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3년 행2강(2:1-47)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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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2 강
말씀 | 사도행전 2:1-47
요절 | 사도행전 2:4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 말씀은 오순절 강림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속 역사에서 예수님의 성육신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만일 성령께서 강림하지 않았다면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에 2000년 전에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지난 2000년 동안 끊임없이 사람들의 내면에 역사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한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가운데 늘 함께 하셔서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와 동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오순절 성령 강림(1-14). 오순절 날이 이르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성도들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후 첫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50일째 되는 날에 시내산에 도착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율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지만 심령이 부패해서 진리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죄가 죄인지 모른 채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알게 된 후에는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받았지만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과 연약함을 잘 아시고 율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롬8:1,2). 예레미야 31장 31-33절에 예언하신 대로 새 언약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에스겔 36장 26,27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임하여 본격적인 영적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오순절에는 유대 지방뿐만 아니라 각 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인구는 8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 절기 때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의 숫자는 200만 명에 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사도들이 각 나라의 언어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함으로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모인 곳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는 것은,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실 때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람과 성령은 어원이 같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또 바람이 급하고 강하게 불면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뿌리 채 뽑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도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사람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추하고 거짓되고 죄로 깊이 병든 사람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십니다. 무식한 사람들을 유식하게 하시고 멸시받던 사람들을 높이기도 하시고, 세계적인 목자요 지도자로 세우기도 하십니다.
또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처럼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불이란 온갖 것을 태우고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태워 정결하게 하시는 거룩한 영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가장 괴롭히고 불행하게 하는 문제가 바로 죄 문제입니다. 죽음도 결국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의 새로운 속성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 속성이 육신에 있기 때문에 늘 옛 속성과 새로운 속성의 싸움이 우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간다는 것은 옛 속성을 말씀의 검과 성령으로 죽이고 순종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은 성령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임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성령은 각 사람의 인격과 개성과 문제에 따라 다르게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또 혀는 우리의 언어생활의 중심 기관입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불의 혀 같이 임하신 것은 각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역사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감화시키시고, 그 심령을 뜨겁게 하시는 불의 혀와 같으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 불의 혀와 같이 땅 끝까지 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를 삼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성령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이, 뜨거운 불의 혀 같이 임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다른 언어란 고린도 교인들이 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 즉 방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외국어를 말합니다. 그들은 외국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국어인 아람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헬라어, 이집트어, 이탈리아어, 아시아 각 지방의 언어로 복음을 유창하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께서 그 사람을 온전히 다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엡 5:18). 우리가 술에 취하면 술이 그 사람의 마음과 인격과 몸의 모든 기관을 주관하게 됩니다. 그래서 술이 많이 취하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끊임없이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하고 추태를 부립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됩니다. 사랑과 기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하는 일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신 첫 표적으로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학문이 없는 제자들, 말문이 막혀 있던 제자들의 입을 열어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멸시 받던 이들이 영적인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장래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하던 그들이 확신 가운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인류의 언어가 달라지고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게 된 것은 바벨탑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낮추기 위해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창 11:1-9). 그래서 인간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여러 민족과 국가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권능을 덧입은 제자들이 각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하게 되자 교제가 없던 사람들이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장차 인류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며, 모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만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비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5,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갑자기 귀가 번쩍 뜨여 유창하게 자기 나라 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우루루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 말로 메시지를 전하는 제자들을 보고 심히 놀라며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그들은 15개국에서 오순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올림픽에 231개국에서 모인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 천하에서 온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들은 다 놀라 당황하여 서로 말했습니다. 이 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사도들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저도 봄 수양회에서 처음 메시지를 전할 때 기대 이상의 메시지를 전해서 청중들에게 박수를 받았습니다. 당시 인턴 훈련을 받으며 매일 화장실 청소, 센터 청소를 하고 밥하고 설거지만 하던 제가 성령에 사로잡혀 말씀을 전하자 목자님들이 다 놀랐습니다. 제가 계속 이렇게 말씀을 전했다면 우리 모임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7월에 윤혜림 목자가 미국 아틀란타로 나아가고, 9월에 박기성 형제가 일본에 나아갈 것입니다. 이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미국과 일본에서 자립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목자요, 선교사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을 때 이들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위해서 기도로 준비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강시님들과 학생들이 소감을 준비하면서 힘있게 말씀을 받고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14-41). 베드로는 성도들이 술에 취했다는 조롱에 대해서 일어나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오전 9시이니 술에 취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과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주로 왕, 제사장, 선지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그것도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에만 임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즉 외적인 직분이나 성별이나 연령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자녀들이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남종이든 여종이든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꿉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요, 비전이 없던 젊은이들이 환상에 사로잡히고, 늙은이들이 과거만 회상하고 추억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꿉니다. 사람은 꿈을 먹고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나서 선교비전을 갖게 되었을 때 많은 선교사님들이 각 나라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선교사님들이 많이 와 계십니다. 이 분들의 선교비전이 생생하게 각 나라 속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큰 꿈만 꾸고 있으면 실망을 하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하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펼쳐나가십니다. 피와 불과 연기는 출애굽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로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세계만민을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일을 이루어나가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지를 전하고 나서 청중들에게 적용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22-2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담대하게 증거합니다(36).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영원토록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는 천하 만민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왕의 왕이십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들은 그처럼 대망했던 메시아가 바로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심을 깨닫고 양심에 큰 가책을 느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신 그리스도를 찌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심판의 날을 생각하니 그들은 가슴이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어떻게 도와줍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후회만 하지 말고 죄를 뉘우치고 그 잘못을 적극적으로 고치라고 권면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태도와 사고방식을 뜯어 고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던 것을 감사로, 불순종하던 생활에서 순종의 생활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던 모든 생활방식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세례는 공중 앞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여,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된 것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롬 6:3,4). 그리하면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됩니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베드로가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였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기쁨의 찬양이 늘 흘러나옵니다.
셋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42-47).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구약을 풀어 가르쳤습니다. 또 사도들의 가르침이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공부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임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힘써 공부하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힘썼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이 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이룰 때 불신적인 세상에서 외롭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도들이 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을 포함해서 성찬을 말합니다. 그들은 떡을 떼면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었습니다. 어제 학생 15명이 조게바, 한나 목자님 가정에서 식사를 하며 모임을 이루었습니다. 학생들은 목자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다 큰 기쁨과 만족을 누렸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특징 중에 하나는 기도하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기도하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본문에는 전도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집에 불신자들을 초청하여 식사 교제를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런 섬김에 감동을 받고 사람들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이들에게는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고, 우리와 다른가? 이런 변화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친분을 나누고 신뢰가 쌓이게 되면 자연히 전도가 됩니다. 초대 교회의 특징은 말씀과 교제와 기도와 전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임이 살아있는 모임이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임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집에서 음식을 먹고 말씀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메가처치였습니다. 동시에 가정교회였습니다. 우리 모임이 신약 교회와 같은 모임을 이루어가면서 끊임없이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를 세우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2:1-47
요절 | 사도행전 2:4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 말씀은 오순절 강림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구속 역사에서 예수님의 성육신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만일 성령께서 강림하지 않았다면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에 2000년 전에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지난 2000년 동안 끊임없이 사람들의 내면에 역사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한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가운데 늘 함께 하셔서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와 동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오순절 성령 강림(1-14). 오순절 날이 이르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성도들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후 첫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50일째 되는 날에 시내산에 도착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율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었지만 심령이 부패해서 진리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죄가 죄인지 모른 채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알게 된 후에는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받았지만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성과 연약함을 잘 아시고 율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롬8:1,2). 예레미야 31장 31-33절에 예언하신 대로 새 언약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에스겔 36장 26,27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사람들 위에 임하여 본격적인 영적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오순절에는 유대 지방뿐만 아니라 각 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인구는 8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 절기 때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의 숫자는 200만 명에 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사도들이 각 나라의 언어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함으로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모인 곳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는 것은,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실 때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람과 성령은 어원이 같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또 바람이 급하고 강하게 불면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뿌리 채 뽑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도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사람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추하고 거짓되고 죄로 깊이 병든 사람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연약한 자들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십니다. 무식한 사람들을 유식하게 하시고 멸시받던 사람들을 높이기도 하시고, 세계적인 목자요 지도자로 세우기도 하십니다.
또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처럼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불이란 온갖 것을 태우고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태워 정결하게 하시는 거룩한 영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가장 괴롭히고 불행하게 하는 문제가 바로 죄 문제입니다. 죽음도 결국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의 새로운 속성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 속성이 육신에 있기 때문에 늘 옛 속성과 새로운 속성의 싸움이 우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간다는 것은 옛 속성을 말씀의 검과 성령으로 죽이고 순종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은 성령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임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성령은 각 사람의 인격과 개성과 문제에 따라 다르게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또 혀는 우리의 언어생활의 중심 기관입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불의 혀 같이 임하신 것은 각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역사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감화시키시고, 그 심령을 뜨겁게 하시는 불의 혀와 같으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 불의 혀와 같이 땅 끝까지 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를 삼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성령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이, 뜨거운 불의 혀 같이 임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다른 언어란 고린도 교인들이 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 즉 방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외국어를 말합니다. 그들은 외국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국어인 아람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헬라어, 이집트어, 이탈리아어, 아시아 각 지방의 언어로 복음을 유창하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께서 그 사람을 온전히 다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엡 5:18). 우리가 술에 취하면 술이 그 사람의 마음과 인격과 몸의 모든 기관을 주관하게 됩니다. 그래서 술이 많이 취하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끊임없이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하고 추태를 부립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됩니다. 사랑과 기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하는 일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신 첫 표적으로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학문이 없는 제자들, 말문이 막혀 있던 제자들의 입을 열어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멸시 받던 이들이 영적인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장래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하던 그들이 확신 가운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인류의 언어가 달라지고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게 된 것은 바벨탑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낮추기 위해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창 11:1-9). 그래서 인간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여러 민족과 국가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권능을 덧입은 제자들이 각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하게 되자 교제가 없던 사람들이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장차 인류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며, 모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만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비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5,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갑자기 귀가 번쩍 뜨여 유창하게 자기 나라 말로 말하는 것을 듣고 우루루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 나라 말로 메시지를 전하는 제자들을 보고 심히 놀라며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그들은 15개국에서 오순절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올림픽에 231개국에서 모인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 천하에서 온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들은 다 놀라 당황하여 서로 말했습니다. 이 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사도들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저도 봄 수양회에서 처음 메시지를 전할 때 기대 이상의 메시지를 전해서 청중들에게 박수를 받았습니다. 당시 인턴 훈련을 받으며 매일 화장실 청소, 센터 청소를 하고 밥하고 설거지만 하던 제가 성령에 사로잡혀 말씀을 전하자 목자님들이 다 놀랐습니다. 제가 계속 이렇게 말씀을 전했다면 우리 모임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7월에 윤혜림 목자가 미국 아틀란타로 나아가고, 9월에 박기성 형제가 일본에 나아갈 것입니다. 이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미국과 일본에서 자립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목자요, 선교사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을 때 이들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위해서 기도로 준비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강시님들과 학생들이 소감을 준비하면서 힘있게 말씀을 받고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14-41). 베드로는 성도들이 술에 취했다는 조롱에 대해서 일어나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오전 9시이니 술에 취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과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주로 왕, 제사장, 선지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그것도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에만 임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즉 외적인 직분이나 성별이나 연령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자녀들이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남종이든 여종이든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꿉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요, 비전이 없던 젊은이들이 환상에 사로잡히고, 늙은이들이 과거만 회상하고 추억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꿉니다. 사람은 꿈을 먹고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나서 선교비전을 갖게 되었을 때 많은 선교사님들이 각 나라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선교사님들이 많이 와 계십니다. 이 분들의 선교비전이 생생하게 각 나라 속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큰 꿈만 꾸고 있으면 실망을 하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하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펼쳐나가십니다. 피와 불과 연기는 출애굽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로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세계만민을 죄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일을 이루어나가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지를 전하고 나서 청중들에게 적용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22-2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담대하게 증거합니다(36).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영원토록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는 천하 만민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왕의 왕이십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들은 그처럼 대망했던 메시아가 바로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심을 깨닫고 양심에 큰 가책을 느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신 그리스도를 찌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심판의 날을 생각하니 그들은 가슴이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어떻게 도와줍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후회만 하지 말고 죄를 뉘우치고 그 잘못을 적극적으로 고치라고 권면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태도와 사고방식을 뜯어 고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던 것을 감사로, 불순종하던 생활에서 순종의 생활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던 모든 생활방식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세례는 공중 앞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여,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된 것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롬 6:3,4). 그리하면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됩니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베드로가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였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은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기쁨의 찬양이 늘 흘러나옵니다.
셋째,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42-47).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구약을 풀어 가르쳤습니다. 또 사도들의 가르침이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공부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임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힘써 공부하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힘썼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이 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이룰 때 불신적인 세상에서 외롭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도들이 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을 포함해서 성찬을 말합니다. 그들은 떡을 떼면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었습니다. 어제 학생 15명이 조게바, 한나 목자님 가정에서 식사를 하며 모임을 이루었습니다. 학생들은 목자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다 큰 기쁨과 만족을 누렸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특징 중에 하나는 기도하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기도하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본문에는 전도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집에 불신자들을 초청하여 식사 교제를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런 섬김에 감동을 받고 사람들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이들에게는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고, 우리와 다른가? 이런 변화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친분을 나누고 신뢰가 쌓이게 되면 자연히 전도가 됩니다. 초대 교회의 특징은 말씀과 교제와 기도와 전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임이 살아있는 모임이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임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집에서 음식을 먹고 말씀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메가처치였습니다. 동시에 가정교회였습니다. 우리 모임이 신약 교회와 같은 모임을 이루어가면서 끊임없이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를 세우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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