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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17(10:19-42)/내가 영생을 주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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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006회 작성일 06-08-2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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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17 강                                                               
말씀 요한복음 10:19-42
요절 요한복음 10:28

내가 영생을 주노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시고 사랑하사 죄악된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양으로서 그의 음성을 깊이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때 영생을 얻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누리며 그와 함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주옥과 같은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역사가 강력할수록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왔습니다. 한쪽 편은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가 일으키는 표적들을 보고 귀신의 역사라고 폄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사역들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과 미움이 발동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고 말씀을 권세있게 증거할수록 자기들의 권위와 기득권이 침해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매장시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행사를 하는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21)?” 귀신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귀신은 멀쩡한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셨고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띠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사실에 기초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문제를 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믿음을 덧입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수전절은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제단을 세워 성전을 더럽혔는데, 주전164년 12월 25일에 유다 마카비오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성전을 청소하고 제단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때는 동지가 가까웠으므로 예수님은 자연히 구릉에서 부는 찬바람을 피하여 솔로몬의 행각에 계셨던 듯합니다. 24절을 봅시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도 없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을 에워싸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신 사실을 직설적으로 말씀하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시든지 “인자”라는 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밝히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야 관념이 그릇되어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를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난의 종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밝히 말해도 그들이 믿지 않는 불신의 죄가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의 죄를 깊이 회개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먼저 나의 죄를 깊이 회개하는 투쟁을 할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고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25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고 또 그의 행하는 일들도 그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지만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말씀도 믿지 아니하면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말씀하시고 또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쌀이 가득한 창고 안에서 굶어 죽는 자들과 같고, 샘 앞에서 목이 말라 죽는 자들과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영생의 복을 받도록 택함이 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27절을 봅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의 양은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듣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어떤 축복을 받게 됩니까? 먼저 예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면 존재의미를 느낍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은 사람,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을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사람을 알아주십니다.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28절을 봅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름답고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밖에서 생명의 풍성함을 찾고자 합니다. 경제적인 부요함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백화점을 순례하고 수다도 떨고 여행도 해 봅니다. 심지어 사랑도 해 봅니다. 그러나 겉껍질만 남은 삶의 허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인생에 폭풍우가 밀어닥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생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속에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영생은 중생과 동일시 될 수 있습니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영생은 거듭난 결과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인 지성소로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영생이란 하나님을 알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체험적인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고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선한 일에 힘씁니다(엡2:10).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이 누리는 영생이 얼마나 풍성한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최고의 상급이 바로 영생입니다.

  모세는 초강대국 이집트의 왕자로서 대권 수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집트 왕자로 살기를 거절하고 믿음으로 당시 노예백성이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모세는 왕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과 명예, 부귀영광을 버리고 장차 받을 예수 그리스도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영생을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를 축복하사 하나님을 대면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2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고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는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서 과거 그가 가졌던 자기 의와 명예, 최고의 경지에 이른 학문과 가문의 영광 등은 예수님에 비하면 배설물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했던지 자존심과 명예를 생명같이 여기던 바울이 영생을 나누어주기 위해 만물의 찌끼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고전4:13). 결국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복음으로 정복하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목자님들과 형제자매님들은 모두 예수님이 주시는 값진 영생을 소유하신 분들입니다. 또 아직 영생을 소유하지 못하신 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그 말씀대로 따라 살 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영생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없는 고귀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귀한 영생을 주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루셨습니까?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시22:14-17).”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3-5).” 그는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영생을 맛본 우리는 어려움이 오고 고난이 올 때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말씀을 붙들고 영적인 투쟁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들을 능히 이기고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더 풍성히 얻고 누립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영혼의 평강과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게 됩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영원히 멸망치 아니합니다. 누가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가난이나 위험이나 세상의 쾌락이나 부요나 세상의 영광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도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28). 왜 그렇습니까? 29,30절을 봅시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보다 강한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도 마귀도 죽음도 이겼습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들은 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신 것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했습니다.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인해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로 말미암아 하신 선한 일들을 한 가지만이 아니고 여러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밝히 볼 수 있도록 공중 앞에서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밝히 보여주었지만 그들은 강퍅한 마음으로 인하여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82:6절을 예로 들어서 자신의 주장이 참람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4-36). 만일 예수님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그를 믿지 말려니와 그가 행하거든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과 행하시는 일을 보고 믿을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합리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리로 가셨을까요? 예수님은 그곳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날수록 바리새인들의 핍박은 거세어졌습니다.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으면서 지치고 힘들 때 예수님은 부르심을 새롭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보여도 믿지 않는 그들로 인해서 낙담하고 힘들어 질 때 부르심을 새롭게 하시고 외길을 가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저편에 계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41,42절을 봅시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그들은 영적인 소원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뿌려 놓은 말씀의 씨가 자라서 이제 열매를 맺게 된 사람들입니다. 요한이 뿌린 말씀의 씨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행하시는 일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영생이야 말로 우리 인생들이 추구하는 가치 중에 최고의 가치요 하늘의 보화입니다.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들은 이를 실제 삶 속에서 누리며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힘써야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잘 듣고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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