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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23(13:36-14:14) 내가 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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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219회 작성일 06-10-01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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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23 강                                                               
말씀 요한복음 13:36-14:14
요절 요한복음 14:6

내가 그 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번 주가 추석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향에 있는 아버지 집을 찾아 갑니다. 온 가족이 아버지 집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어려움을 나누는 가운데 새 힘을 얻고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습니다. 길을 찾으면 마음에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평화와 쉼을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아버지 집은 평화와 사랑, 은혜가 충만한 곳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인해 삶이 힘들고 피곤한 분들에게 예수님은 근심을 해결할 길이 되시고, 구원의 길이 되시고, 능력을 얻는 길이 되십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길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분들에게 예수님이 왜 길이 되시는지 나누기를 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허무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 되시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3:33절에서 예수님은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속이 상했는지 큰 소리로 맹세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리고 좇은 사람, 좋은 직장을 버리고 좇은 사람, 돈 잘 버는 세리직을 버리고 좇은 사람, 아버지와 가족들을 버리고 좇는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가겠다고 하시니 제자들로서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또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삽니다. 부모님이나 친구를 의지하고, 자신의 능력이나 물질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며, 또 자신의 능력으로 이뤄놓은 환경이 얼마나 변하기 쉽습니까?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합니다. 학생들은 시험 걱정, 학점 걱정, 취직 걱정, 결혼 걱정, 가정을 이룬 분들은 아이들이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교육을 제대로 시킬 수 있을까 근심합니다. 중년을 넘긴 분들은 건강 걱정, 정년 퇴직 후의 일자리 걱정, 노후 생활이 준비가 되지 않아 늘 불안하고 그래서 늘 근심에 싸입니다. 근심 걱정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문제입니다. 염려는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됩니다. 나중에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까지 염려하게 됩니다. 또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전염을 시킵니다.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과 또 우리들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첫째,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14장 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여러 가지 근심들을 극복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늘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롬8:32절은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현대인의 성경)” 이 하나님을 믿을 때 모든 근심이 사라집니다. 근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만약 우리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벧전5:7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어려움이 생길 때 사람을 의지하려고 두리번거리지 말고, 내게는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생각하며 눈 딱 감고 하나님을 믿고 도전해 보면 의외로 근심이 사라지고 담대해집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도전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체험들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삶의 기초가 됩니다. 이를 체험한 사람은 사람이 떠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전혀 당황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환경을 믿고 의지하면서 근심하고 불안해하고 못나게 살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자립적이고 늠름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믿음이 생기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둘째,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집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이 근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처소 때문이었습니다. ‘내 집 마련’이 그들의 꿈이었고, 세상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늘 근심했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려고 할 때 절대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 자체가 결코 안정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회전하는 그림자요(약 1:7), 풀의 꽃이요(약 1:10, 벧전 1:24), 몸에 입는 옷(사 50:9, 히 1:11,12)과 같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꽃처럼 떨어지고, 옷처럼 해어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기어이 이 세상에다 안정된 처소를 마련하고자 할 때 불안은 따라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할 뿐만 아니라 한번 잡은 것을 놓지 않으려고 욕심 사나워지고 이기적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높은 비전이나 큰 뜻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좁쌀 만한 내면을 가지고 잔챙이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근심에서 벗어나려면 ‘처소’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절에 나오는 ‘처소’를 KJV 영어 성경에서는 “맨션(mansion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맨션은 동방의 크고 화려한 궁전을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이런 맨션을 마련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잡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이 세상 처소에 대한 걱정과 욕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 잠깐 머물다 갈 이 세상에 처소 한 칸 마련하고, 처소를 마련한 후에는 그것을 꾸미거나 좀 더 큰 처소로 이사하기 위해 목을 매고 살다가 생을 마쳐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의 은택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하늘나라에 있음을 믿는 믿음으로 삶으로써, 우리가 세상에서 비록 셋방에서 살지라도 여유 있게 살며, 또 뜻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시자 도마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다고 하자 도마는 그 길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알리라.”고 말씀하시자 “난 모르는데? 진짜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예수님을 따르는 거지?” 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의 말을 듣고 자신을 누구라고 선언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곧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죄사함을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속죄제물이 되심으로써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에는 휘장이 쳐 있었습니다. 이는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히 9:8).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휘장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막15:38). 이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보이신 것입니다(히 10:20).
  이같이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요(딤전 2:5),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3:13).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그 길에 대해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 넓고 편하기를 원합니다. 또 그 길이 많기를 바랍니다. 자기 마음에 따라 편리한 길을 골라잡거나, 이길 저길 바꿔 다녔으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적지는 하나이나 길은 많다고 주장합니다. 산꼭대기는 하나이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많지 않는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는가 하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그런 다원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종교들이 여러 가지로 길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종교는 자력 구원을 외치고 있는 인본주의에 불과합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고 인간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시한 여러 가지 구원의 길을 편리한 대로 골라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십니다. 

  7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길이시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았다면 하나님도 알았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빌립이 답답하다는 듯이 예수님께 나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은 빌립이 하나님을 알았고 보았다고 말씀하지만, 빌립은 전혀 그렇지를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성경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삼 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답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머리 속에서는 뱅뱅 도는데 실감을 할 수 없었고, 마음에 분명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빌립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립의 이런 요청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우상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철 구조물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 속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도움을 주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끼고 만지고 체험하고 싶어 합니다. 모세도 하나님과 대면해서 말씀을 나누었지만 그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 하나님도 뒷모습의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채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답답해하는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9-11).”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행하시는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내가 가는 길이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알 때,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고, 또 심지어 누가 죽인다고 해도 아무런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행 4:12). 그러므로 그는 권세자들을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큰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이시오, 예수님만이 거기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짐으로써 근심을 버리고 확신에 찬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소망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보다도 더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비전을 주십니다. 이는 제자들을 달래서 떼어놓으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이루었는가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켰습니다.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죽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렇게 근심에 싸여 있던 못난 제자들이 그렇게 큰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있습니까? 13절을 봅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 예수님은 그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친히 시행하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얻으시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시행하시리라 약속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큰일을 이루었는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기도할 때 우리가 큰일을 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사실 어려운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많아서 기도할 때, 처음에는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기도를 그만 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욱 힘써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근심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근심할 것이 많습니다. 영적인 환경이 점점 더 힘들어 이런 시대에 양 칠 일도 걱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다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시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 되시며 큰일을 하는 길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또 우리가 어떤 문제 가운데 있던지, 또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지 길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길 되신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 가을에 큰일을 해 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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