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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16(10:1-18)/ 나는 선한 목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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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22회 작성일 06-08-1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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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16 강                                                             
말씀 요한복음 10:1-18
요절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생명의 꼴을 먹으며 생수의 강물을 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그동안 길을 잃고 헤매는 양과 같았습니다. 또 목자의 직분을 가진 분들은 양을 치느라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푸른 초장 위에서 양을 치는 사진을 보면 매우 편하고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목자의 일은 매우 고되고 때로는 더럽고 희생을 요구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목자 생활이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고 생각하여 포기하고자 시도한 적이 한 두 번은 다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의 양인 것을 새로이 인식하고, 선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 예수님을 통해서 목자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1.목자와 양의 비유(1-6):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이 한 가지 아는 것을 굳게 붙잡고 예수님을 증거하자 바리새인들은 그를 출교시켰습니다. 그들은 목자로 세움을 입었지만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목자의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습니다.
  1,2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양에게 접근하는 동기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절도와 강도, 목자로 구별이 됩니다. 절도와 강도는 양을 훔치고 그의 생명을 취하고자 하기 때문에 떳떳하게 접근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출입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거나 개구멍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듣기 좋은 말이나 위협과 공갈로 접근하는데 그 목적은 양을 갈취하고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문을 통해서 양에게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접근하면 인간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목자는 목자장과 양들에게 인정을 받고 세움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문으로 들어갑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3).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부분 목양을 하기 때문에 한 우리에 여러 목자의 양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밤을 지내고 새벽이 밝아오면 문지기가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고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순돌이, 이쁜이, 발발이, 점박이, 날쌘돌이, 흰코백이, 귀길쭉이 등등. 목자는 양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져 있습니다. 목자는 양의 모습과 특성에 따라서 각각 이름을 붙여줍니다. 이렇게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옵니다. 돼지나 소는 뒤에서 회초리로 때리면서 몰아가지만 양은 목자가 앞서가야 따라옵니다. 목자는 양을 믿고 양은 목자를 신뢰하기 때문에 앞서 갑니다. 양은 목자가 가는대로 따라갑니다.
  우리 모임은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양이 웃는 소리나 몸짓, 걷는 모습, 메시지 전하는 폼, 행동 양식을 보면 그의 목자가 누구인지 대충 알 수 있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양은 목자와 함께 살기 때문에 목자의 삶을 그대로 본받고 따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양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양은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갑니다.

  우리는 예전에 목자를 잃은 양과 같았습니다. 이사야 53: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양은 무지합니다. 양은 또 눈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것에 매달립니다. 먹어야 하는 풀과 먹지 못할 풀, 마셔야 할 물과 더러운 물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목자가 인도해 주지 않으면 구정물을 먹고 병이 들거나 독초를 먹고 죽는 일도 많습니다. 양은 아주 연약합니다. 다리도 짧습니다. 목소리도 작습니다. 뿔도 꼬부라져 있어서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어떤 방어기재도 없습니다. 하다 못해 스컹크처럼 고약한 냄새를 뿜거나, 도마뱀처럼 자기 꼬리를 자르고 도망갈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잘 발달된 것은 귀라고 합니다. 양들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목자라는 사실을 알기에 목숨을 걸고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한 양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기를 쓰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앞서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 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양은 목자를 따르지 아니하고 각각 제 길로 가기를 고집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한탄할 정도로 사람은 사단에 대해서 무지하고 죄에 대해서 약합니다.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집스럽게 헤맵니다. 아흔 아홉 번 길을 가르쳐주고도 백 번째에 또 길을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양과도 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상은 소음과 유혹하는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립니다. 세상의 소리들이 너무 크고 시끄러워서 예수님의 음성은 잘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현실의 여러 가지 소리나, 자신의 문제 때문에 끙끙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세상과 자신의 소리에는 귀를 막고,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벽 시간은 정말 조용합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기가 용이합니다. 우리가 침묵하는 가운데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에 힘써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따르며 풍성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2. 양의 문 되신 예수님(7-10) :  예수님께서 이 비유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 안에 예수님께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편견이나 무시하는 마음, 자기 생각을 강하게 먹고 있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셨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비유를 풀어서 말씀하셨습니다(7a). 7b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양들이 들어가야 할 문, 양의 문,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문 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의 각종 문들은 서로서로 자기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어떤 문에서는 그리로 들어오면 일확천금을 벌게 해 준다고 유혹합니다. 어떤 문으로 들어가면 환상적인 즐거움을 줄 것처럼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인터넷을 켜보면 “이곳을 빨리 클릭해 보세요. 이 방으로 들어오세요.” 유혹하는 윈도우 창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호기심으로 한번 잘못 들어갔다가 그 수렁에 빠져서 평생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패가망신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8절에 보면 그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이들이 오는 목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된 문들은 잠깐의 유익과 쾌락의 미끼를 던져 그 영혼을 파멸의 불 속으로 던져 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재미있다고, 생각없이 따라 들어가서는 끝장입니다. 그곳은 멸망의 문이요, 죽음의 문이요, 지옥의 문인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문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문은 겉보기에는 초라합니다. 그 안에 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구원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풍성한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구원이란 완전한 복지와 행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와 사망 권세에서 해방되어 진리와 자유, 공평과 평화,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인 행복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갈망이 하나님에 의해 우리 안에 심겨진 것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생물학적인 만족을 넘어서는 무한한 욕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런 욕망들에 만족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에는 우리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합니다.
  지난 주에 이여호수목자님을 만났는데 여름수양회에 참석했던 대전의 양들이 주일 예배에도 참석하여 말씀을 잘 받고 기쁨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세상에서 돼지 쥐엄 열매를 먹고자 했으나 그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쫄쫄 굶다가 이곳에 와서 풍성한 꼴을 배부르게 먹고 기쁨이 충만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생 팀들은 요한복음 꼴뿐만 아니라 특식으로 디모데전후서 꼴을 먹고 로마서 꼴을 먹고 살이 포동포동 찐 양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양인지 목자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양은 식욕이 땡겨서 일주일에 세네 번 꼴을 달라고 목자를 좇아다닙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으로써 행복을 누리는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행복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평화롭고, 가장 값지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자유로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평화가 없고 자유가 없는 것은 예수님을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친근히 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나에게 주신 한 가지 목적을 성취하는 삶을 산다면 가장 복된 삶입니다.
 
  3. 선한 목자 예수님(11-18) : 11,12절을 봅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선한 목자는 삯꾼과 대조됩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은 평소에는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위기가 닥치면 선명하게 구분이 됩니다. 삯꾼은 목자와 하는 일이 같습니다. 그러나 일하는 동기가 다릅니다. 목적이 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삯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희생해서 양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양을 희생해서 자기 유익을 챙기고자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하다가 자기에게 손해가 날 것 같으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러면 이리가 양을 마음껏 늑탈하고 또 양들을 흩어지게 만듭니다. 목자없이 흩어진 양은 다른 이리들의 밥이 됩니다. 이에 비해서 선한 목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선한 목자는 양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양을 칠 뿐 아니라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립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리와 생명을 건 사투를 벌입니다. 다윗은 목동 시절에 사자나 곰이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고 그것이 일어나 다윗을 해하고자 하면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치고자 하는 골리앗도 그러한 심정으로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목동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여기서 선하다는 것은 동기가 선하다는 것이요 그 인도하는 길이 선함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요즈음과 같은 폭염 속에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녀가 다섯 남자와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한 더러운 여인이라고 생각지 않으시고 한 인간으로서 존귀하게 여기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각종 죄문제로 고통하는 양들의 내면 문제와 씨름을 하시며 말씀과 동정심을 갖고 치료하십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자신의 발 아래 쓰러졌을 때 “규정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런 잘못을 범하느냐? 우리는 네가 ‘부정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경찰을 부르기 전에 당장 여기를 떠나라! 너는 율법을 어기고 내 친구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도채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라고 고함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눈에 어려있는 고통스러운 외로움, 그 영혼에 스며 있는 소외감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모세의 법을 위반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는 동정심이 계명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 자란 한 목자님의 그랜드 캐년보다 큰 구멍을 메꾸어 주시는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수치와 고통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는 양들을 위해 그 모든 수치와 고통을 남김없이 감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못 박은 무지한 양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누가 23:34).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을 잘 압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자는 양을 잘 압니다. 양의 장점과 단점, 습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을 알고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으로서 깊이 사랑하는 관계임을 말합니다. 우리는 내가 나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내가 아는 내가 있고 다른 사람이 아는 내가 있습니다. 자동차에서 다른 사람은 다 볼 수 있는데 운전자만 볼 수 없는 사각지대가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잘 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가장 잘 아십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이 스위스 시계처럼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나의 머리털의 수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나의 필요까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도 잘 아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려 하시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분은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님은 내가 계획하는 것보다 좋은 길로,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누구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서 하늘 보좌 영광을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마침내는 자기 생명까지도 나를 위해 기꺼이 버리신 선한 목자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있습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가족도, 나의 장래도 다 맡길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안심하고 이 예수님 뒤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롬5:7,8절은 말씀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소망없는 양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사랑으로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아시는 주님께 나의 생명을 드립니다.

  셋째, 온 세상의 목자 예수님(16-18). 16절을 봅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가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이란 이방인들이요 다가오는 세대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목자, 만민의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승천하신 이후에 지금도 세계 각 곳에서 성령으로 더불어 역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임 속에서도 목자 노릇을 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약속대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예수님을 배우고 일할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내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의 양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양을 책임지고 섬겨야 합니다. 양이 예수님의 양이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돌아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아버지를 사랑하사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누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버리셨습니다. 그에게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그가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는 사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생명을 다해서 지키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 메시야를 목자로 삼고 살다가 죄에 빠지고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시고 구원을 주시되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므로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선한 목자 예수님을 잘 배워서 이 시대 방황하는 양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목자들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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