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3년 눅39강(23:1-49)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페이지 정보

본문
2023년 누가복음 제 39 강
말씀 | 누가복음 23:1-49
요절 | 누가복음 23:34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놀라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죄를 짓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네 주제를 알아라.” “너는 신이 아님을 명심하라.”는 경고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무지함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시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그의 부활을 알고 일생 닮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과 나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배우며 주님의 사랑을 영접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끌고 빌라도에게 가서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세 가지 고발 건 중에서 두 가지는 문제 삼지 않고 왕권에 대해서만 심문을 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말은 상당히 위협적인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짧고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심문을 받고 죽으셔야 합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아에 대한 별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아셨습니다. 정체성이 분명할 때 도전에 잘 대응할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이 자리에 있습니까? 교회는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분명할 때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고, 가지치기를 잘 하여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닥치는 시험을 극복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빌라도는 그에게 죄가 없다고 선포합니다(4).
그러나 무리들은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한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그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이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때에 그는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이 헤롯이 교회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도 잡아 죽이고자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죽였고, 그의 숙부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이런 잔학상이 이 가문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취함으로 벌레에 먹혀서 죽습니다. 이런 헤롯이 여러 말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어떤 이적도 보지 못하고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하자 헤롯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 둘 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4,14,15,22).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무리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백성들은 살인자 바라바를 석방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풀어 주고자 하였으나 무리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합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들의 큰 소리가 이겼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목소리가 큰 무리들이 이깁니다. 정치가들은 대중이 큰 소리로 데모를 하면 두려워 그 소리를 들어줍니다. 택시 운송의 혁신 아이콘이었던 “타다”가 무죄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타다는 수백명, 택시업계는 수십만명이 데모를 하자 정치가들이 택시 업계의 손을 들어 주고 타다의 죄를 추궁하다 대법원에 까지 가서 타다가 무죄가 되었습니다. 정치가 빌라도는 공의를 행하기보다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라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많은 사람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십자가형을 언도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사형을 언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총독의 권한에 속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습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알지만 진리대로 행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진리와 원칙을 버리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잘못된 판결을 내리고 맙니다. 그는 이로 인해 역사적인 죄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현실적인 유익 앞에 쉽게 넘어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필요악이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공의를 바라지만 재판도 굽어진 판결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직장에서 어쩔 수 없이 악에 타협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도 현실의 유익 앞에 연약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잘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볼 때 답답하지만, 우리의 이런 죄와 허물을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무게로 인해서 자주 쓰러지고 또 쓰러졌습니다. 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등에 채찍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에 쫒기고 있느데 예수님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자꾸 쓰러지자 어쩔 수 없는 것을 본 군병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시몬은 얼떨결에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족들도 다 믿음을 갖고 초대교회에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잉태하는 것, 여자가 젖을 먹이는 것은 아름답고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모든 가정과 자녀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2년 동안 포위합니다. 당시 환란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사람들은 가죽 띠를 뜯어먹고 굶주림으로 인해 어린아이를 삶아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은 약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마른 나무는 불의한 유대민족을 가리킵니다. 수액과 물기가 충분한 푸른 나무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징벌하신다면, 범죄한 예루살렘에 대해서 얼마나 심하게 징벌하시겠습니까? 오랫동안 지은 죄로 인해 마른 나무와 같은 인생들이 받을 심판은 상상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우리가 저지른 죄와 허물로 인해 받을 심판을 생각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형을 받게 된 두 명의 행악자와 함께 끌려가서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 중에 하나로 취급받으시되 중앙에 못 박히심으로 죄인 중에 괴수로 취급 받으셨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발가벗기고 십자가 위에 눕히고 길이가 18cm나 되는 굵은 대못을 손과 발에 박았습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살을 뚫고 손목 관절을 끊어서 나무판에 박혔습니다. 동맥이 끊어지자 뜨거운 피가 “쫙” 하고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경이 잘려나가는 고통에 예수님의 온 몸은 부르르 떨었습니다. 십자가를 일으켜 파놓은 구덩이에 세우자 쿵 소리와 함께 몸의 하중이 못이 박힌 손과 발에 쏠려서 손과 발의 상처는 더 깊이 찢어졌습니다.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장면이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합니까? 생명은 피에 있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갈증으로 입천장이 갈라지고 목구멍이 바싹바싹 타서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때의 고통을 시편 22편 14,15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 비방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이런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야 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무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를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4-6).”
사람들은 죄를 즐길만한 것이라 생각하고 커피 한 잔 마시듯이 용감하게 죄를 범합니다. 처음에는 죄의식을 느끼다가 나중에는 죄책감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것이어서 반드시 대가를 요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무서운 고통을 받으시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로 내가 달려있어야 할 그 십자가에 내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자기의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지금까지 들어본 말들 중에 가장 놀라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죄인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하시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기도 덕분에 우리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고 통회 자복하며 구원을 받습니다. 죄의 세력은 참으로 강하고 끈질깁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 쾌락을 위한 정욕, 식욕 등 기본적인 욕구 외에 명예욕, 권력욕,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시기심, 질투, 자기만 잘난 줄 아는 교만, 자기의 죄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는 죄, 즉 내로남불. 우리가 죄를 생각하면 참으로 섬뜩하고 깊고 깊은 어두움입니다. 이 죄의 세력이 인간을 사망으로 몰고 갑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당한 자는 영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으셨습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이 어떠합니까? 35-37절을 보십시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면 자신도 구원하라, 네가 너를 구원하라. 이 말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주님이 스스로를 구원하시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또 내가 나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스스로에게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바로 알고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시험을 참으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우리도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렇게 시험과 부끄러움을 견디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의 차지였습니다. 군병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 후에 서로 예수님의 옷을 갖기 위해서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지한 군병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단지 군병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무지한 무리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무슨 죄를 짓는지 알지 못한 채 죄를 짓고 있는 우리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자기를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은 시대를 넘어서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요한복음을 보면 아람어, 라틴어, 헬라어 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만인이 그를 보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달린 두 행악자 중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런데 또 한 행악자는 그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사형을 당하는 중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구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인생 마지막에 구원 열차를 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볼 때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로 말미암는가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약의 아브라함이라고 불리웁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제 육시는 정오이고 제 구시는 오후 세시입니다. 가장 빛이 밝아야 할 때에 짙은 어둠이 세상을 덮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차마 고통스럽게 죽으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어둠이 이 세상을 덮고 악이 선에 대해서 승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성전예배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예배당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의 마음이 변화를 받아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3).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말씀하시고 숨지셨습니다.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되고 묻히셨습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의 죄를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무지와 이기심과 무정한 마음을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의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그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나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하심과 함께 나도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새 사람이 됩니다. 이 십자가를 영접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23:1-49
요절 | 누가복음 23:34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놀라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죄를 짓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네 주제를 알아라.” “너는 신이 아님을 명심하라.”는 경고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의 무지함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시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그의 부활을 알고 일생 닮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과 나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배우며 주님의 사랑을 영접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끌고 빌라도에게 가서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세 가지 고발 건 중에서 두 가지는 문제 삼지 않고 왕권에 대해서만 심문을 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말은 상당히 위협적인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짧고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심문을 받고 죽으셔야 합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아에 대한 별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아셨습니다. 정체성이 분명할 때 도전에 잘 대응할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이 자리에 있습니까? 교회는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분명할 때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고, 가지치기를 잘 하여 열매 맺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닥치는 시험을 극복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빌라도는 그에게 죄가 없다고 선포합니다(4).
그러나 무리들은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한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그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이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때에 그는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이 헤롯이 교회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도 잡아 죽이고자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헤롯 대왕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죽였고, 그의 숙부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이런 잔학상이 이 가문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취함으로 벌레에 먹혀서 죽습니다. 이런 헤롯이 여러 말로 물었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어떤 이적도 보지 못하고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하자 헤롯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 둘 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4,14,15,22).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무리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백성들은 살인자 바라바를 석방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풀어 주고자 하였으나 무리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합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들의 큰 소리가 이겼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목소리가 큰 무리들이 이깁니다. 정치가들은 대중이 큰 소리로 데모를 하면 두려워 그 소리를 들어줍니다. 택시 운송의 혁신 아이콘이었던 “타다”가 무죄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타다는 수백명, 택시업계는 수십만명이 데모를 하자 정치가들이 택시 업계의 손을 들어 주고 타다의 죄를 추궁하다 대법원에 까지 가서 타다가 무죄가 되었습니다. 정치가 빌라도는 공의를 행하기보다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라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많은 사람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십자가형을 언도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사형을 언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총독의 권한에 속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습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알지만 진리대로 행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는 진리와 원칙을 버리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잘못된 판결을 내리고 맙니다. 그는 이로 인해 역사적인 죄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현실적인 유익 앞에 쉽게 넘어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필요악이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공의를 바라지만 재판도 굽어진 판결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직장에서 어쩔 수 없이 악에 타협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도 현실의 유익 앞에 연약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잘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볼 때 답답하지만, 우리의 이런 죄와 허물을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무게로 인해서 자주 쓰러지고 또 쓰러졌습니다. 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등에 채찍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에 쫒기고 있느데 예수님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자꾸 쓰러지자 어쩔 수 없는 것을 본 군병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시몬은 얼떨결에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족들도 다 믿음을 갖고 초대교회에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은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잉태하는 것, 여자가 젖을 먹이는 것은 아름답고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모든 가정과 자녀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2년 동안 포위합니다. 당시 환란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사람들은 가죽 띠를 뜯어먹고 굶주림으로 인해 어린아이를 삶아먹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은 약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푸른 나무는 예수님을, 마른 나무는 불의한 유대민족을 가리킵니다. 수액과 물기가 충분한 푸른 나무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징벌하신다면, 범죄한 예루살렘에 대해서 얼마나 심하게 징벌하시겠습니까? 오랫동안 지은 죄로 인해 마른 나무와 같은 인생들이 받을 심판은 상상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우리가 저지른 죄와 허물로 인해 받을 심판을 생각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형을 받게 된 두 명의 행악자와 함께 끌려가서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 중에 하나로 취급받으시되 중앙에 못 박히심으로 죄인 중에 괴수로 취급 받으셨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발가벗기고 십자가 위에 눕히고 길이가 18cm나 되는 굵은 대못을 손과 발에 박았습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살을 뚫고 손목 관절을 끊어서 나무판에 박혔습니다. 동맥이 끊어지자 뜨거운 피가 “쫙” 하고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경이 잘려나가는 고통에 예수님의 온 몸은 부르르 떨었습니다. 십자가를 일으켜 파놓은 구덩이에 세우자 쿵 소리와 함께 몸의 하중이 못이 박힌 손과 발에 쏠려서 손과 발의 상처는 더 깊이 찢어졌습니다.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장면이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합니까? 생명은 피에 있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갈증으로 입천장이 갈라지고 목구멍이 바싹바싹 타서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때의 고통을 시편 22편 14,15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 비방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이런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야 할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무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를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4-6).”
사람들은 죄를 즐길만한 것이라 생각하고 커피 한 잔 마시듯이 용감하게 죄를 범합니다. 처음에는 죄의식을 느끼다가 나중에는 죄책감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것이어서 반드시 대가를 요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무서운 고통을 받으시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로 내가 달려있어야 할 그 십자가에 내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자기의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지금까지 들어본 말들 중에 가장 놀라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죄인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하시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기도 덕분에 우리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고 통회 자복하며 구원을 받습니다. 죄의 세력은 참으로 강하고 끈질깁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 쾌락을 위한 정욕, 식욕 등 기본적인 욕구 외에 명예욕, 권력욕,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시기심, 질투, 자기만 잘난 줄 아는 교만, 자기의 죄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는 죄, 즉 내로남불. 우리가 죄를 생각하면 참으로 섬뜩하고 깊고 깊은 어두움입니다. 이 죄의 세력이 인간을 사망으로 몰고 갑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당한 자는 영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은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으셨습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이 어떠합니까? 35-37절을 보십시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면 자신도 구원하라, 네가 너를 구원하라. 이 말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주님이 스스로를 구원하시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또 내가 나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스스로에게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바로 알고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시험을 참으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우리도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렇게 시험과 부끄러움을 견디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의 차지였습니다. 군병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 후에 서로 예수님의 옷을 갖기 위해서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지한 군병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단지 군병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무지한 무리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무슨 죄를 짓는지 알지 못한 채 죄를 짓고 있는 우리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자기를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은 시대를 넘어서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요한복음을 보면 아람어, 라틴어, 헬라어 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만인이 그를 보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달린 두 행악자 중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런데 또 한 행악자는 그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사형을 당하는 중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구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인생 마지막에 구원 열차를 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볼 때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로 말미암는가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신약의 아브라함이라고 불리웁니다.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제 육시는 정오이고 제 구시는 오후 세시입니다. 가장 빛이 밝아야 할 때에 짙은 어둠이 세상을 덮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차마 고통스럽게 죽으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어둠이 이 세상을 덮고 악이 선에 대해서 승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성전예배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예배당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의 마음이 변화를 받아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3).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말씀하시고 숨지셨습니다.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사되고 묻히셨습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의 죄를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무지와 이기심과 무정한 마음을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의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그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나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하심과 함께 나도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새 사람이 됩니다. 이 십자가를 영접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