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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06 여름수양회 주제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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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ervant
댓글 0건 조회 3,698회 작성일 06-07-1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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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수양회 주제3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요한복음21:1-25
요절/요한복음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의 결론이고 이번 여름수양회의 주제입니다. 요한복음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일생 가르치신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셔서도 동일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베드로의 실패를 녹이시고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어린 양을 먹이는 목자요 수제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아름다운 디베랴 바다로 가 부활하신 사랑의 주님을 만나 봅시다.
       
제1장. 그리하면 얻으리라(1-6) 
        1절을 보십시오.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그 후”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만난 후를 가리킵니다. 디베랴 바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갈릴리 바다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지만 제자들은 전처럼 예수님을 따를 용기도 자신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기에는 자신들의 실패가 너무 커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깨어진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접고 예수님 곁을 조용히 떠나는 것이 그나마 예수님께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충격적인 예수님의 십자가, 자신들의 배반, 깨어진 인생의 꿈을 안고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전에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26:32).”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힘들 때 예수님이 계신 갈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울 때마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그리로 돌아갔습니다. 마가는 선교를 하다 힘들어진 후에 그의 고향이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심령을 회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첫 사람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힘들 때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고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갈릴리로 돌아온 제자들은 몇 명이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갈릴리로 돌아온 제자들은 시몬 베드로, 디두모라 하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또 다른 제자 둘을 포함하여 총 일곱 명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에게 있어 갈릴리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갈릴리 말고 아무도 자신들의 존재를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습니다. 실패한 자신들의 모습을 고향의 가족과 친구들, 친지와 이웃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갈릴리로 돌아온 제자들은 집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용서한다면 노란손수건을 걸어달라고 사모님들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노란손수건 대신 시뻘건 바가지가 수십 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집에도 못 들어가고  게임 방, 비디오 방, 찜질 방으로 몰려 다녔습니다. 그러나 비자금이 떨어지자 당장 먹고 살 궁리부터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써서 여기 저기 보내고 취업사이트에도 올렸지만 전화 한 통화 오는 곳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토익점수가 있나, 자격증이 있나, 어학연수를 갔다 온 것도 아니고 나이도 많고 다른 사람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할수 없이 최후의 선택을 하였습니다.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어부의 삶을 다시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가 이런 결심을 했을 때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사실 그는 먹고 살기위해서 밤새도록 일해야 하고, 물고기 숫자에 웃고 우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좋아서 물고기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피래미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떠난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없이 자기 힘과 열심으로 수고하지만 열매가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은 마치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와 같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아쉬운 사람처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없나이다’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쳐서 더 이상 그물을 던 질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들이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을 때 제자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한 생각이 요한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 장면은 바로 3년 전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난 그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도 베드로는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지만 빈 그물뿐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제자들의 실패를 만회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때 요한이 이 사실을 깨닫고  감격에 차서 소리쳤습니다. ‘주님이시다’ ‘주님이시다’ 이 말은 실패로 고통하고 있던 모든 제자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주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솟아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 뵙고 용서를 빌고 싶었습니다.
 그는 벗었던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즉시 다이빙하였습니다. 갈릴리로 돌아 왔을 때 베드로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예수님도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실패를 만회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헤엄을 치면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감격하여 바닷물이 눈물인지 눈물이 바닷물인지 모를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2장. 와서 조반을 먹으라(8-14)
        9절을 보십시오.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님은 아름다운 해변가에서 밤새 추위에 지치고 배고프고 피곤한 제자들을 위해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앞치마를 두르시고 굽고 데치고 끓이고 볶고 바쁘게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최고급 웰빙 요리사 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원적외선이 나오는 참숯으로 생선을 구웠습니다. 빨갛게 타오른 숯불위에 생선이 노릿노릿 구워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미워 죽겠는데 그 사람에게 따뜻한 밥을 해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제 동역자에게 그런 사람에게 밥을 해줄 수 있느냐 물어보자 한 마디로“못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매몰차게 배반하고 떠나버렸던 그 제자들을 위해 조반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변함없는 사랑과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헤엄을 쳐 해변가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예수님께 나갈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을 배반했던 쓰라린 기억과 아픔들이 되살아났고 자기 정죄와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자기정죄와 수치심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가까이 오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배에 올라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려 가득히 찬 고기를 하나, 둘 세어 보았습니다. 큰 고기가 무려 일백 쉰 세 마리나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중에 묵직한 놈을 골라 예수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없이 받아 생선을 맛있게 구우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야단이나 정죄의 눈초리라도 받을까 두려웠으나, 예수님은 살며시 베드로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탱큐”하셨습니다.

        1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음식을 다 만드신 후 추워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 초청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제자들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밥상머리에서 혼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밥이나 먹여놓고 따지자 하다가도 순간 분을 못 참아 밥상을 엎어버리고 “야 너 일로 와봐 내가 그냥은 못가지 입장 바꿔 생각해봐 그러구도 네가 수제자야 타이틀 내놔, 하여튼 큰소리치는 놈치구 믿을 놈이 없다니까 입만 살아가지고 먹는 것 좋아 허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한 어머니와 같이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모든 허물과 실수, 죄악을 다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배고픔과 추위를 아시고 섬세하게 섬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행한 배반으로 얼마나 고통하고 있는지 다 아십니다. 그들 안에 있는 실패의식과 정죄의식으로 스스로 자학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받은 배반의 상처와 고통보다 제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더 아파하시고 위로해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 중에 감히 “당신이 누구냐?”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섬김에 감동하여 복받쳐 오르는 눈물로 인해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떡과 생선을 더 주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비치파티(Beach party)는 마치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는 천국잔치와 같았습니다.

제3장. 나를 더 사랑하느냐(15-25)
        15a절을 보십시오.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이렇게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자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실패한 베드로에게‘반석아’라고 부른다면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부담스러울까요? 여기서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물으셨습니다. 이렇게 물으신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의 영어번역은 “네가 진실로 이것들보다(these)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이 사람들’을 ‘이것들’보다로 번역할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순수하였고 열정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세상소망과 영광이 조금씩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은 총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꿈이 생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자신의 인간적인 꿈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안에 있는 인간적인 꿈을 내려놓고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학생들은 여친, 남친, 취업이나 학점, 인터넷 게임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목자님들은 물질이나 승진, 사업번창, 자녀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미혼인 형제자매에게는 결혼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보는 것에 약한 분들은 ‘주몽’이나 ‘하늘이시여’와 같은 TV드라마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10:37)“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저희가 내려놓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베드로의 리더십을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라고 맹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나는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다른 제자들과 다르다, 수제자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저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말이 있다고 하는데 베드로는 할말이 없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베드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이런 베드로를 수제자로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받아 주시고 ‘수제자’로 회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에 따라 소망을 바꾸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실패할지라도 우리에게 두신 소망을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사랑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인 아가페, 친구간의 우정을 뜻하는 필레오, 남녀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로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두 번 다 우정을 뜻하는 필레오-로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한 자로서 절대적인 사랑으로 감히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 자신의 힘과 열심, 인간적인 충성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심지어‘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b) 호언장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서 닭이 울었을 때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고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신 말씀이 생각나 통곡하였습니다(눅22:61,62).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한계적인가 깨닫고 겸손히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해하시고 한 단계를 낮춰서, 세 번째는 우정을 뜻하는 필레오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자신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시자 근심하였습니다. 여기서 ‘근심하다’는 뜻은 ‘고통하다’, ‘서운해 하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 서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베드로가 근심하기까지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은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 고백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이 세상 무엇보다 가장 사랑한다! 네가 어떤 모습이든 간에 너를 최고로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사랑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깊이 깨닫고 고백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17b)” 이 고백은 ‘주님이 제 마음을 다 아시지 않습니까?’라는 고백입니다. 이를 볼때 베드로가 실패를 통해 겸손해지고 진실해졌음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과 같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 고백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신실치 못하지만 그래도 주님은 우리의 이 부족한 믿음과 사랑을 이해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대답할 때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b)", "내 양을 치라(16b)", "내 양을 먹이라(17b)"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어린 양을 먹이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모든 연약함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의 목자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를 하나님의 양 무리의 목자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 없는 당신의 양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이 당신에게 몰려올 때 그들을 목자 없는 양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막6:34). 예수님의 어린 양은 과거 베드로가 그랬듯이 죄와 인생의 무의미로 고통 하는 자들 입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인생의 목표가 없이 허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문제로 고통하고 있으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몰라 괴로워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쾌락주의와 물질주의에 넘어가 사탄의 종 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양들을 두고 떠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무리들을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을 맡겨 주셨지 염소를 맡겨 주지 않으셨습니다. 염소를 양으로 잘못 알아보고 투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자신을 감당하고 섬겨 주신 것처럼 예수님의 양 무리를 먹이기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럼 양무리의 목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목자는 항상 양들을 먹일 말씀의 꼴을 풍성히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양들의 눈높이에 맞춰 섬겨 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섬길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목자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눅22:32a). 기도할 때 양들을 악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지키고 도울 수 있습니다. 목자는 예수님의 어린 양이 강건하고 자립적인 양이 되기까지 늘 관찰하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양을 먹일 때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귀한 양들을 돌볼 때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의 삶을 살 때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배우고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양들을 맡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목자의 삶은 늘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어린 양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랑으로 섬겨주어도 목자의 사랑을 받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떠나는 양으로 인해 고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양을 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삶의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무리들이 자신의 기쁨이요 면류관이요 보배하고 하였습니다(빌4:1) .

 
        결론적으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실패와 절망에 빠져 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실패를 만회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배반하고 도망간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고 섬겨주심으로 제자들의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고 모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특히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고 그에게 당신의 양무리를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의 실패와 절망을 치유하시고 만회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깨어졌던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양무리를 먹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 시간 저희가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을 영접하고 진심으로 사랑을 실천 하는 삶을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렐  루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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