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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20(12:1-19) 어린 나귀를 타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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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076회 작성일 06-09-1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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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20 강                                                       
말씀 요한복음 12:1 - 19
요절 요한복음 12:14

어린 나귀를 타시니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랑은 영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사랑을 마리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이런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온 마음과 그 몸으로 사랑셨습니다. 희생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그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유대인의 왕이요 겸손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 받기를 기도합니다.

  1.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1-1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앞으로 엿새 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대속 제물이 되셔야 합니다. 이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얼마 전에 나사로를 살리신 곳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방문하시는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그 잔치가 벌어진 집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베다니 마을 사람들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준비하였습니다. 마르다가 여주인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볼 때  시몬은 나사로 가정과 가까운 친척이었던지 아니면 그도 예수님께 큰 은혜를 입어서 감사의 표시로 잔치를 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 겹경사가 날 때 여러 가정이 합심해서 잔치를 준비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르다는 자기의 은사를 살려서 분주히 잔칫상을 준비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내면이 많이 성숙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동역하여 잔칫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는 무덤에 묻혀 나흘이나 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에게 큰 호기심과 함께 영적인 소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내가 본 천국에 대해서 가히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으로 부르셨을 때 정말 오기 싫었지만 사랑하는 동생들과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어야할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 곁에 앉아서 먹고 마시며 말하는 자체가 부활에 대한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힘있게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먹기 시작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 병을 들고 왔습니다. 누가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순전한 나드향이었습니다. 이는 짝퉁 나드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지극히 비싼 향유로 순전한 인도산 나드였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이 비싼 향유를 한두 방울 정도 예수님의 머리에 떨어뜨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녀는 예수님의 발 곁에 와서 무릎을 꿇더니 2000-3000만원어치나 되는 나드 향유를 통째로 붓는 것이었습니다. 마26:12절에 내 몸에 향유를 부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볼 때 머리에서부터 부은 향유가 온 몸을 타고 흘러 내려 발에 까지 다다른 것 같습니다. 아무도 말릴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그 향유는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바닥으로 퍼졌습니다. 마리아는 고급 샴퓨로 부드럽게 감았던 깨끗한 머리털을 풀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부드러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었습니다. 향유 냄새는 집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이와 같이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씻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과거에 마리아는 여인의 저주받은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그녀는 눈짓을 하며 형제들을 유혹하고 또 그들에게 상처를 받아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에 들어오신 후 예수님은 가장 귀한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빠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려주셨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외롭게 살다가 오빠 나사로까지 죽어서 슬픔과 원망이 많았는데 죽어 냄새나는 오빠를 살려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슬픔과 충격이 컸던만큼 오빠가 살아난 이후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의 소망을 심어주셨으니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귀한 보배와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감사 차원을 넘어서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높여야 마땅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겼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을 지극히 높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모든 사랑과 진심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자 요한은 마태나 마가와 달리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지 않고 발에 부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왕으로서 기름부음 받으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발에 기름이 부어진 것은 예수님이 고난의 메시야이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범한 죄를 씻는 속죄 제사를 드리십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는 새 언약의 제사를 드리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을 창조하여 그들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왕되시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한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을 창조하여 그들 위에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왕이 되십니다. 이 뜻을 잘 나타내기 위해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발에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이런 행동을 본 유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4,5절을 봅시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유다는 마리아가 하는 일이 못 마땅했습니다. 그의 말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박애주의자의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가룟 유다의  속셈이 무엇이라고 저자는 말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실은 돈이 그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구제를 구실로 삼아 트집을 잡았지만 사실은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배우는 데서 오는 기쁨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쓰는 돈궤에서 몰래 도둑질하는 데서 오는 짜릿한 쾌감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신뢰를 받았지만 이를 배신하였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돈으로 바꾸어 헌금을 하였다면 자기가 더 많은 돈을 횡령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분노로 나타냈습니다. 그는 얼마 후에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행1:18). 예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한 사람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하되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어떻게 해석하셨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마리아의 기름 부음을 자신의 장례를 위한 준비로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이를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직감을 통해서 자신이 준비해 둔 향유를 부어야 할 때가 이때임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헌신해야 할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를 아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간직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성경에는 “그것은 예정된 것이었다(It was intende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기름을 붓는 것은 예수님이 장사되는 날을 위해 그 분의 몸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는 것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셔야 합니다. 마리아의 기름부음은 바로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이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부어드린 향유는 예수님의 발등을 지나 땅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유다가 화를 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있지 아니합니다(8).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물질적 유산이라고는 처형장에 입고 간 긴 옷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구제를 위한 가방을 늘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생적으로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죄를 위한 그 분의 직접적이고도 자기 희생적인 사명을 절대로 축소시키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깨닫고 있는 대로, 예수님이 이 잔치에 오신 이유는 세상 만민을 구원하는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한 헌신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가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영적인 일과 물질적으로 주는 일 중에서 어느 한 쪽에 더 전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시기적절하게 행해져야 하고 특히 십자가에 비추어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드린 향유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만민을 구속하는 일에 쓰셨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서 시간과 열정과 물질을 드립니다. 우리가 드린 것을 주님께서는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으시고 다 받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냉수 한 그릇 드린 것도 기억하셨다가 다 갚아주십니다(마10:42). 지난 학기에 우리가 진심을 바쳐 많은 사람을 전도했지만 한 사람도 남지 못했을 때 낙심될 때도 있었습니다. 또 어렵게 여름 수양회에 초청하였지만 실제로 남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절망이 됩니다. 이렇게 평생을 바쳐 헌신해도 열매가 없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목자생활이 인생을 허비하는 것 같은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축복하신 예수님을 볼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 드린 진심은 주님께서 다 받으시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계산 잘 하는 머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진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저희 모임 가운데 진심을 드리는 많은 종들을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2. 겸손과 평화의 왕 예수님(12-19) :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올라온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호산나란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메시야가 되셔서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복지 국가를 만들어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나간 것은 승리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생각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이 말씀은 스가랴 9: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을 통해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스가랴 예언의 말씀을 이루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당시 로마군은 지중해 해변인 가이사랴에 주둔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유월절 명절에는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주둔하며 치안을 유지했습니다. 유대 총독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쌍두마차를 타고 로마 군대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이를 통해 총독의 위엄을 높이고자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총독에 비할 바 없이 지극히 높은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아주 위풍당당하게 퍼레이드를 벌이며 입성하실 수도 있습니다. 환호하는 군중들과 들뜬 제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고자 백마 한 마리 정도는 구해와서 타고 입성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방향을 잡고 말씀에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자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시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을 배워서 늘 말씀을 기준으로 결정하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당시 왕들은 불의하고 교만하며 강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이런 왕의 권세 아래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고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왕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을 섬기시고자 모든 특권을 포기하시고 나귀를 타고 겸손히 입성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나아갈 때 늘 쉼과 위로를 얻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교만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죄인의 심정이 되어 겸손하다가도 조금 지나면 마음이 높아집니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낮은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혈기가 납니다. 또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는데 속으로는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하며 우쭐거립니다. 우리가 이 시간 나귀타고 오신 겸손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교만과 높아진 마음을 깊이 회개해야겠습니다. 겸손은 우리 목자들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말이 전쟁을 상징한다면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솔로몬도 왕이 되었을 때 나귀를 타고 등극하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평화롭게 다스렸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사람들이 평화를 추구하지만 이 세상의 평화는 다 일시적입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얻어야 사람들과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의미를  처음에는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그들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비로소 예수님께 대하여 기록된 것을 깨닫고 나귀 타고 오신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나사로를 살리신 일들이,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이 죽은 자를 살리신 표적 행하심을 듣고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19).” 그들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좇는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해공작이 쓸데없다고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으로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마리아가 부어드린 지극히 비싼 향유가 발밑으로 흘러 땅 속으로 사라졌지만 예수님은 그 진심을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헌신을 대대로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드리는 눈물과 땀방울을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말씀에 순종하시며 겸손과 평화의 왕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왕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우리가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을 잘 배워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는 리더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겸손의 왕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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