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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11(6:22-71)/ 생명의 떡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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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993회 작성일 06-07-0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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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11 강                                                               
말씀 요한복음 6:22-71
요절 요한복음 6:35

생명의 떡 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이튿날 무리들은 다시 배가 고프자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주신 축복에 마음이 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축복보다 축복을 주시는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하는 생명의 떡이 무엇인가 깨닫고 그것을 먹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썩는 양식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22-29) :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던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습니다. 무리들은 거기 예수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매우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이고 예수님, 반갑습니다. 언제 여기 오셨답니까?”
 
  예수님은 반갑게 인사하는 그들이 무색하게 쓴소리를 하셨습니다. 2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표적을 보고 영적인 소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복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며칠 씩 굶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배고픈 줄도 몰랐습니다. 그만큼 말씀 공부를 통해서 참된 만족을 느꼈고 생명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배부르게 먹이신 이후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그들의 먹는 문제는 아무 염려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떡을 먹고 배불렀던 기억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더 많은 떡, 더 맛있는 떡을 먹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축복을 받게 되자 욕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들은 그 축복을 바라고 열심히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은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목적이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소원이 타락했음을 말해 줍니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교회의 성장이 정체되고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인당 GNP가 일만 달러를 넘어서게 되면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영적인 소원을 잃고 세속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선교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마음이 누룩과 같이 떠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 세상에 대한 소망이 커지고 주어진 축복을 어떻게 즐길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면 그 복으로 어떻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기보다 더 세속적이 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과 아데미 신을 섬긴 것과 같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을 믿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자 이제까지 즐기지 못했던 죄를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학업으로 인해서 헤매던 학생이 예수님을 믿고 성적이 오르면  일등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는 것은 매우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일등이 목적이 된다면 슬픈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빵 문제, 결혼 문제, 성격 문제, 가정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채워주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넘치도록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세상 욕심을 이루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으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축복을 받게 될 때에 축복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 받은 바 축복을 잘 간직하고 누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도리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먹고 소원이 타락한 그들에게 무슨 방향을 주십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이유,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성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요즈음 성공했다는 말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벌고 넓은 집을 소유하고 외제차를 굴려도 빈 가슴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욱 허무하고 공허함을 느낍니다. 그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 결과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죄와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썩은 양식이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음식만 썩는 양식이 아니라 돈과 세상 명예와 권세도 썩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결국 썩고 더럽고 쇠하게 될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목적도 고귀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에 우리 인생의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하며, 영원한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자 그들은 심각해졌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제까지 하루 세 끼의 먹을 것을 위해 세상 일에만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보니 먹을 것에만 혈안이 되어 살아온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복수 명사를 써서 물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여러 가지 목록을 만들어 제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십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질문의 심각성에 비해 예수님의 대답은 짧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복수로 말했지만 예수님은 단수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은 나사로의 집에 예수님이 초청을 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섬기는 일이 많아 분주했습니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10:39-42)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말씀을 듣고 믿음을 배우고자 하는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일이요 의로 여기십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는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모든 일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시작되고 성취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일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사람이 변화되고 사람답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없고,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능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란 뜻은 일하는 동기와 목적이 ‘믿음’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을 하려는 동기와 목적이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의 직업이 목사라 해도 먹고 살기 위해 그 일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일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체가 우리의 삶의 의미요 기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 속에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견고한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만족, 자기의, 자기영광에 빠져서 지내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유대인들의 문제는 바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율법에 열심을 낸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척하고 자기 의로 의롭게 되고자 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서 믿음을 빼앗고자 합니다. 우리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캠퍼스에 올라가지만 양을 얻지 못하고 한숨 쉬며 내려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일한 것이 없어 민망하기도 하고 그만 둬 버리고 싶은 마음도 치솟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사명인의 중심을 지키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습니다. 한 목자님 가정은 수양회 때마다 데려갈 양이 없어서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수양회 때마다 자기 차에 다른 목자의 양이라도 태워서 다녔습니다. 그리고 목자님들의 어린 자녀들을 사랑하여 말씀으로 열심히 섬겼습니다. 사명인으로 살고자 할 때 마음 아픈 일들도 있었지만 믿음을 지키고자 투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분들의 믿음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그 지파에 양들이 가득할 뿐만 아니라 그 요회에서 두 명의 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양회에는 자기 차로 동역자와 함께 두 명의 양을 데려갈 것을 생각하니 기쁨이 충만합니다.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해도 포기치 아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싫어 버릴지라도 나는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친히 일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삶으로써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30-59) :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그들은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0,31).” 그들은 예수님께 모세가 한 것처럼 40년 동안 먹을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오직 떡, 떡, 떡 밖에 없었습니다. 떡이 자신들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고 계속 떡을 먹는 것이 영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이 ‘밥이 하늘’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제 문제만 해결해 주면 만사오케이라는 것입니다. 경제가 끊임없이 성장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는 주기가 있어서 성장, 불황, 회복, 성장을 반복합니다. 또 돈이란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이런 것에 목숨을 걸게 되면 인생이 허무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2,33).” 만나는 사실 하늘에서 내린 떡인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내린 하나님의 떡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생하도록 있는 떡을 주신다고 하자 무리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 그들은 땀 흘려 일하지도 않고 먹고 사는 염려 없이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떡을 항상 달라고 하는 무리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곧 생명  떡이요 그에게 와서 그를 믿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먹고자 하는 떡은 그들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만족을 주긴 주지만 잠깐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갖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여기저기 여행도 해 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남보다 앞서야 하고, 남보다 앞서기 위해 하루 세 시간 밖에 자기 않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을 다 쏟아도 늘 아쉬움과 허탈감이 남고, 성공했다고 해도 욕심은 더 커집니다. 욕심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지는 즉시 더욱 커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잘 살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더 욕심을 부립니다. 세상적인 떡이나 육신적인 떡은 사람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으면 결코 주리지 않으며 다시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양식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참되고 영원한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 51절을 봅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엽기적으로 들립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씀에 놀랐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우리를 식인종으로 아는가?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하려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5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우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살’이란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그의 살을 찢기시고 고통당하실 것을 말합니다. 또 예수님의 ‘피’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죽었습니다.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속에 악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되 머리로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되도록 그렇게 적극적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매주 소감을 쓰는 것도, 예수님을 먹고 마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마실 때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55).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자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계신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예수님을 먹는 그 사람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삽니다(57).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원동력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4:20).”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나는 하나가 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 때문에 삽니다. 부모의 희생을 먹고 마시며 삽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어 살아갑니다. 인간의 사랑은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병들이기 쉽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이유입니다.

  3.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37,44, 60-71) : 예수님께서 자기를 먹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자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는가?” 그러자 예수님은 스스로 제자들이 수군거리는 줄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1-63).”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영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이를 깨닫지 못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했습니다(66). 여기서 제자들은 열 두 제자 이외의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이 모두 떠나버리는 것을 보면서, 남아있는 열 두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많은 무리들이 몰려 올 때는 귀찮기도 했지만, 인기 높으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에 마음 뿌듯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리들이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자존심이 상하고, 예수님에 대한 의심도 생겼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떠나야할지 남아 있어야 할지 마음이 뒤숭숭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결단이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67)”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8,69).”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 말씀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 그가 그리스도이신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은혜와 사랑을 배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하면서 다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참된 떡이신 예수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영생의 기쁨과 활력이 있었으며,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떠나가는 이들의 반응에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37,44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주권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서 타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고자 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열심히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든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일하여 축복을 받을 때일수록 믿음을 지키고자 힘써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핍박 때문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심과 세상의 쾌락 때문에 믿음을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지만 그러한 것들은 순간적인 것입니다. 참된 만족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삶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때 참된 만족을 누리며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짧은 이 세상에 와서 고귀한 인생 목적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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