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복음 06jn15(9:1-41)/ 가서 씻으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74회 작성일 06-08-06 09:28

본문

2006년 요한복음 제 15 강                                                                 
말씀 요한복음 9:1 - 41
요절 요한복음 9:7

                            가서 씻으라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우리 인생은 모자이크와 같습니다. 밝은 색, 어두운 색, 붉은 색, 청색 등 조각들을 하나 하나 볼 때는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 조각들이 조합이 되어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앞에 두고 누구 죄인가 묻는 제자들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가 눈을 뜨는 과정에서 우리는 일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 예수님(1-3) :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속담에 “몸이 열 냥이면 눈은 아홉 냥이다.”고 했습니다. 그 만큼 눈이 중요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은 잠을 잘 때 결코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도 꿈을 꿀 수 없었습니다. 여름 수양회에서 상영된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아름다운 영상도, 감동적인 연극도 볼 수 없었습니다. 삶에서 보는 즐거움이 매우 큽니다. 또 무엇을 배울 때 시각적인 것을 사용하면 매우 효과적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누리는 즐거움과 배움의 기회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지가 되어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소경된 사람을 먼저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목하시자 그를 불쌍히 여긴 제자들이 힘든 표정을 지으며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이 질문은 오늘날 불행한 사건들을 만나게 되면 우리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터져 나옵니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 잘 자라던 양이나 충성하던 목자들이 떠날 때,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릴 때, 잘 진행되던 일이 꼬여서 풀리지 않을 때, 예기치 않은 사고가 생길 때 우리는 이것들이 뉘 죄로 인함인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누구 죄로 인해 불행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정죄하고 원망하다가 몹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무기력하여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그러면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이 사람의 불행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인간의 모든 불행과 실패가 다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역경의 사건들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것이 형들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한 요셉의 죄 때문입니까? 만약 요셉이 자신의 인생을 그런 각도에서 봤다면 자신의 죄를 곱씹으며 한탄하고 이복형들을 저주하며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5,8).” “하나님이 …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고 나를 보내셨나이다(창50:20).”

  우리는 인생을 바라볼 때 요셉과 같이 또는 예수님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절망스럽고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지내놓고 보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인생 드라마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무 일찍 내 인생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내 인생은 실패했다. 성공했다.”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강영우 박사는 맹인이지만 교육학 박사가 되어 미국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분입니다. 그는 ‘교육을 통한 성공의 비결’이라는 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의 실명은 부정적으로 보면 재앙일 수 있으나 긍정적으로 보면 축복이다. 그것을 재앙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만을 일삼았을 때는 진짜 재앙이었다. 열등의식 속에 위축되어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실명에 대한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그것을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라 생각한 뒤에는 그것이 도리어 축복이 되었다.”
  그가 그의 불행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헬렌 켈러의 이야기였습니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삼중 장애인인데도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실명만 했으니 넉넉히 대학에도 가고 유학도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자 서서히 실명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렇다, 내가 만일 대학에 가서 장차 전문직에 종사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개척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실명한 데에는 맹인도 전문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 있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헬렌 켈러에게 어떤 사람이, 만일 하나님께서 시각과 청각 중 하나만 되돌려 주신다면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헬렌 켈러가 주저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청각을 택하겠다고 대답했다는 얘기는 그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소중한 청각을 가지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시각 잃은 것만 불평하고 원망해온 것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또 “닫힌 문을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면 등 뒤에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고 한 헬렌 켈러의 말도 명심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맹인이 대학 공부를 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점자책으로 된 전공서적도 구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점자책을 읽는 일은 일반 사람이 일반 책을 읽는 것보다 세 배나 느리다고 합니다. 녹음도서로 청독(聽讀)을 하며 공부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도 맹인들은 공간 감각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아주 힘들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볼 수 있을 때보다도 맹인이 된 후에 더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나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한 번도 일등을 못했었는데, 맹인이 된 후에 연세대에서 과 전체 수석을 여러 번 했음은 물론이고, 미국 유학 시절에는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의 대학원생들 중에서 가장 빨리 박사 과정을 마쳤다고 합니다.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장애에 대한 태도가 문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죽어가는 나사로를 구해달라는 전갈을 받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11:4).” 스웨덴의 정치가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다그 하마슐드(1905-1961)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가올 모든 것을 긍정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힘쓸 때 감사가 충만한 삶, 밝고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난 간 옛 일에 얽매이는 과거지향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내일을 향해 비상하는 미래지향적인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진흙과 침을 이겨 일하신 예수님(4-7) :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일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제자들이 이 소경의 불행이 누구의 죄인지 분석을 하고 논쟁을 하고 원인을 규명한다 한들 소경의 인생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경의 인생에 상처만 더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쓸모없는 논쟁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시간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아직 낮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밤이 오면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밤은 세상의 빛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상실한 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또 밤은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때입니다. 죽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늙으면 일하고 싶어도 힘이 없어서 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젊을 때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쏟아 부을 만한 한 가지 일을 찾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찾았다고 해도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관점이 바뀌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그 사람의 후반부 인생이 더 빛날 지 누가 압니까? 아니 연장전에 더 극적인 승리를 거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분들을 보면 인생의 후반부에 더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밝게 비추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하시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빛을 비추실 때 우리는 믿음이 생기고 생명을 얻고 할 일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살 때, 그의 인생에는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모두가 빛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불행이나 비참한 운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운명을 선하게 바꾸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생각을 물리치고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심으로 눈을 뜨게 하셨을까요? 먼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대단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침과 흙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져온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일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초대 교회를 이끌어야 했습니다. 이때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보았습니다. 그가 구걸할 때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했습니다(행3:1-8).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을 때 그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고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 수양회를 이런 믿음으로 섬겼습니다. 말씀 강사, 소감 강사, 영상 드라마, 오케스트라, 연극, 특송 등을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믿음으로 섬겼을 때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열심히 일해야 할 때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앞날을 생각할 때 낙담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침을 튀기며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서 병든 양들을 치료하시며 고쳐 낫게 하십니다. 죄의 포로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범한 죄가 아무리 크고 중하다 할지라도 그 모든 죄악을 정하게 하시며 모든 죄악을 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흙은 땅에 속한 것으로서 인간의 욕심, 육체에 속한 것을 상징합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 가서 우리 눈에 붙어 있는 흙, 즉 욕심, 교만, 이기심, 운명주의, 열등감, 정욕 등 육에 속한 것들을 씻을 때 밝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영적인 눈이 떠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일하는 과정을 통해서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진흙을 붙여주거나 가서 씻으라는 말씀을 하실 때 그 사랑이 깊이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순종함으로써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운명적인 요소들을 성실과 열심만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흙과 침을 이겨서 일을 해도 겸손히 예수님께 나아가 순종하고 그 도우심을 받아야만 눈을 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암 못까지 더듬더듬 찾아가서 눈에 붙은 진흙을 씻어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세계를 보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가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자존심이 좀 상하고 불편할지라도 실로암 까지 가서 씻는 순종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셋째, 한 가지 아는 것(8-41) : 이웃 사람들과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은 눈을 뜬 소경을 보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하고 혹은 아니라 그의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소하였습니다. 그가 완전히 나았는지 확인을 받기 위해 당시 재판관 역할을 하던 바리새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본다고 증거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혹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느냐며 반론을 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물었지만 아들이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발뺌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두 번째 불러서 저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했습니다. 이때 그가 대답했습니다. 25절을 봅시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한 가지 은혜를 붙잡을 때 어려움의 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 은혜를 기억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정체성이 생기고 해야 할 미래가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분이십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는데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 아니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담대한 증거로 인해 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서 믿음을 견고히 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인자는 메시야이십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에 그는 “내가 믿나이다”라고 절했습니다. 예수님은 핍박과 환란 가운데 있는 그에게 직장 문제를 도와주거나 어떤 안정을 약속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개인 신앙을 도와주셨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분명해지면 사람과의 갈등은 능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핍박을 받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당할 때 더욱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습니다(벧후1:10).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만과 시기심으로 인해서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눈이 가려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힘든 현실에 눈이 가려 희망과 비전을 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고 슬픈 마음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영적인 소경된 자신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나아가 씻김을 받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밝히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모든 운명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개척하고 정복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69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