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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2023년 부활절 말씀 제 1 강(고린도전서 15:1-34)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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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9회 작성일 23-04-1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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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부활절 말씀 제 1 강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말씀 /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023년 부활주일을 허락하시고 동교와 화랑이 연합하여 예배드리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지난 한주동안 봄비가 내리면서 초여름처럼 높았던 기온도 떨어져 추웠는데, 이렇게 화창하고 시원한 날씨로 부활을 맞이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구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4월 초순인데도 벚꽃 엔딩이 오고 말았습니다.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라고 했는데, 이러다간 “벚꽃의 꽃말이 개강”이라고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봄은 봄입니다. 봄은 생명의 활기를 깨달으면서 부활을 노래하고, 부활을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입니다. 추운 겨울동안 땅이 얼고 우리 몸도 움츠러들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를 한없이 움츠러들게 합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과 슬픔과 분노와 허무를 느낍니다. 그런데 따스한 봄볕에 눈이 녹고 언 땅에서 새순이 올라오듯 부활로 인해서 우리 인생에 새로운 소망이 돋아나게 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말씀에 기초해서 부활의 은혜를 돌아보게 하시고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부활의 은혜를 새롭게 허락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부활과 그 의미에 대한 최초의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쁨으로 증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전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려줍니다. 그 점에서 고린도전서 15장은 우리에게 매우 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는 무슨 상관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돕기 위해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전도 여행을 통해서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개척 후 바울이 떠나고 시간이 지나자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도 조금씩 변질되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등 파벌을 나누며 분쟁이 발생하고, 새어머니와 음행하는 등 도덕적인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또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서로를 비난하고, 성령의 은사나 집회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하며 시시비비를 따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을 떠올리며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을 하나씩 하나씩 언급하고 방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써 15장에 이르러 그 많은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활의 믿음을 가지도록 적고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가정법은 현실과 반대되는 경우에 사용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현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나 음란과 우상숭배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처음의 감격과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주님을 섬기던 교회에도 다툼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인본주의와 물질주의 쾌락주의에 물들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살아간다는 거룩과 정직의 정신은 상실하고 세상과 별차이가 없거나 어떤 점에서는 세상만도 못한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신앙생활에 회의가 생기고, 구원의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이미 전해 준 그 복음을 굳게 붙들어야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교린도 교회의 문제는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그리스반도 남쪽의 국제적인 상업도시이자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세계 각국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도시는 풍요로왔습니다. 물질이 많다보니 사람들은 향락에 쉽게 노출되었습니다. 이런 부유하고 향락적인 도시에 거룩한 교회가 세워졌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홍대가 마치 바울 사도 시대 고린도와 같은 환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홍대 부근에서 살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좋은 데 사시네요”라고 말합니다. 그분들은 홍대가 놀기 좋은 곳, 클럽이나 술집, 옷가게 등이 많은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좋은 곳”이라고 말해줍니다. 한편 다른 UBF 목자님들을 만났을 때 제가 홍익대학교를 섬기는 센터라고 말하면 “그런 곳에서 역사 섬기시느라 힘드시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종합해 보면 홍대는 시끌벅적하고 제멋대로이고 자유분방한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가 섬기는 홍대가 향락의 도시가 아니라 선교사님들의 피가 흐르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까운 양화진에는 이땅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신 분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이분들의 믿음과 부활신앙으로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이곳 홍대를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고린도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복음의 절대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열정도 식고 세상 풍조를 따라서 살다 보니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돈, 가정, 직장 문제 등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는 말씀으로 영접하면서 부활의 복음에 대한 나의 믿음은 어떠한지 현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에 전해 준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성경에 예언된 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인들의 시기심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했고, 예수님은 죄 없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성경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왜 복음, good news, 기쁜 소식일까요?

첫째, 십자가의 복음.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을 것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이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려줍니다. 즉,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에 찔리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나에게 평화와 치료가 주어졌고,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났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는 사람을 용서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죄에서 자유를 주시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덧입혀 주사 이 땅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죄에서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분명합니다.

둘째, 부활의 복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신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 나버리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죽음이 끝이라고 죽어버린 사람을 누군가 흔들어 깨우며 심판대 앞에 세울 때, 그 사람은 얼마나 놀라게 될까요? 이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는 영원한 형벌, 둘째 사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에 처해지지 않고 영원한 구원을 얻습니다.

5절부터 8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인들을 내세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게바나 열두 제자와 같은 최측근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500명이나 되는 형제들에게 동시에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들 중에 대다수는 이 편지를 쓸 때까지도 살아 있었습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친동생인데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그리스도로 믿지 않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가 되었습니다(갈1:19,2:9). 그 후에 예수님은 바나바나 실라와 같은 다른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자기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이 팔푼이처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핍박하던 어리석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에게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 보이셨다가고 증언했습니다. 증인은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가 아니라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증인이 많을수록 증언의 신빙성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부활의 증인들은 입으로만, 말로만이 아니라 변화된 삶을 통해서 자신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진실된가 증명해 보였습니다. 두려움 많던 자가 용기 있는 사람으로, 의심의 사람이 확신의 사람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적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소시민적인 사람이 믿음의 용사가 되어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변화야말로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거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부활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수 없이 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데 죽은 자들의 부활은 믿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이며,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려줍니다. 13절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육신을 입고 오신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체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한 몸의 부활로서 우리도 몸으로 부활한다는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믿는 신앙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에서 이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바울이나 교회가 전파하는 것이 다 거짓이고, 기독교 신자들의 믿음도 모두 엉터리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죄와 사망의 문제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했는데, 이것도 거짓이 되니 우리는 여전히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얼마전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승부조작이나 폭행 등으로 처벌받은 100명을 사면한다고 발표했다가 여론이 들끓자 며칠 만에 이를 철회해 버렸습니다. 처음 발표를 듣고 사면을 받는 줄 알고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실망이 되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된 줄 알았는데, 다시금 죄와 사망의 감옥에 끌려들어간다면 이는 정말 슬픈 소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기대하며 먼저 죽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불쌍합니까? 결과적으로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부활 소망가운데 젊음을 불태워 헌신하시고 노심초사 수고하신 우리 선교사님들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분들입니다. 요즘같이 물질을 귀하게 여기는 시대에 십일조, 십이조를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우리 목자님들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때로 자식들을 돌보지 않으면서까지 대학생 양들을 섬기느라 시간과 정열을 쏟아붓는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은 또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처럼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는 거짓되고 엉터리 종교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도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이전과 다른 가치관, 변화된 가치관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안 믿는 이웃집 사람과 가치관이 똑같다면 나의 부활신앙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몸의 부활과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농부들은 묘목을 심고 물과 비료를 주면서 3,4년 동안 첫 열매가 나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야, 이제 매년 열매를 맺게 되는구나!”하며 기뻐합니다. 첫 열매는 그 다음에 계속 열매가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착했습니다. 바다를 건너는 동안 배에서 많은 수가 죽었습니다. 도착해서 겨울을 넘기는 동안 풍토병과 굶주림으로 또 많은 수가 죽었습니다. 배고픔과 추위는 언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이듬해 밭을 일구고 씨를 뿌려 곡식을 심었습니다. 드디어 가을이 되자 첫 열매가 나왔습니다. 이 열매를 본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배고파서 굶어죽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큰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기원입니다. 이처럼 첫 열매는 기쁨을 줍니다. 저희 가정에도 첫 열매로 인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결혼한 지 일 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봤더니 처형이 결혼한지 10년 넘게 아이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처가쪽 집안 내력인가 생각하면서 불임치료에 용하다는 강남 차병원까지 진료를 보러 갔습니다. 제 아내는 간절히 기도하면서 아이를 주시면 선교사로 드리겠다고 서원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기뻐하시고 병원을 다닌지 얼마되지 않아 제 동역자는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희 집안에 첫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아이를 달라고 한 맺힌 기도를 했던 “한나”가 되었습니다. 첫 열매가 맺히자 그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딸 하나, 아들 셋, 도합 네 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지금은 다둥이 집안인 저희가 아이가 안 생겨서 차 병원까지 다녔다는 말을 믿지 않을 정도입니다. 첫 열매는 그 뒤에 맺힐 열매를 기대하게 하고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의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물고를 트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에게 붙은 모든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아담은 사망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에게 붙은 모든 사람이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멸하시고 부활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활로 들어가게 하는 생명의 창시자가 되셨습니다.

22절은 위대한 해방선언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갑자기 찾아옵니다. 우리는 과거에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3절 말씀을 보면 부활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이요, 마지막에는 불신자들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시작으로 이후 연속적인 부활을 통해 결국 만유의 질서가 회복될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파괴된 창조의 질서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완전히 회복됩니다. 그날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영원한 통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 신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는 사람들 중에도 부활에 대한 생각이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부활”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떠올립니다. 아주 먼 옛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나사로의 누이들이 말한 것처럼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며, 아주 먼 미래에 자신의 몸이 부활할 것을 안다고 합니다. 한 부류는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한 부류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당장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먼 미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에는 현재와 부활의 접점은 없어 보입니다.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와 부활은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그리고 많은 선배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의 가치관으로 현재를 살아갑니다.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에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때마다 위험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에베소에서는 맹수와 같은 사람들에게 싸여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행20:19). 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 하였고, 매도 수없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습니다. 여러 번 주리며 목마르고, 춥고 헐벗었습니다(고후11:23-27). 바울의 생애는 한 마디로 주와 복음을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팔자타령을 하거나, 내 인생 왜 이럴까 한탄하며 슬퍼하거나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어떤 고난과 절망 가운데서도 불사조와 같이 다시 일어섰습니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부활신앙을 덧입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날마다 죽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반대쪽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32절 하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사람들은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은 대학교 때 <PPYP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여기저기 놀러다녔다고 했습니다. <PPYP>가 뭐냐고 물으니 <Play Play Young Play> 즉,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의 줄임말이라고 했습니다. 향락과 쾌락주의는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에 기초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날이 갈수록 향락사업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끼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나 33절 말씀에서 바울은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악한 동무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행실을 더럽힙니다. 우리는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시는 그날에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으로 깨어 의를 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무지로 인해 세상과 양다리를 걸치고 동무들에게 미혹되어 죄를 짓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장차 있을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종말이 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실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하시고, 모든 원수들이 멸하시고 마지막으로 사망을 멸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사람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품고 날마다 부활의 증인으로 현재를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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