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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24(14:15-31) 다른 보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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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78회 작성일 06-10-1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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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24 강                                                               
말씀 요한복음 14:15-31
요절 요한복음 14:16

다른 보혜사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수님은 보혜사로서 제자들을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십니다. 다른 보혜사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의 능력은 구하지만 성령을 통한 거룩한 삶과 친밀한 교제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14장 전반부에서 도마와 빌립의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2).”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15절뿐만 아니라 21, 23, 31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계명을 지키는 동기가 자기 의를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고 외식했습니다. 그들은 계명을 겉으로만 지켰고 마음으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했습니다. 사랑의 관계성을 증명하는 길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계명을 완성하게 됩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람은 그 본성이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하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사람의 본성과 인격이 변화되도록 도우십니다. 악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사랑이 자라고 내면이 성장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본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세 살 때나 여든 살일 때나 똑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인격이 자라고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좀 부족하더라도 사랑이 자라고 인격이 살찌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습니다.
둘째, 성령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십니다. 다른 보혜사는 “같은 종류 중에서 다른 보혜사”라는 뜻입니다. 다른 보혜사는 하나님으로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역할을 제자들에게 행하십니다. 보혜사란 보호하고 은혜를 베풀고 가르치시는 선생이십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보혜사를 위로자, 상담자, 권면자로 번역하였습니다.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로서 ‘우리 곁에 와서 우리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신 후에 교회에 오셔서 그리스도가 땅 위에서 하던 일을 계승하십니다. 다른 보혜사는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외롭고 고독할 때,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 때에도 그는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나 성공할 때에도, 기쁠 때나 슬플 때에도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사랑하는 부모님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나 목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17b절을 보십시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되 우리 속에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본래 우리는 죄로 인해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함께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고 거듭난 사람은 이제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롬8:9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성령의 내주하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자리를 차지하심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갈 2:20; 갈 4:6).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깊이 맺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공동체 가운데 세워진 성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임마누엘”의 약속이 신약 시대에 와서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1:14)” 성육신 사건이며, 보혜사 성령이 오심으로 삼위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저희와 ‘거처를 함께 하시는(23)’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는 이전 어떤 시대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충만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삼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고전6:19). 그리고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 것들에 목마르지 않고 성령으로 인해 참 만족을 누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8). 고아가 불쌍한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고아는 누구에게 지원을 받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양육해 주시고 돌보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으로 강림하십니다. 그 날에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믿는 자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그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신비주의에 있지 않습니다. 많은 고행에 있지 않습니다. 엄청난 지식과 능력을 갖추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촌사람이요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깊이 알고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고기잡이를 허탕치고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베드로는 지치고 피곤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순종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고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전도여행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적 권세를 믿고 순종했을 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힘 있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순종하여 영원한 라이벌 요한을 시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섬겼을 때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었고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며 합심동역의 그릇을 통해 뻗어나갑니다.
 
  이때 가룟인 아닌 유다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22)” 그는 예수님께서 너무 자기들과만 가까이 지내시고 세상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인기를 얻어야 자신들의 장래도 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3,24).”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기보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사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보다 죄를 더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책망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죽어라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그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형통하게 됩니다.

셋째,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17a절을 보십시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과거에 계시된 진리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진리를 밝히십니다. 그는 임의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올바로 해석해 주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으로서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말씀을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성경을 많이 공부한 분들도 잘 알고 있던 말씀들조차도 때로는 머리에서 뱅뱅돌기는 하는데, 알쏭달쏭하고 맹숭맹숭하기만 합니다. 그럴 때면 소감을 쓰는데도 꼭 마음에 없는 말을 쓰는 것 같아 괴롭기만 합니다. 말씀은 머리가 좋다거나 공부를 많이 한다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을 때 말씀의 뜻을 깨닫고 무릎을 치며 감격합니다. 관절과 골수가 쪼개지는 전율을 느끼며(히 4:12), 말씀의 빛에 의해 드러나는 눈부신 세상과 빛나는 삶을 보는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계시해 주십니다. 성령의 가르침은 일종의 영감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비춰 주시는 빛은 마음을 덥게 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주장하여 하나님께 충성하게 합니다. 또한 성령의 가르침은 영혼을 겸손케 하는 지식을 제공합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될 때는 소감을 몇 페이지라도 쓰고 싶고, 아무나 붙들고 말씀을 가르쳐 주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심령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배우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본주의에 기초한 지식들이 끊임없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13세기 구라파에 책 종류가 2000종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에서 하루에 1800 종류의 책이 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현대는 지식 정보화 시대로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많은 지식을 인간에게 이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생각은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관심이 적고 무엇이 자기에게 유익한가에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인간 사회는 비인간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결국 이 사회를 사탄적인 사회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퍼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펼쳐질 때 이 세상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며 평화가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리더들, 캠퍼스의 학생들, 새 양들과 자녀들에게 일대일로 부지런히 가르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바다같이 퍼져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예수님은 평안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어딘가로 가신다고 하자 불안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주십니까?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안을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한계적이고 쾌락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환난 가운데서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근심, 두려움, 불안, 스트레스, 짜증, 죄의 소욕,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 안에 개척하고 도전할 수 있는 스피릿을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북한의 핵실험으로 불안한 이 백성과 우리 마음에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전쟁에 대한 염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한반도에 비핵화가 실현되고 평화가 유지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들었으므로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기뻐해야 할 일을 두고 도리어 근심하는 제자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일이 이룰 때에 그들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29). 예수님은 이제 후로는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 임금 즉 사단의 역사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예수님과 관계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때문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기 위해서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대신 할 다른 보혜사로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게 하시는 성령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가운데 사랑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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