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3년 행1강(1:1-26)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23년 사도행전 제 1 강
말씀 | 사도행전 1:1-26
요절 | 사도행전 1:8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은 의사요 역사가인 저자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낸 기록입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혹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로마의 고위관리임에 분명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했을 것입니다(눅1:4). 로마 황제를 주로 섬기고 있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유대 청년 예수를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AD 64년 이후부터 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신앙이 흔들리기 쉬웠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이런 그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도록 돕기 위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복음서에 나온 제자들의 모습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은 다릅니다. 복음서에 나온 제자들의 모습은 연약하고 인간적이고 실수투성이죠. 서로 높은 자리를 놓고 경쟁하였고 앞서가는 제자들을 시기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은 담대하며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복음역사를 섬깁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증언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넘어오면서 어떤 역사가 있었기에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님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의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이제 로마의 압제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키고 사람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그들의 한 맺힌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한 맺힌 문제를 풀어주실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너희 알 바 아니라”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보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체를 보고 계시고 우리는 나의 개인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성취, 결혼을 하고, 돈을 모으고, 집을 사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행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행을 하고 스위트 홈을 꾸리고 싶습니다. 고상한 아버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세상 만민을 위한 복덩어리로 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 사람들을 그에게로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전 세계를 상대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곧 승천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돌보시고,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실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현재 너무나 무지하고 부족함을 아십니다.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전파하실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이 놀랍게 변화될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첫째, 권능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제자들은 한없이 부족하고 무능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을 잘 못하고, 리더십도 부족했습니다. 그런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이 권능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권능이란 다이나마이트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들이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놀라운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출신이 어부냐, 세리랴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디엘 무디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에게 불같이 임했을 때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성령을 받지 못하고 죄의 사슬에 얽매여 있을 때는 영력을 덧입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으면 놀라운 영적 권세를 덧입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금은 불신에 시달리며, 현실 문제에 얽매여 쩔쩔 매지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덧입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될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능력을 베푸시는 성령님을 힘입어 능력있는 주의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산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목격자들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확실한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증인’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기독교의 본질과 인류 구속 역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시면 제자들은 이 모든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은 온 천하 만민에게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사람에 대해서 목자의 심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그들을 미워하고, 상종하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에 대해서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갖게 됩니다. 메시야를 죽이고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또 두려움이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증인이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나 BC7세기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이방인의 피가 섞여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도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민족감정도 초월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겸손히 섬겨주신 것처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원수 나라 로마 백성들은 물론이고 땅 끝에 있는 이름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갖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줍니다. 아브람은 고상하게 살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복의 근원으로 쓰고자 하십니다. 그는 주님께 묻습니다. “주여 내게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창 15:2).” 주님께서는 그에게 자식을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세상 만민을 복주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마음이 가 있는데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만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그것이 민족적인 회복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여 장관자리 하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 나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세계를 품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고 그 분의 마음에서 우리의 마음으로 전달이 됩니다. 선교는 세계적인 하나님의 세계적인 백성의 세계적인 행위입니다( 죤 스토트).” 주님은 우리가 땅 끝까지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땅 끝은 어디입니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입니다. 땅 끝은 지리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문화적, 민족적, 지리적 중심지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캠퍼스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개척지입니다. 우리는 한국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들어온 10만 명의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법이고 선교사들이 다 쫓겨나지만 이곳에서는 복음을 전하기가 더 수월합니다. 이들에게 말을 걸고 식사를 함께 하고 친분을 쌓으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또 다음 세대들은 땅 끝입니다. 미국과 한국은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들이지만 동시에 선교하기가 어려운 피선교국입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캠퍼스는 복음의 황금어장인데 추수할 일꾼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태국에는 1500명의 선교사가 있는데 치앙마이 대학에는 한 명의 목자도, 선교사도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속한 교회와 캠퍼스 구성원들의 행복에 우선순위를 두고 활동해야 합니다. 선교는 가장 구체적인 이웃 사랑입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 땅 끝이고, 우리는 이곳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여기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는 성령 충만함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은 성령께 붙들려서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았어도 자기 욕심대로 살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이런 신자들은 성령을 통해서 능력과 지혜를 덧입지 못합니다. 내면도 좀처럼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신 것을 확신하고 자신을 성령님께 맡기며 순종하는 사람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서신서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마라’, 성령과 동행하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의 원동력은 우리의 능력이나 소원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데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에 불을 붙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에서 열 한 사도와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다는 말씀이 1장과 2장에 연달아 나옵니다. 사도행전에는 기도라는 단어가 31번이나 나옵니다. 사도행전 28장 중 20장에 걸쳐서 기도가 나옵니다. 그만큼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기도행전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소원이 없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능력이 없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할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한 마음으로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을 썼다는 말씀은 그들이 기도에 전혀 힘썼다는 뜻입니다. 이는 헬라어로 “프로스카르테레오” “자신을 붙들어 매다” 그런 뜻입니다. 그들은 기도에 자신을 붙들어 맸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부터 오순절 날까지 10일 동안 온통 기도에 자신을 붙들어 맸습니다. 기도에 집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틈만 나면 스마트 폰에 자신을 붙들어 매고 삽니다. 어떤 분은 설교를 듣는 시간에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되 적당히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말고, 기도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에 몰입해야 하겠습니다.
여름 수양회를 섬겨야 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강사님들에게 하늘로부터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소원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새롭게 수양회에 참석하는 분들이 거듭나 새 사람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가 됩니다. 또한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름 수양회가 약 한 달 정도 남았는데 새벽에 기도하고 금요일에 모여서 기도하고 요회모임을 할 때 기도하고 주일에 기도하고 가족 기도모임을 할 때 오로지 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렵지만 각자가 가진 은사와 시간과 에너지를 드려서 풍성한 축제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구원 역사를 놀랍게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1-26
요절 | 사도행전 1:8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은 의사요 역사가인 저자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낸 기록입니다.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혹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로마의 고위관리임에 분명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했을 것입니다(눅1:4). 로마 황제를 주로 섬기고 있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유대 청년 예수를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AD 64년 이후부터 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신앙이 흔들리기 쉬웠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습니다. 이런 그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도록 돕기 위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복음서에 나온 제자들의 모습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은 다릅니다. 복음서에 나온 제자들의 모습은 연약하고 인간적이고 실수투성이죠. 서로 높은 자리를 놓고 경쟁하였고 앞서가는 제자들을 시기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모두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은 담대하며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복음역사를 섬깁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부활의 주님을 증언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으로 넘어오면서 어떤 역사가 있었기에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님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의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이제 로마의 압제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키고 사람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그들의 한 맺힌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한 맺힌 문제를 풀어주실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너희 알 바 아니라”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보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체를 보고 계시고 우리는 나의 개인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성취, 결혼을 하고, 돈을 모으고, 집을 사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행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행을 하고 스위트 홈을 꾸리고 싶습니다. 고상한 아버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세상 만민을 위한 복덩어리로 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 사람들을 그에게로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전 세계를 상대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곧 승천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돌보시고,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실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현재 너무나 무지하고 부족함을 아십니다.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전파하실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이 놀랍게 변화될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첫째, 권능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제자들은 한없이 부족하고 무능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을 잘 못하고, 리더십도 부족했습니다. 그런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이 권능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권능이란 다이나마이트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들이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놀라운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출신이 어부냐, 세리랴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디엘 무디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에게 불같이 임했을 때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성령을 받지 못하고 죄의 사슬에 얽매여 있을 때는 영력을 덧입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으면 놀라운 영적 권세를 덧입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금은 불신에 시달리며, 현실 문제에 얽매여 쩔쩔 매지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덧입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될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능력을 베푸시는 성령님을 힘입어 능력있는 주의 종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산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할 때부터 함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목격자들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확실한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증인’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기독교의 본질과 인류 구속 역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시면 제자들은 이 모든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은 온 천하 만민에게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사람에 대해서 목자의 심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그들을 미워하고, 상종하기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에 대해서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갖게 됩니다. 메시야를 죽이고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또 두려움이 없이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증인이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나 BC7세기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이방인의 피가 섞여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도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민족감정도 초월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겸손히 섬겨주신 것처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원수 나라 로마 백성들은 물론이고 땅 끝에 있는 이름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갖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줍니다. 아브람은 고상하게 살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복의 근원으로 쓰고자 하십니다. 그는 주님께 묻습니다. “주여 내게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창 15:2).” 주님께서는 그에게 자식을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를 통해서 세상 만민을 복주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마음이 가 있는데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만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그것이 민족적인 회복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여 장관자리 하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 나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세계를 품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선교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고 그 분의 마음에서 우리의 마음으로 전달이 됩니다. 선교는 세계적인 하나님의 세계적인 백성의 세계적인 행위입니다( 죤 스토트).” 주님은 우리가 땅 끝까지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땅 끝은 어디입니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입니다. 땅 끝은 지리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문화적, 민족적, 지리적 중심지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오늘날 캠퍼스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미개척지입니다. 우리는 한국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들어온 10만 명의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법이고 선교사들이 다 쫓겨나지만 이곳에서는 복음을 전하기가 더 수월합니다. 이들에게 말을 걸고 식사를 함께 하고 친분을 쌓으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또 다음 세대들은 땅 끝입니다. 미국과 한국은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들이지만 동시에 선교하기가 어려운 피선교국입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캠퍼스는 복음의 황금어장인데 추수할 일꾼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태국에는 1500명의 선교사가 있는데 치앙마이 대학에는 한 명의 목자도, 선교사도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속한 교회와 캠퍼스 구성원들의 행복에 우선순위를 두고 활동해야 합니다. 선교는 가장 구체적인 이웃 사랑입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 땅 끝이고, 우리는 이곳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여기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는 성령 충만함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은 성령께 붙들려서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았어도 자기 욕심대로 살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이런 신자들은 성령을 통해서 능력과 지혜를 덧입지 못합니다. 내면도 좀처럼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신 것을 확신하고 자신을 성령님께 맡기며 순종하는 사람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열매 맺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서신서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마라’, 성령과 동행하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의 원동력은 우리의 능력이나 소원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데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에 불을 붙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에서 열 한 사도와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다는 말씀이 1장과 2장에 연달아 나옵니다. 사도행전에는 기도라는 단어가 31번이나 나옵니다. 사도행전 28장 중 20장에 걸쳐서 기도가 나옵니다. 그만큼 사도행전은 제자들의 기도행전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소원이 없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능력이 없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할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한 마음으로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을 썼다는 말씀은 그들이 기도에 전혀 힘썼다는 뜻입니다. 이는 헬라어로 “프로스카르테레오” “자신을 붙들어 매다” 그런 뜻입니다. 그들은 기도에 자신을 붙들어 맸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부터 오순절 날까지 10일 동안 온통 기도에 자신을 붙들어 맸습니다. 기도에 집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틈만 나면 스마트 폰에 자신을 붙들어 매고 삽니다. 어떤 분은 설교를 듣는 시간에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되 적당히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말고, 기도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에 몰입해야 하겠습니다.
여름 수양회를 섬겨야 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강사님들에게 하늘로부터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소원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새롭게 수양회에 참석하는 분들이 거듭나 새 사람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가 됩니다. 또한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름 수양회가 약 한 달 정도 남았는데 새벽에 기도하고 금요일에 모여서 기도하고 요회모임을 할 때 기도하고 주일에 기도하고 가족 기도모임을 할 때 오로지 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렵지만 각자가 가진 은사와 시간과 에너지를 드려서 풍성한 축제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구원 역사를 놀랍게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