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18(11:1-27)/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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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18 강
말씀 요한복음 11:1-27
요절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기적으로서 나사로를 살리신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죽음은 삶과 함께 현실 중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직면하는 죽음의 요소들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습니다. 이 시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 풍성한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다(1-4) :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잇달아 여의었습니다. 그들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평소 유약하던 오빠 나사로가 폭염 속에서 더위를 먹었는지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고열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가정의 기둥 역할을 하던 오빠 나사로가 젊은 나이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만 하는 두 자매는 슬픔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들은 재산도 많이 있는 유력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질병과 죽음이 덮치고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동네에서 발이 가장 빠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요단 강 저편에 계신 예수님께 소식을 전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차한 설명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도 깨끗케 하신 예수님, 사랑과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 오빠가 죽기 전에만 오신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전령으로 갔던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은 NIV 성경으로는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이 병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기회로 보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거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부딪히면 당황합니다. 끝장이라며 심각하고 비참하게 생각합니다. 시험을 한 번 망치고 나면 내 대학 생활은 끝장이고 내 장래는 암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을 치다 몇 번 실패하고 나면, 올해도 열매 맺기는 글렀으며 목자로서의 내 삶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문제만 생겨도 내 인생은 문제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끝나리라는 운명적인 생각에 시달리고, 좀 큰 문제가 생기면 이젠 죽었다, 이젠 끝장이다, 하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 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큰 문제에 부딪혀도 그것을 결코 끝이라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그 어떤 문제도 끝장이 아닌 ‘기회(chance)’로 보셨습니다. 하나님과 자기의 영광을 나타낼 ‘기회’로 보셨고, 그 영광을 보고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할 수 있는 ‘기회’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당하는 질병과 인생 문제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긍정적으로 보셨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입니다. 환난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의 오심을 체험하는 길이 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통해서 우리들이 믿음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하반신 불수 환자인 조니 어렉슨 타다는 “이 못 쓰는 다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면 나 자신이 휠체어에 갇혀 지내야 하는 것쯤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입다는 자신이 기생의 아들이라는 운명적인 조건으로 인해서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업도 이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에 힘쓰며 버림받은 자들의 목자노릇을 했습니다. 그가 큰 용사로 준비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요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운명적인 조건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꾼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 이틀을 더 유하시는 예수님(5-16) :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십시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은 나사로 가정을 사랑하셔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면 들러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맛있고 풍성한 식사로 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사로의 병 문제를 근본적으로 돕기를 원하셨습니다. 앞뒤 정황을 볼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전에 먼저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시기 않고 지체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 때야말로 적당한 때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에게 소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었지만 오빠 나사로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가족이나 자기 자신보다도 예수님 한 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소망이 됨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과 그 나라에 있습니다. 또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을 그들에게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까지도 정복하는 부활신앙이요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죽음의 상황,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내가 완전히 죽고 예수님만을 의지할 때 생깁니다.
예수님은 응답의 때를 지체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체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사 55:8,9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좀 더 좋은 것’을 주기보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이로 인해 자신은 원망과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이를 각오하면서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을 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 우리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한 목자님은 어머니가 믿음이 좋은 분이셨는데 암에 걸리셨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병이 낫기를 소원해서 금식 기도를 하고 또 확신도 있었는데 돌아가셨습니다. 이때 그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님이 빚을 갚지 못해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자님은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몇 년 더 사시는 것보다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실 것을 믿음으로 위로를 삼았습니다. 아버지는 고난을 통해서 성경을 읽고 믿음을 갖고자 애쓰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종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욥의 경우를 보아도 그에게 닥친 환란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재산이 다 날아가고 열 명의 자녀들이 죽고 자신도 아토피 피부병에 걸려서 기왓장으로 몸을 득득 긁어야 하는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환난을 통해서 그의 순전함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문제들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틀이 지나자 예수님께서는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놀란 눈을 하고 말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은 얼마 전에도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또 유대로 간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꿈 속에서도 짱돌이 날아다니는 장면을 보고 식은 땀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낮이 열두 시간이기 때문에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이 많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게 된 것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놓칠 수 없는 하나님의 기회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위험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믿음이 생기고 자라는 것을 볼 때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도마는 의심도 많고 두려움도 많은데 사람이 한번은 다 죽는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도마는 참 훌륭한 제자입니다. 그는 위험을 알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비장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쁨으로 따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 할수록 두려움과 비장감만 더했습니다. 죽음은 그들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과 보람마저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이런 제자들마저 벌벌 떨게 만들고, 소극적이고 비겁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죽음에 짓눌려서 못 쓰게 된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우십니까?
3.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27) :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죽음의 그늘이 어둡게 그의 집안과 주변에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습니다. 젊은 청년이 죽은 것으로 인해서 슬플 뿐만 아니라 남겨진 마르다와 마리아가 불쌍했습니다. 오늘날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경제력을 갖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시집도 가지 못한 두 여인이 사회에 덩그렇게 남아 있는 모습에 안쓰러워했습니다. 또 자신들도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들은 슬펐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는 곧 나가서 맞되 마리아는 집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마르다는 장례까지 다 끝났는데 오시는 예수님이 야속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 정작 필요할 때는 함께 계시지 않고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오시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식사해야 할 때는 맞이할 준비도 안 됐는데 일찍 오시더니 왜 이번에는 그렇게 지체하셨는가? 예수님 그럴 수 있어요.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마르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는데 일조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미안했는지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마르다는 끈질긴 여인이었습니다. 자기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했을 때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다는 현명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 말씀을 마지막 날 부활에 이루어질 일로 받아들였습니다(24).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런 것쯤이야 나도 안다는 투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현재의 고통에 대한 불만으로 인하여 과거에 이랬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하든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생활에서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가 없습니다. 우리는 문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당장 나에게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그리스도이십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의 권능자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인류 역사상 누구도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앞에서 절망하고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참된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는 과거 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사망 권세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허무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운명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사망권세는 인생들로부터 생명을 앗아가고, 꿈을 앗아가고, 기쁨을 앗아가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때는 더 이상 사망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생명의 세계는 빛의 세계요, 기쁨의 세계요, 희망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자는 더 이상 허무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더 이상 운명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한 맺힌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죄가 왕노릇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자는 운명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삶에 추진력이 생겨 창의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육신이 죄로 인하여 죽을지라도 다시 살 것입니다. 우리의 썩을 육신은 영광의 몸으로 소생할 것입니다. 또 '살아서 믿는'자는 '결코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우리에게 불멸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영적인 생명은 죽은 즉시 불멸의 영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가 내 말을 받아들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이론적인 믿음에서 실제적인 믿음으로 자라갔습니다.
이디모데 선교사님은 이제 다시 나이지리아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도마와 같은 심정이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진군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환란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주기 위해서 우리의 삶 속에 고난과 질병과 환난을 쓰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산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함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나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믿음으로 가을 학기에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홍대 제자 양성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1:1-27
요절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기적으로서 나사로를 살리신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죽음은 삶과 함께 현실 중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직면하는 죽음의 요소들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습니다. 이 시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 풍성한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다(1-4) :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잇달아 여의었습니다. 그들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평소 유약하던 오빠 나사로가 폭염 속에서 더위를 먹었는지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고열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가정의 기둥 역할을 하던 오빠 나사로가 젊은 나이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만 하는 두 자매는 슬픔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들은 재산도 많이 있는 유력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질병과 죽음이 덮치고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동네에서 발이 가장 빠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요단 강 저편에 계신 예수님께 소식을 전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차한 설명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도 깨끗케 하신 예수님, 사랑과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이 오빠가 죽기 전에만 오신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전령으로 갔던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은 NIV 성경으로는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이 병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기회로 보셨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거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부딪히면 당황합니다. 끝장이라며 심각하고 비참하게 생각합니다. 시험을 한 번 망치고 나면 내 대학 생활은 끝장이고 내 장래는 암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을 치다 몇 번 실패하고 나면, 올해도 열매 맺기는 글렀으며 목자로서의 내 삶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문제만 생겨도 내 인생은 문제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끝나리라는 운명적인 생각에 시달리고, 좀 큰 문제가 생기면 이젠 죽었다, 이젠 끝장이다, 하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 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큰 문제에 부딪혀도 그것을 결코 끝이라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그 어떤 문제도 끝장이 아닌 ‘기회(chance)’로 보셨습니다. 하나님과 자기의 영광을 나타낼 ‘기회’로 보셨고, 그 영광을 보고 사람들이 자신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할 수 있는 ‘기회’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당하는 질병과 인생 문제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긍정적으로 보셨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입니다. 환난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의 오심을 체험하는 길이 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통해서 우리들이 믿음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하반신 불수 환자인 조니 어렉슨 타다는 “이 못 쓰는 다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면 나 자신이 휠체어에 갇혀 지내야 하는 것쯤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입다는 자신이 기생의 아들이라는 운명적인 조건으로 인해서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업도 이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에 힘쓰며 버림받은 자들의 목자노릇을 했습니다. 그가 큰 용사로 준비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요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운명적인 조건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꾼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 이틀을 더 유하시는 예수님(5-16) :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십시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은 나사로 가정을 사랑하셔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면 들러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맛있고 풍성한 식사로 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사로의 병 문제를 근본적으로 돕기를 원하셨습니다. 앞뒤 정황을 볼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전에 먼저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시기 않고 지체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 때야말로 적당한 때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에게 소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었지만 오빠 나사로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가족이나 자기 자신보다도 예수님 한 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소망이 됨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과 그 나라에 있습니다. 또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을 그들에게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까지도 정복하는 부활신앙이요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죽음의 상황,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내가 완전히 죽고 예수님만을 의지할 때 생깁니다.
예수님은 응답의 때를 지체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체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사 55:8,9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좀 더 좋은 것’을 주기보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이로 인해 자신은 원망과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이를 각오하면서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을 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 우리의 의도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한 목자님은 어머니가 믿음이 좋은 분이셨는데 암에 걸리셨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병이 낫기를 소원해서 금식 기도를 하고 또 확신도 있었는데 돌아가셨습니다. 이때 그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님이 빚을 갚지 못해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자님은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몇 년 더 사시는 것보다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실 것을 믿음으로 위로를 삼았습니다. 아버지는 고난을 통해서 성경을 읽고 믿음을 갖고자 애쓰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종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욥의 경우를 보아도 그에게 닥친 환란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재산이 다 날아가고 열 명의 자녀들이 죽고 자신도 아토피 피부병에 걸려서 기왓장으로 몸을 득득 긁어야 하는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환난을 통해서 그의 순전함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목자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문제들을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틀이 지나자 예수님께서는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놀란 눈을 하고 말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은 얼마 전에도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또 유대로 간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꿈 속에서도 짱돌이 날아다니는 장면을 보고 식은 땀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낮이 열두 시간이기 때문에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이 많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게 된 것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놓칠 수 없는 하나님의 기회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위험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믿음이 생기고 자라는 것을 볼 때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도마는 의심도 많고 두려움도 많은데 사람이 한번은 다 죽는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도마는 참 훌륭한 제자입니다. 그는 위험을 알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었습니다. 죽으러 가는 비장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쁨으로 따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 할수록 두려움과 비장감만 더했습니다. 죽음은 그들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과 보람마저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이런 제자들마저 벌벌 떨게 만들고, 소극적이고 비겁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죽음에 짓눌려서 못 쓰게 된 제자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우십니까?
3.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27) :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죽음의 그늘이 어둡게 그의 집안과 주변에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습니다. 젊은 청년이 죽은 것으로 인해서 슬플 뿐만 아니라 남겨진 마르다와 마리아가 불쌍했습니다. 오늘날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경제력을 갖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시집도 가지 못한 두 여인이 사회에 덩그렇게 남아 있는 모습에 안쓰러워했습니다. 또 자신들도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들은 슬펐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는 곧 나가서 맞되 마리아는 집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마르다는 장례까지 다 끝났는데 오시는 예수님이 야속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 정작 필요할 때는 함께 계시지 않고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오시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식사해야 할 때는 맞이할 준비도 안 됐는데 일찍 오시더니 왜 이번에는 그렇게 지체하셨는가? 예수님 그럴 수 있어요.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세요. 마르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는데 일조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미안했는지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 마르다는 끈질긴 여인이었습니다. 자기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했을 때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다는 현명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 말씀을 마지막 날 부활에 이루어질 일로 받아들였습니다(24).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런 것쯤이야 나도 안다는 투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현재의 고통에 대한 불만으로 인하여 과거에 이랬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하든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생활에서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가 없습니다. 우리는 문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당장 나에게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그리스도이십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의 권능자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인류 역사상 누구도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앞에서 절망하고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참된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우리는 과거 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사망 권세는 우리를 두렵게 하고 허무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운명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사망권세는 인생들로부터 생명을 앗아가고, 꿈을 앗아가고, 기쁨을 앗아가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 때는 더 이상 사망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생명의 세계는 빛의 세계요, 기쁨의 세계요, 희망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자는 더 이상 허무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더 이상 운명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한 맺힌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죄가 왕노릇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세계에서 사는 자는 운명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삶에 추진력이 생겨 창의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육신이 죄로 인하여 죽을지라도 다시 살 것입니다. 우리의 썩을 육신은 영광의 몸으로 소생할 것입니다. 또 '살아서 믿는'자는 '결코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우리에게 불멸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영적인 생명은 죽은 즉시 불멸의 영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가 내 말을 받아들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이론적인 믿음에서 실제적인 믿음으로 자라갔습니다.
이디모데 선교사님은 이제 다시 나이지리아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도마와 같은 심정이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진군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환란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주기 위해서 우리의 삶 속에 고난과 질병과 환난을 쓰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산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함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나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믿음으로 가을 학기에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홍대 제자 양성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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