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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19(11:28-57)/ 네가 믿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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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378회 작성일 06-09-0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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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19 강                                                               
말씀 요한복음 11:28-57
요절 요한복음 11:40

네가 믿으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표적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심을 나사로를 살림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하실 때 마르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 시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의 능력, 생명의 능력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28-44) :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듣고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 받고 힘을 얻어 마리아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셔.”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마리아는 장례를 치루느라 지치고 낙심하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존경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내어 마을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때까지 예수님은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를 맞던 곳에 그저 계셨습니다. 우울한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는 마리아를 돕기 위해서 마을로 들어가지 아니하셨습니다. 영혼의 감기라고 하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햇빛이 있는 밖으로 끌어내어 활동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녀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나섰습니다.

  마리아는 마을 밖으로 나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 발 앞에 엎드리며 원망을 쏟아놓았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우리 오빠,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도 마르다와 같이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을 때는 나의 믿음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불평과 원망을 멈추고 나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원망하는 사망의 독소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에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마리아가 슬피 울고 또 함께 온 유대인들도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하며 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는 사람을 참으로 비참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사랑을 줄 수 없어서 슬퍼합니다. 꽃다운 청춘이 죽음이라는 비바람을 맞아 쓰러져 추하게 썩어가는 모습에서 인생무상을 느낍니다.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죽어가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죽음으로 인해 느끼는 고통과 슬픔과 허무함을 아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웃음보다는 눈물이 많은 삶을 사셨습니다. 죄와 질병과 죽음과 가난으로 고통하는 인생들을 보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죄와 죽음으로 인한 인생들의 고통을 몸소 겪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속을 긁어놓았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자신을 멸시하는 그들의 악한 마음을 보실 때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그들의 불신하는 말은 속살을 칼로 베어버리듯이 아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분노를 참으시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손발이 묶인 나사로가 나오려면 무덤 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순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살아 있어서 병든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신다면 믿겠는데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가는 시체를 살려낸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앞에서 분명히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라고 고백을 했지만 실제적인 상황이 닥치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손발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또 무덤 입구를 막은 무거운 돌을 옮기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르다의 이성은 썩은 시체가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만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더라도 돌을 옮겨놓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인 믿음, 부활 신앙을 원하셨습니다. 역대하 20:20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어찌할 수 없을 때에 형통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믿음, 어떤 순종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내 인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한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악된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의 투쟁, 믿음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문제를 밝고 긍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관계성을 부드럽게 만들어 줍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하겠다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15:7). 예수님은 곤혹스러워하는 마르다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4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우리가 예수님과 그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오빠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의지가 요구됩니다. 믿음은 지정의 즉 인격이 다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돌을 옮기는 것으로 나타나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요단 강 물이 언덕에 넘치는 시기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수3:13).”고 말씀하셨습니다. 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쳤습니다. 물이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너갔습니다(수3:16,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음으로 밟고 건너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4:17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민족은커녕 한 명의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백세나 되었습니다. 그의 몸은 죽은 것과 같았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았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이 ‘죽은 자와 방불했다’고 했습니다(히 11:12).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자식을 낳을 뿐만 아니라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롬 4:19,20).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나 사라의 신체가 생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와 방불했던 그가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히 11:12). 우리가 예수님이 나의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을 때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나도 죽고 그가 부활하셨을 때에 나도 부활했음을 믿습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는 신앙의 첫 번째 요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신도 아니고 맹신도 아닙니다. 광신도 아닙니다. 현실을 도외시한 채 열광적으로 믿는 것이 바로 광신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현실의 문제를 못 본체 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하나님의 약속에 비추어서 곰곰이 생각하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인격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신실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았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41,42절을 봅시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신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또 둘러선 무리들에게 믿음을 심게 된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확신 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함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자 하셨다면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닫힌 마음 문을 여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대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44). 예수님께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죽고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났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을 때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죽은 나사로가 그 음성을 들었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그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그 무덤으로부터 불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로부터, 원망과 불평으로부터, 무기력과 절망으로부터, 허무와 죄의 무덤으로부터, 의존심과 패배감의 무덤으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난 우리도 이제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앎이니라(고전15:55,57,58).”

  2.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살인 모의(45-57):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본 유대인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본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표적을 본 사람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자 위협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48절을 봅시다.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추종자들을 얻자 유월절에 흔히 일어나는 거짓 메시야 사건의 하나로 보고 이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로마 군대가 예수님의 메시아 운동을 진압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 메시야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잘못하면 성전(우리 땅)과 땅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를 모아서 의장인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메시아 운동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당시 유대 땅을 점령한 로마군이 예수님의 메시아 운동을 무력으로 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메시야인줄 알고 따라다니는 많은 유대인들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시대부터 총독의 총체적 감독 아래 유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는 유대 정부의 이원체제가 폐지당하고 로마 총독에 의한 직접 통치가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러면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가야바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선언합니다. 50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그는 유대 민족이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 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한 사람을 죽여서 민족을 구해야 한다고 대제사장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제사장의 의도에 대한 요한의 해석은 무엇입니까? 51,52절을 봅시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유대교 성전 체제에서 속죄 제사는 제사장들이 드립니다. 특히 일 년에 한번 있는 대 구속의 날에는 유대 민족 전체의 죄를 씻기 위해서 대제사장이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가야바가 바로 온 민족을 구출하기 위한 제물로 예수님을 바치겠다고 선언한 셈입니다. 가야바는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순전히 정치 논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그 해 대제사장 가야바가 민족을 살리기 위한 구원의 제사로 예수님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적대해서 죽음에 몰아넣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야바의 반역을 이용해서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즉 시내산 법에 맞게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여기에 깊은 역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2:8절에서 비슷한 생각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최고 지혜를 역이용하기도 하십니다. 가야바나 빌라도 등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지혜를 발위하여 예수님이 표방한 하나님의 뜻에 대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만인을 위한 속죄 제사로 삼으심으로써 만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 계획을 달성하신 것입니다. 가야바나 빌라도 등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를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지혜를 역이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인간들에게 달린 것처럼 보이나 실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 세상이 유한한 지혜를 가지고 죄악에 가득 찬 인간들의 손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탱하시되, 때로는 인간의 불의와 거짓을 이용하셔서 자신의 진리와 의를 세우고 계십니다. 거짓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새로운 소망을 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악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분이십니다. 이것도 복음이 주는 위로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유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해진 시간표대로 일하기 위해서, 며칠 후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반역으로 인해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이를 역이용하여 인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세상 죄를 속죄하기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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