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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1년 눅 31강(18:9-30) 영생을 얻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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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56회 작성일 23-04-03 09:58

본문

2023년 누가복음 제 31 강
말씀 | 누가복음 18:9-30
요절 | 누가복음 18:29,30

영생을 얻는 길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어린아이들과 하나님 나라 비유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앞에 겸손해야 함을 알려 줍니다. 부자 관원은 권력과 많은 재물을 소유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는 돈을 하나님 자리에 놓고 섬기는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이 시간 내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영생을 누리며 살도록 주님께서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첫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18:9-14).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우리도 감사제목을 찾고 기도하지만 바리새인의 감사 기도는 좀 이상합니다. ‘토색’은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강도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죄인들과 같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사실은 그도 율법을 문자적으로 행할 뿐 마음속에는 탐욕과 온갖 더러운 죄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여겼습니다(16:14-18).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면 말씀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배우고 가르친 대로 실천을 해야 복을 받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죄인이 다른 죄인과 비교하면서 잘났다고 해 봤자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아마도 그는 이방인의 뜰 끝부분에 서 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그는 자신감이 없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에는 가치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겸손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할 때 취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은 마땅히 심판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이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합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는 원어로 보면 ‘욤 키푸르’로서 속죄의 의미가 있습니다. 속죄의 피로써 자신의 죄를 덮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가 너무 추해서 심판받아 마땅하지만 속죄의 피로 씻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고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는 것이며, 죄 없이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쓰지만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공로가 1%로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갈6:14). 우리가 아무리 경건한 생활을 하고, 많은 업적을 쌓았더라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이 겸손하게 또 진심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어린 아이들과 하나님 나라(15-17).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의 어린 아기를 데려왔습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장로들이나 율법교사들에게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여기에 나온 ‘어린 아기들(babies)’은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느끼며 부모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만이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아기들을 부모들이 데리고 오니 꾸짖었습니다. 아기들이 막 울자 말씀을 듣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들에게 아기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기들은 부모에게 절대 의존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믿어야 합니다. 또한 아기들은 순수합니다. 예수님은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7).”   
  셋째, 내게 한 가지 부족한 것(18-30).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관리는 회당장이나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유대사회의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또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사회적인 명성과 큰 재물을 소유했으니 모든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고 어릴 적부터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는 모든 딸 가진 어머니들이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절실한 인생문제가 있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고 있는데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늘 두렵고 불안하고 허무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진 것들이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인생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는 뭔가 선한 행실을 더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하는 부자 청년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고자 하십니다. 구체적으로 계명에 비추어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구약에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신30:13; 겔33:15).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길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서 인간관계에 관한 다섯 계명을 언급하십니다. 이는 이웃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대답합니다. 놀라운 대답입니다. 유대인들은 6살 때부터 율법을 암송하기 시작하여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12세부터는 율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그는 사춘기의 질풍노도와 같은 반항과 정욕의 욕구를 부인하고 율법에 순종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원의 확신과 영생의 기쁨이 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판단과 정죄와 심판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의 요구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흠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박멸하기 위해서 다메섹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고백합니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을 지키고자 하다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탄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나온 이 청년은 율법을 소극적인 자세로 이해했습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선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인데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잘 몰랐습니다. 그는 영적인 눈이 감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가 훌륭하지만 그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걸림돌이었습니다. 22b절을 보십시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가 가진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진 재물을 다 팔라”는 것은 엄청난 도전입니다. 부자 관원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는 말씀인데, 누가 이런 방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부자 관원이 영생을 얻도록 이렇게 강하게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실까요?
  첫째로, 율법의 근본정신이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는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담긴 정신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계명의 근본정신은 이웃사랑입니다. 부자 청년은 지금까지 간음도 하지 않고 살인도 하지 않고 도둑질도 하지 않고 거짓 증언도 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왔지만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로움을 쌓고자 율법을 지켰습니다. 지금까지 율법은 잘 지켰지만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가 만일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자 한다면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굶주림과 삶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둘째로,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한 것처럼 부자 청년도 돈을 사랑했습니다(눅16:14). 돈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욱 의지했습니다. 돈이 그에게 우상이었습니다. 그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 1계명도 지키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준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재물을 팔아서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계명을 온전히 준수하는 것이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마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행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걸음입니다.

  그가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서 드리는 것 또한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몇주전 메시지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면 그 친구들이 그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친구로 삼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그에게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그는 선한 행실을 통해서 영생을 얻고 싶었지만 재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재물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명예일 수도 있고, 가정과 자녀일 수도 있고, 자신의 역사를 성공적으로 이루는 것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마음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상입니다. 그것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놓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소중할 수 없고 영생보다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자 청년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선진국과 우리나라가 부자가 될수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고 즐길 것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이 세상 재물을 따라가다가 함께 멸망하는 것보다 이 세상 재물을 잃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고난이 없이 부자로 살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을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27).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님은 그를 격려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29,30).”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고 헌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축복하십니다. 현세에서도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보장해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고 세상 영광을 꿈꾸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이 꿈꾸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천국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순례자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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