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22(13:1-35) 서로 사랑하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06년 요한복음 제 22 강
말씀 요한복음 13:1-35
요절 요한복음 13:34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란 말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이 사랑을 먹고 마시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에도 여러종류가 있습니다. 사랑의 깊이가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차원이 높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는 본을 보이셨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자기중심이 되기 쉬웠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란 시간적으로는 ‘죽기까지’를 말하고, 내용적으로는 ‘변함없이, 힘을 다하여’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죽기까지 변함없이 힘을 다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이해와 한계를 초월한 사랑입니다. 현재 제자들의 모습은 사랑스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서 자기를 배반하고 도망갈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며 키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세상적인 왕으로 등극하시는 줄 알고 세상 소망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가장 중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람에게 기대를 두고 뽑았다가 “알고 보니 형편없는 놈이구나.”하면서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허물이 많아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까지 끝까지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써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끝까지, 그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을 사랑하셨건만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스승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마귀는 아무에게나 악한 생각을 넣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평소에 돈궤에서 얼마씩 도둑질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죄의식이 있었지만 반복되다 보니 죄의식도 없어졌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마음은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사단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또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기대했던 세상 소망들이 무너져 버리자 대제사장들에게 은 30냥을 받고 팔아넘기고자 했습니다. 그는 돈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때 천하에 몹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정말 너무나 간교한 놈입니다.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그와 가장 가까운 아내 하와를 이용했듯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제자 중 하나를 이용했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3).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권세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발을 씻기는 일은 이방인 종들이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끼리는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각자 자기 발도 씻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발을 씻지 않으면 냄새를 피우게 되고 무좀에 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염을 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죄악된 인생들을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권세로 징계하시지 않고 도리어 섬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놓고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수건으로 뽀송뽀송하게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120개나 되는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가락을 일일이 씻어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 앞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발을 빼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베드로는 너무나 황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의 발을 향유를 묻혀서 씻겨드리지는 못할망정 예수님께 씻김을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이유도 섬김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끼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이유도 섬김을 받고자 하는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권세자들 같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목에 힘을 주고 권세를 부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잘못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이와 같이 권위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은 항상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구별하려 듭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는 교만을 부리고, 자기보다 높은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집니다. 또 높은 사람에게는 “당신은 높은 사람인데 왜 내게 이렇게 해 주지 않습니까?” 요구하고, 낮은 사람에게는 “너는 낮은 사람인데 왜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느냐?”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불평을 하고 낮은 사람은 못살게 굽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로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리더가 섬기는 생활을 하게 되면 세상에서는 따르는 사람들이 기어오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사람들이 권위를 부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로서자기 머리 위에 올라가고자 하는 교만한 자들을 사랑으로 징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섬기는 삶의 위대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씻김을 받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까요? 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면 베드로는 버림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주시고 베드로는 죄인으로서 씻김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겨주심으로서 구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속죄와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난 베드로의 태도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대야에 머리를 쳐박으면서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9).” 베드로는 언제나 극단과 극단을 오고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깊이 신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자 철저히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이 유다와 가장 큰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흥분하는 베드로를 가라앉히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 이미 목욕한 자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풍진세상에서 일을 하다 보면 욕심과 죄악의 먼지가 끼어 발이 더러워집니다. 우리가 날마다 발을 씻듯이 죄를 씻어야 합니다. 요즈음 손씻기 운동이 한창입니다. 손만 잘 씻어도 병의 70%까지 예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손을 잘 씻어 건강한 삶을 영위하듯이 죄를 잘 씻어 건강한 영적 생활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목적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 예수님께서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요 그들의 죄를 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도록 본을 보인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상대방의 허물과 약점을 들춰내고 판단하기보다 감당하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더 높이고 존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기보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먼저 씻어주어야 합니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대화하고 먼저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는 자세가 없이는 먼저 섬길 수 없습니다. 내 의지와 내 사랑으로 상대방의 발을 씻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깨끗함을 덧입어야 상대방의 발을 씻겨줄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께 나의 더러운 발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씻음을 받을 때 서로 발을 씻을 수 있고 서로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의 발을 들고 나가는 것은 소홀히 하고 상대방의 발을 씻어줄려고만 하면 오히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께 씻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많이 덧입을수록 어떤 힘든 사람도 감당할 수 있고 어떤 허물에 대해서도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비결은 얼마나 예수님으로부터 나의 더러운 발을 씻김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또 얼마나 서로의 발을 씻어주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의 발은 왜 저렇게 더럽고 형편없느냐고 판단만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주셨듯이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고 겸손히 그 발을 씻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우리가 머리로 알고 끝나버리면 복이 없습니다. 머리로 알뿐만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실제 삶에서 행할 때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많이 알고 있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소감을 쓰고 결단을 하지만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결단을 해도 오래 지속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침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바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섬기는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기 위해서 성경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배웁니다. 우리가 일대일 성경 공부를 여러 번 하다보면 진리가 선명해지고 또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어떻게 해야하겠다는 방향이 생깁니다. 이런 확신에 찬 지식이 생기면 이를 습관화시키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변화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마음먹기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38병자가 자신의 병이 낫고 싶은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러 가지 변명을 했던 것처럼 자신의 병을 고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는 타인의 관심을 유도하고, 놀고 먹고, 타인의 봉사와 친절을 유도하고, 타인의 미안한 감정을 유발하는 등을 은근히 즐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받은 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통찰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변화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귀찮아도 무조건 실행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이 능사는 아닙니다. 훈련해도 용수철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훈련의 동기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훈련하여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이기 까지는 6개월이 걸립니다. 이러한 습관은 결국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인격이란 영어로 캐릭터(character)인데 “조각하다, 새기다‘라는 의미의 그리스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인격이란 습관의 총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는 리더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18-30절까지는 유다의 배반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 조각을 받고 곧 나갔는데 밤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섬길 때 우리는 배반을 당하고 이용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속은 것이 아닙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영광을 얻으셨고 하나님도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34,3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관계성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계명으로서 권면사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사랑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계명이란 의지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고 희생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어로 아가페인데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희생적인 사랑을 주고, 받을 때 참 만족을 느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됩니다. 제자의 표는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시기하고 경쟁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동역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경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덧입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동역했을 때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의 비밀을 깨닫고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또한 저자 요한은 베드로 때문에 항상 둘째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뼈가 썩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사랑의 사도가 되어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일4:7,8).”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을 행하신다.”나 “하나님은 사랑과 같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꾸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면 변화와 성장의 출발점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열매도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사랑의 행동을 실천할 때 성숙한 사람들로 변화됩니다. 사랑은 서로 섬기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의롭게 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2절에서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할 때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고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제자로 성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 문제가 있지만 여유를 가지고 형제를 돌아보고 필요를 섬기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내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사랑은 형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이해로 나아갑니다. 형제의 형편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편에 서서 지지해줄 수도 있고 권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형제의 장점은 귀하게 여겨 살려주고 약점은 감당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부족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참된 교회의 표는 건물이나 사람 수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임인가 아닌가에 달려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사랑할 때 피차에 힘을 얻고 사랑에 목마르고 외로운 양들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먼저 이해하고 섬기는 가운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3:1-35
요절 요한복음 13:34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란 말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이 사랑을 먹고 마시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에도 여러종류가 있습니다. 사랑의 깊이가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차원이 높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는 본을 보이셨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자기중심이 되기 쉬웠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란 시간적으로는 ‘죽기까지’를 말하고, 내용적으로는 ‘변함없이, 힘을 다하여’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죽기까지 변함없이 힘을 다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이해와 한계를 초월한 사랑입니다. 현재 제자들의 모습은 사랑스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서 자기를 배반하고 도망갈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며 키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세상적인 왕으로 등극하시는 줄 알고 세상 소망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가장 중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람에게 기대를 두고 뽑았다가 “알고 보니 형편없는 놈이구나.”하면서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허물이 많아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까지 끝까지 도우셨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써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끝까지, 그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을 사랑하셨건만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스승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마귀는 아무에게나 악한 생각을 넣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평소에 돈궤에서 얼마씩 도둑질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죄의식이 있었지만 반복되다 보니 죄의식도 없어졌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마음은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사단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또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기대했던 세상 소망들이 무너져 버리자 대제사장들에게 은 30냥을 받고 팔아넘기고자 했습니다. 그는 돈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때 천하에 몹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정말 너무나 간교한 놈입니다.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그와 가장 가까운 아내 하와를 이용했듯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제자 중 하나를 이용했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3).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권세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발을 씻기는 일은 이방인 종들이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끼리는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각자 자기 발도 씻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발을 씻지 않으면 냄새를 피우게 되고 무좀에 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전염을 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무책임하고 죄악된 인생들을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권세로 징계하시지 않고 도리어 섬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놓고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수건으로 뽀송뽀송하게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120개나 되는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가락을 일일이 씻어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 앞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발을 빼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베드로는 너무나 황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가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의 발을 향유를 묻혀서 씻겨드리지는 못할망정 예수님께 씻김을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이유도 섬김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끼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이유도 섬김을 받고자 하는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권세자들 같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목에 힘을 주고 권세를 부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잘못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이와 같이 권위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은 항상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구별하려 듭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는 교만을 부리고, 자기보다 높은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집니다. 또 높은 사람에게는 “당신은 높은 사람인데 왜 내게 이렇게 해 주지 않습니까?” 요구하고, 낮은 사람에게는 “너는 낮은 사람인데 왜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느냐?”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불평을 하고 낮은 사람은 못살게 굽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로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리더가 섬기는 생활을 하게 되면 세상에서는 따르는 사람들이 기어오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사람들이 권위를 부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로서자기 머리 위에 올라가고자 하는 교만한 자들을 사랑으로 징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섬기는 삶의 위대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씻김을 받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까요? 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면 베드로는 버림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주시고 베드로는 죄인으로서 씻김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겨주심으로서 구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속죄와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난 베드로의 태도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대야에 머리를 쳐박으면서 간청했습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9).” 베드로는 언제나 극단과 극단을 오고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깊이 신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자 철저히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이 유다와 가장 큰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흥분하는 베드로를 가라앉히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 이미 목욕한 자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풍진세상에서 일을 하다 보면 욕심과 죄악의 먼지가 끼어 발이 더러워집니다. 우리가 날마다 발을 씻듯이 죄를 씻어야 합니다. 요즈음 손씻기 운동이 한창입니다. 손만 잘 씻어도 병의 70%까지 예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손을 잘 씻어 건강한 삶을 영위하듯이 죄를 잘 씻어 건강한 영적 생활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목적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 예수님께서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요 그들의 죄를 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도록 본을 보인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상대방의 허물과 약점을 들춰내고 판단하기보다 감당하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나보다 더 높이고 존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기보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먼저 씻어주어야 합니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대화하고 먼저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는 자세가 없이는 먼저 섬길 수 없습니다. 내 의지와 내 사랑으로 상대방의 발을 씻어줄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깨끗함을 덧입어야 상대방의 발을 씻겨줄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께 나의 더러운 발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씻음을 받을 때 서로 발을 씻을 수 있고 서로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의 발을 들고 나가는 것은 소홀히 하고 상대방의 발을 씻어줄려고만 하면 오히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께 씻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많이 덧입을수록 어떤 힘든 사람도 감당할 수 있고 어떤 허물에 대해서도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비결은 얼마나 예수님으로부터 나의 더러운 발을 씻김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또 얼마나 서로의 발을 씻어주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의 발은 왜 저렇게 더럽고 형편없느냐고 판단만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주셨듯이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고 겸손히 그 발을 씻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우리가 머리로 알고 끝나버리면 복이 없습니다. 머리로 알뿐만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실제 삶에서 행할 때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많이 알고 있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소감을 쓰고 결단을 하지만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결단을 해도 오래 지속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가르침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바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섬기는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기 위해서 성경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배웁니다. 우리가 일대일 성경 공부를 여러 번 하다보면 진리가 선명해지고 또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어떻게 해야하겠다는 방향이 생깁니다. 이런 확신에 찬 지식이 생기면 이를 습관화시키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변화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마음먹기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38병자가 자신의 병이 낫고 싶은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러 가지 변명을 했던 것처럼 자신의 병을 고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는 타인의 관심을 유도하고, 놀고 먹고, 타인의 봉사와 친절을 유도하고, 타인의 미안한 감정을 유발하는 등을 은근히 즐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받은 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통찰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변화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귀찮아도 무조건 실행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이 능사는 아닙니다. 훈련해도 용수철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훈련의 동기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훈련하여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이기 까지는 6개월이 걸립니다. 이러한 습관은 결국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인격이란 영어로 캐릭터(character)인데 “조각하다, 새기다‘라는 의미의 그리스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인격이란 습관의 총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는 리더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18-30절까지는 유다의 배반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 조각을 받고 곧 나갔는데 밤이었습니다. 사랑하고 섬길 때 우리는 배반을 당하고 이용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속은 것이 아닙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영광을 얻으셨고 하나님도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34,3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관계성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계명으로서 권면사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사랑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계명이란 의지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되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고 희생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어로 아가페인데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희생적인 사랑을 주고, 받을 때 참 만족을 느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됩니다. 제자의 표는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시기하고 경쟁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동역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경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덧입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동역했을 때 사도행전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의 비밀을 깨닫고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무엇보다 열심으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또한 저자 요한은 베드로 때문에 항상 둘째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뼈가 썩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사랑의 사도가 되어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일4:7,8).”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을 행하신다.”나 “하나님은 사랑과 같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꾸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면 변화와 성장의 출발점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열매도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사랑의 행동을 실천할 때 성숙한 사람들로 변화됩니다. 사랑은 서로 섬기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의롭게 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2절에서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할 때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고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제자로 성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 문제가 있지만 여유를 가지고 형제를 돌아보고 필요를 섬기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내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사랑은 형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이해로 나아갑니다. 형제의 형편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편에 서서 지지해줄 수도 있고 권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형제의 장점은 귀하게 여겨 살려주고 약점은 감당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부족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참된 교회의 표는 건물이나 사람 수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임인가 아닌가에 달려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사랑할 때 피차에 힘을 얻고 사랑에 목마르고 외로운 양들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먼저 이해하고 섬기는 가운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06jn22.hwp (0byte)
81회 다운로드 | DATE : 2006-09-24 08:49:3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