의 강령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사랑이 성령의 첫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거룩은 겉만 번지르르한 허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장한다, 변화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자라고 있는가를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와 친절,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훈련을 받을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신자로서 여러분의 최고의 간증은 여러분이 받은 상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지 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것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처럼 반응하시나요?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통 받을 때, 그때가 바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는 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겪고 계신지 다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반응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빌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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