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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12(7:1-52)/ 생수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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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029회 작성일 06-07-2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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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12 강                                                               
말씀 요한복음 7:1-52
요절 요한복음 7:38
생수의 강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생수의 강’을 주십니다. 그 배에 ‘생수의 강’을 가진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늘 푸르르고 열매가 풍성합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살리고 풍성하게 합니다. ‘생수의 강’을 주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왜 ‘생수의 강’을 가져야 하고, 어떻게 해야 ‘생수의 강’을 배에 간직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하시는 예수님(1-14) :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많은 제자들이 떠나고 열 두 제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는 공기도 맑고 마차의 소음과 공해도 없었습니다. 이런 낭만적인 이유와 함께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이 두려워서 갈릴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실 유대 예루살렘에서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그는 기꺼이 유대로 가셔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하실 것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6개월 동안 갈릴리에만 있는 예수님을 보고 그 형제들이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3,4).” 라며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왕가의 몰락한 후손으로서 갈릴리에 묻혀서 살고 있는 자신들이 한심하였습니다. 그런데 큰 형님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인기를 얻는 것을 보자 큰 희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덕택에 자신들의 가문도 일으키고 큰 무대에 서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사람들이 임금 삼으려고 할 때가 절호의 찬스였는데 그 기회를 놓치게 되니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님과 그 형제들은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데 형제들은 자기 이름을 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르고자 하셨기 때문에 동생들의 요구는 외면하셨습니다.

  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드러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가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했을 때에도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장 1절에서는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17:1절에서는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때를 분별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3:1-8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저의 경우를 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결혼해야 할 가장 적당할 때가 있었습니다. 내 생각 보다 더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결혼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다 보면 명절이나 부모님의 생신에 함께 있지 못하여 핍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르려면 이를 각오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따르는 사람은 내가 원하는 때에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복음 농사를 지으려면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할 때가 있고 죄를 뽑을 때가 있으며, 책망할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싸워야 할 때가 있고 무조건 사랑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때를 따라 충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지만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6). 예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할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상과 타협해서 살고,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7).” 예수님께서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하심으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진리가 있었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악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빵을 구하는 사람들의 속에 있는 악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책망할 때와 위로할 때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아셨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진득하게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예수님도 올라가셨지만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셨습니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지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명절 중간쯤 되어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심으로 죽음도 면하고 자신의 가르침도 극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타임 센스가 있으셨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때입니까? 여름 수양회 이후에 쉼을 가지면서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새기기 위해 주님의 사랑과 말씀 공부에서 깊어져야 합니다.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입니다. 가을 학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독서와 이제까지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워야 합니다. 방학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서 가을에 추수할 양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집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요구나 세상의 시류에 영합하기보다, 하나님의 때를 따르고 하나님의 진리를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15-36) : 예수님께서 명절 중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 예수님께서 일류 랍비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닌데 그의 가르침은 정확하고 실감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써서 가르치셨는데 평범하면서도 깊은 진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완악한 죄인들의 마음을 찔러 쪼개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뻔한 잔소리 같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장로들의 유전을 지치지도 않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16,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나,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은 명상의 편린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거나 학위를 받기 위해 만들어낸 기발한 착상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들은 바를 그대로 증거하셨습니다. 진리를 따라 살려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 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은 사람의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관찰하고, 사람이 깨닫고, 사람이 지은 말에는 영원성이 없습니다. 그저 그때의 상황이나 자기 입장에 맞는 말들일 뿐입니다. 70년대는 실존주의가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는데, 80년대에는 사회주의를 알지 못하면 캠퍼스에서 사람 노릇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무슨 ‘-주의’ 같은 건 몰라도 됩니다. 그런 걸 알면 도리어 사람 노릇하기 어렵습니다. 그 대신 개그를 할 줄 알고 지단 같은 스포츠 선수에 대해서 잘 알고, 또 컴퓨터 게임을 능란하게 할 줄 알아야 사람 노릇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매력 있게 생각하는 남성상도 그러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제임스 딘 같은 반항아나 터프 가이가 매력적인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꽃미남들이 한창 인기입니다. 앞으로 매력 있는 남성상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이같이 ‘사람의 것’, 사람의 사상이나 사람의 기준은 늘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것들이 더 합리적이고 매력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사람의 것은 부담감도 없고 거부감도 없습니다. 이해도 빠르고 쉽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사람의 것에는 독소가 있습니다. 그 독소가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병들게 하고, 절망하고 죽게 만듭니다. 근래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독소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마디로 다원주의요 다양성을 최고로 여기는 사상입니다. 물론 다양성은 좋은 것이고 또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최고로 여기면 독이 됩니다. 그들은 절대성을 부정하며, 절대적인 진리를 원수로 여깁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옳습니다. 동성연애도 옳고 간음도 옳습니다. 그들에게는 회개라는 것이 없습니다. 인권과 사생활, 다양성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것이 다 합리화됩니다. 그런데 그 독소가 육신주의나 물질주의와 반응하여 별의별 퇴폐적이고 황폐한 문화와 온갖 몽롱한 종교들을 쏟아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취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병들고 영혼이 죽어갑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사사시대가 가장 죄악 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성경은 “그때에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기술합니다(사사기 21:25). 포스트모더니즘은 알고 보면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4천년 전 사사기 때부터 있었던 사상이요, 절대적 진리가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는 못된 사상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다 옳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지키고자 하는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좇기보다 절대적인 진리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거기에는 군더더기나 애매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명확하고 단호합니다. 그래서 거부감이 생기고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은 지혜롭고, 감동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고, 빛과 자유를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것’이 세력을 떨치는 그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받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떨어져 나간다고 하자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건강하게 회복시키자 노여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공의의 판단을 하지 않고 외모로 판단했습니다. 전통과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동기를 알고 공의의 판단을 하고자 하면 판단하는 것이 확 줄어 들 것입니다. 대신에 사람에 대한 긍휼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배워서 남을 판단하는데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사랑과 지혜와 생명과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3. 생수의 강되신 성령(37-52) : 37,38절을 봅시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축제가 끝나는 날은 아무리 잘 즐겼더라도 목마름이 있습니다. 허무합니다. 예수님은 명절 끝 날에 서서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여기서 ‘생수의 강’은 그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제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성령을 ‘생수의 강’이라고 한 것은 에스겔 47장에 성전에서 나오는 강을 의미합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면 이 흘러내리는 물로 인하여 온 세상이 소성함을 얻게 됩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게 될 것입니다.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물이 이르는 각 처에 모든 것이 살 것입니다. 또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다른 보혜사로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같은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십니다. 기름부음은 왕과 대제사장과 선지자를 세울 때 행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도 왕으로서, 대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하십니다. 
  첫째, 성령은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원수 사탄에 대항하여 싸우셨고 또 자기 백성을 원수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성령도 이런 사역을 수행하십니다. 성령은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영으로서 역사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를 어두움의 세력에 정복되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비록 거듭나서 ‘육에 따라’ 살지는 않지만 여전히 육 안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육신의 정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꿈틀거리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영적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신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만물을 통치하시며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는 지금도 은혜와 진리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이를 통해 자기의 왕국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성령도 그와 같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전도의 열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품성을 가지도록 만들어 천국을 이루는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는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둘째, 성령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며 예수 그리스와 연합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사람의 마음에 살아 역사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살으심이 나의 부활이 되게 하십니다.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연합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받게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회개하는 양심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 주십니다. 성령은 죄사함 받은 우리의 마음에 한량없는 평강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게 하십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고 좌절하는 자신을 보는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받아도 그 원인이 되는 죄를 찾아 회개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은 회개하는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담대하게 하시고 참된 만족을 누리게 하십니다. 

  셋째, 성령은 선지자로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비전을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기억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 심령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이상을 보게 됩니다. 즉 진리의 성령은 사람에게 비전을 줍니다. 사도행전 2:17에서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이 임할 때 특히 젊은이들이 환상(vision)을 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비전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비전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작은 것에 울고불고 합니다. 성공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고, 상황이 조금만 어려워져도 큰일 당한 것처럼 절망합니다. 비전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 대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멀리 내다보며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불만이고, 모든 것이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때의 감정이나 조그마한 유익에 매달리는 작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항상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면 비전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나 하다가 생을 마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세계를 복음화 하고자 하는 비전에 불탔습니다. 비전에 불탔기 때문에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어려웠지만, 그들의 배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났습니다. 그 생수의 강은 전 세계에 흘러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받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령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사도행전2:38절은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죄에 빠질 때 악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에 시달리고, 무지하고, 약해집니다. 무엇보다 항상 내적인 목마름에 시달립니다. 목마르기 때문에 아무 것이나 마셔댑니다. 그래서 그 배에는 술의 강이 흐르고, 정욕의 강이 흐르고, 걱정과 근심의 강이 흐릅니다. 욕심의 강이 흘러넘치고, 미움의 강이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하여 자기 인생마저 흘러 떠내려가게 합니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결코 지식이나 능력이나 환경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즉 사람은 악령의 지배를 받든지 성령의 지배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생수의 강이 흘러넘칩니다. 특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된 여름 수양회에서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분들 안에 생수의 강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분들이 하나 하나 모여 강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이 우리가 만나는 친구들을 변화시키고 캠퍼스를 변화시키고 직장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혁시킬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적인 사랑과 즐거움과 성공과 인정에 목말라 하던 분들이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을 믿고 목마름이 해갈되기를 기도합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홍대와 한국과 세계 캠퍼스를 적시기를 기도합니다. 메마른 심령들이 생수의 강물을 마심으로 소성함을 입고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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