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06년 성탄 제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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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성탄 제2강
한 아기
이사야 9:1-7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오늘 말씀은 이사야가 2,700여 년 전에 예언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로서 육신을 입으시고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가 구주 탄생을 예언한 때나 예수님께서 구주로서 탄생하신 때나 시대적으로 어둡고 힘든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흑암에 행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며 고통 하는 자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임마누엘하심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한 아기로 오신 구주 탄생의 놀라운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여러모로 어둡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위한다 하면서도 자신들을 위한 정쟁을 일삼고 서민 경제는 부동산 문제와 맞물려 절망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북한 핵문제 등 안보문제, 부정과 부패, 음란과 폭력 등의 어두운 문제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흑암도 우리에게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 때 온전히 물러가게 됩니다. 이 시간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배우고 심령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이사야가 구주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던 시기의 이스라엘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은 강성했던 다윗 왕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분열된 상태에서 그나마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였고 남 유다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된 우상 숭배의 죄악은 북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깊이 병들게 했고 하나님보다 강대국을 의지하던 그들은 결국 그 강대국들에 의해 고통당하다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회개하여야 할 남 유다마저 도리어 믿음을 잃어버리고 우상숭배의 죄악 된 길을 똑같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선민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소망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이스라엘의 처한 형편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줄곧 외침에 시달렸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람이 치고 앗수르가 침략하고 바벨론이 도발하였습니다. 특히 앗수르 왕 살만에셀은 반 앗수르 동맹을 추구하던 북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북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사로잡혀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셨던 그 땅은 앗수르의 혼혈정책에 의해 이방인들이 이주하였고 영적으로도 혼합종교가 생겨나 무참히 더럽혀졌습니다. 특히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갈릴리 북방 변방 지역으로 북쪽으로부터 침입을 당할 때마다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멸시를 당하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흑암을 없애는 큰 빛이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들에게 생명의 빛이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사람들이 찾아낸 빛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비춰지는 빛, 곧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베푸시는 빛입니다. 빛이 비취기전 그들은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었고 그들의 미래는 불확실하였습니다. 당시 세계 패권을 앗수르가 계속하여 잡을 것인지, 전통적 강대국인 애굽이 잡을 것인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는 바벨론이 잡을 것인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강대국에 쥐여 살며 우상을 섬기던 그들은 흑암에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망의 그늘이 덮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큰 빛을 보고 그 빛이 그들에게 비춰지게 됩니다. 2절 말씀은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빛이 비췬다는 확신을 표현한 것으로서 비록 현실은 어둡고 힘들고 절망적일지라도 그 빛이 반드시 비췬다는 이사야의 믿음과 확신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사망의 그늘을 거두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큰 빛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700년 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마태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중심으로 한 갈릴리 지역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대부분을 이곳에서 사역하심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또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이시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믿음과 확신대로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오심으로 모든 흑암이 떨쳐지고 사망의 그늘이 걷혀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8년 된 중풍병자가 사망의 그늘진 자리를 걷어내고 들고 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자신만 알던 세리가 나누어주고 베푸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쓸모없던 사마리아 여인이 변화되고 그 동네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빛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모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빛의 역사를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간혹 한번만 빛을 보고 그 이후에 여전히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말씀대로 우리는 빛 되신 예수님을 일생동안 우리를 인도하시는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였음이니이다.” 창성케 하신다는 것은 숫자가 많아질 뿐만 아니라 소산이 많아 번창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을 했던 것처럼 추수 때만 되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 등 원수들이 약탈해 감으로 이스라엘은 즐겁기는커녕 미약함에 대해 한이 깊었습니다.(삿6장) 1년 농사의 수고를 감당하며 가장 기쁠 때는 추수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추수조차도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숨어서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추수하는 즐거움 같이 그들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은 또한 미약한 그들이 원수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과 같은 크고도 깊은 즐거움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은 주께서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기 때문입니다. 멍에나 채찍이나 막대기는 짐승을 부릴 때 쓰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짐승과 같은 형편에 처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이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꺾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꺾으시기를 13만 오천 명의 미디안 대군을 기드온 300용사가 쳐부순 것처럼 놀랍게 역사하셔서 꺾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이 축복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오천년 역사 속에서 980여회의 외침을 받았고 불과 1세기도 전에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통 받다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만 했었습니다. 이러한 나라가 하나님의 열심과 그 종들인 선교사님들의 헌신에 의해 성경을 사랑하는 나라요 복음을 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올해 세계에서 11번째로 수출 3천억 달러를 달성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시아의 변방, 한국을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이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도록 하시고자 하는 연단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모든 축복이 어떻게 주어지게 되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순간부터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이사야 선지자 등 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예언되어 오다가 2006년 전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2)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아기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과 근본 동체이시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완전한 사람이 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정사란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곧 강력한 힘과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로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이게 되고 전쟁이 종식 되게 됩니다. 한 아기는 그 힘으로 모든 원수의 손에서 그 백성을 건지시고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십니다.
그러면 이 아기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6절 하반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속성과 성격을 나타냅니다. 이 아기, 곧 예수님은 다섯 가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 이름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다시 배워보겠습니다.
첫째, 기묘자입니다. 기묘자라는 의미는 일반에서 분리가 되고 초월하여 놀랍고 기적적인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공생애 사역, 십자가와 부활을 보면 얼마나 기묘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자체가 얼마나 기묘합니까? 또 동정녀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분이 되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놀라운 일을 가까이서 본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를 지신 일과 또한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일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마노아 부부에게 늦둥이 삼손을 주실 때 그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기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 삼손은 미스터리와 스릴과 반전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습니다. 기묘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기묘하고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가 얼마나 놀라운지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12)
둘째, 모사입니다. 모사란 카운슬러, 또는 컨설턴트, 곧 지혜로운 상담자를 의미합니다. 모사는 옳은 것을 택하도록 도와줍니다. 가장 좋은 길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에나 지혜롭게 지도하는 분이십니다. 참 경배의 대상을 몰라 인생의 목마름 가운데 죽어가던, 그러면서도 돕는 예수님께 완전히 싸가지 없게 굴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되신 예수님을 깨닫고 영접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흥분한 군중들에게 당장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여인을 너무도 지혜롭게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헤아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사가 되셔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모르는 것들을 깨닫게 하시며 돕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혜가 부족할 때마다 모사이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범사에 우리의 모사이신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께 간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길을 지도해 주십니다.(잠3:6)
셋째,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아기의 이름이 모두 특별하지만 특히 이 이름은 가장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그 누구에게도 붙일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곧 한 아기는 하나님과 본체이신 신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거친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셨습니다. 말씀으로 38년 된 중풍병자도 일어나 걷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허물과 죄악을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시고 ‘다 이루었다’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박살내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죄악 된 세상을 이기는 힘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4,5) 우리는 형편이 좋을 때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히는 가나안 족속들이나 앗수르, 바벨론 등의 강대국들이 바알, 아세라 등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영적 간음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책망하시고 회개케 하시기 위해 이방인들을 잠시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영적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믿음은 믿음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현실 논리에 빠져 믿음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는 분명하게 책망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보고 이것을 꿰뚫는 영적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앗수르를 제거하시고, 바벨론은 또한 바사를 통해 제거하시고, 바벨론 포로들을 고레스를 통해 귀환케 하시며 성전을 재건하게 하실 것까지 역사하실 비전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현재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며 현실 논리에 빠져 믿음에 대해 냉소적이 되는 불신의 죄악을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시대의 예언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역사가 성취 된 것을 본 축복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넷째,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예수님의 영존성과 인류를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부성적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있지만 약점이 있고, 또한 언젠가는 돌아가시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아버지라 할지라도 육신의 아버지는 한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재미동포인 제임스 김이 미국의 오리건 주 산악지대에서 실종된 뒤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부인과 두 딸을 차에 남겨두고 혼자 혹한과 폭설을 뚫고 구조 요청에 나섰다가 숨진 사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육신의 아버지는 큰 사랑이 있다 할지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버지도 언젠가는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죄로 인해 멸망과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도 성령으로 우리 각 사람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다섯째, 평강의 왕이십니다. 평강은 평화, 평안 등의 뜻입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사실 왕과 평강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왕은 자신과 왕권을 위해 백성위에 군림하고 힘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나 한 아기는 왕이시되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오셨고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신 왕이십니다. 한 아기는 이 땅에 peace maker로 오셨습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불화의 높은 담이 쳐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의와 공로로는 이것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곧 화목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의 담을 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군천사들이 이렇게 찬양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근본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계명을 어긴 후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인도 질투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인 후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유리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아기로 오신 평강의 왕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고 그 통치도 받지 않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죄의 다스림을 받으며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유리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부족한 물질 문제, 취업도 잘 안되고 언제 실직 당할까 하는 실업 문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문제, 불확실한 장래 문제, 북한 핵에 대한 위협문제, 어지럽고 혼탁한 정치 문제 등으로 불안해하고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오늘 날의 많은 아담과 가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인간이 범죄 한 순간부터 메시야를 약속하셨고, 이사야와 같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이를 위해 하늘 보좌와 영광을 버리시고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감사 찬송 드립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어떻게 되며 어떻게 이루어지게 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한 아기가 통치할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정사와 평강은 끝이 없이 더하여만 갈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약속된 메시아가 통치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영원토록 보존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다섯 왕을 거치며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습니다. 믿음이 안 좋은 왕, 믿음이 좋은 왕, 믿음이 별로인 왕, 믿음이 훌륭한 왕, 그리고 믿음이 아예 없는 나쁜 왕까지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며 고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한 아기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소망했던 약속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열심으로 700년 후에 이루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길어야 1,000년도 어렵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몇몇 대통령들을 거쳤습니다.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며 고통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보다도 더욱 분명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이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고 계심을 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오직 우리에게 오신 한 아기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무엇보다 나에게 오신 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 모두 넘치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축하하여야 하겠습니다. 2006년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의 중심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한 아기
이사야 9:1-7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오늘 말씀은 이사야가 2,700여 년 전에 예언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로서 육신을 입으시고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한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가 구주 탄생을 예언한 때나 예수님께서 구주로서 탄생하신 때나 시대적으로 어둡고 힘든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흑암에 행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며 고통 하는 자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임마누엘하심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한 아기로 오신 구주 탄생의 놀라운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여러모로 어둡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위한다 하면서도 자신들을 위한 정쟁을 일삼고 서민 경제는 부동산 문제와 맞물려 절망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북한 핵문제 등 안보문제, 부정과 부패, 음란과 폭력 등의 어두운 문제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흑암도 우리에게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 때 온전히 물러가게 됩니다. 이 시간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배우고 심령 깊이 영접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이사야가 구주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던 시기의 이스라엘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은 강성했던 다윗 왕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분열된 상태에서 그나마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였고 남 유다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된 우상 숭배의 죄악은 북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깊이 병들게 했고 하나님보다 강대국을 의지하던 그들은 결국 그 강대국들에 의해 고통당하다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회개하여야 할 남 유다마저 도리어 믿음을 잃어버리고 우상숭배의 죄악 된 길을 똑같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선민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소망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이스라엘의 처한 형편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줄곧 외침에 시달렸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람이 치고 앗수르가 침략하고 바벨론이 도발하였습니다. 특히 앗수르 왕 살만에셀은 반 앗수르 동맹을 추구하던 북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북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로 사로잡혀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셨던 그 땅은 앗수르의 혼혈정책에 의해 이방인들이 이주하였고 영적으로도 혼합종교가 생겨나 무참히 더럽혀졌습니다. 특히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갈릴리 북방 변방 지역으로 북쪽으로부터 침입을 당할 때마다 가장 먼저 큰 피해를 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멸시를 당하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흑암을 없애는 큰 빛이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들에게 생명의 빛이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사람들이 찾아낸 빛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비춰지는 빛, 곧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베푸시는 빛입니다. 빛이 비취기전 그들은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었고 그들의 미래는 불확실하였습니다. 당시 세계 패권을 앗수르가 계속하여 잡을 것인지, 전통적 강대국인 애굽이 잡을 것인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는 바벨론이 잡을 것인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강대국에 쥐여 살며 우상을 섬기던 그들은 흑암에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망의 그늘이 덮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큰 빛을 보고 그 빛이 그들에게 비춰지게 됩니다. 2절 말씀은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빛이 비췬다는 확신을 표현한 것으로서 비록 현실은 어둡고 힘들고 절망적일지라도 그 빛이 반드시 비췬다는 이사야의 믿음과 확신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사망의 그늘을 거두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큰 빛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700년 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마태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중심으로 한 갈릴리 지역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대부분을 이곳에서 사역하심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또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이시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믿음과 확신대로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오심으로 모든 흑암이 떨쳐지고 사망의 그늘이 걷혀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8년 된 중풍병자가 사망의 그늘진 자리를 걷어내고 들고 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자신만 알던 세리가 나누어주고 베푸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쓸모없던 사마리아 여인이 변화되고 그 동네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빛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모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빛의 역사를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간혹 한번만 빛을 보고 그 이후에 여전히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말씀대로 우리는 빛 되신 예수님을 일생동안 우리를 인도하시는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였음이니이다.” 창성케 하신다는 것은 숫자가 많아질 뿐만 아니라 소산이 많아 번창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을 했던 것처럼 추수 때만 되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 등 원수들이 약탈해 감으로 이스라엘은 즐겁기는커녕 미약함에 대해 한이 깊었습니다.(삿6장) 1년 농사의 수고를 감당하며 가장 기쁠 때는 추수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추수조차도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숨어서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추수하는 즐거움 같이 그들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은 또한 미약한 그들이 원수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과 같은 크고도 깊은 즐거움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은 주께서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기 때문입니다. 멍에나 채찍이나 막대기는 짐승을 부릴 때 쓰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짐승과 같은 형편에 처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짐승이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꺾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꺾으시기를 13만 오천 명의 미디안 대군을 기드온 300용사가 쳐부순 것처럼 놀랍게 역사하셔서 꺾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이 축복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오천년 역사 속에서 980여회의 외침을 받았고 불과 1세기도 전에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통 받다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야만 했었습니다. 이러한 나라가 하나님의 열심과 그 종들인 선교사님들의 헌신에 의해 성경을 사랑하는 나라요 복음을 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올해 세계에서 11번째로 수출 3천억 달러를 달성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시아의 변방, 한국을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이는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도록 하시고자 하는 연단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모든 축복이 어떻게 주어지게 되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순간부터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이사야 선지자 등 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예언되어 오다가 2006년 전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2:12)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아기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과 근본 동체이시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완전한 사람이 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정사란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곧 강력한 힘과 권세가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로 압제자의 막대기가 꺾이게 되고 전쟁이 종식 되게 됩니다. 한 아기는 그 힘으로 모든 원수의 손에서 그 백성을 건지시고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십니다.
그러면 이 아기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6절 하반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속성과 성격을 나타냅니다. 이 아기, 곧 예수님은 다섯 가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 이름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다시 배워보겠습니다.
첫째, 기묘자입니다. 기묘자라는 의미는 일반에서 분리가 되고 초월하여 놀랍고 기적적인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공생애 사역, 십자가와 부활을 보면 얼마나 기묘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자체가 얼마나 기묘합니까? 또 동정녀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분이 되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놀라운 일을 가까이서 본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를 지신 일과 또한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일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마노아 부부에게 늦둥이 삼손을 주실 때 그 이름을 묻는 마노아에게 “기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 삼손은 미스터리와 스릴과 반전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습니다. 기묘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기묘하고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가 얼마나 놀라운지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12)
둘째, 모사입니다. 모사란 카운슬러, 또는 컨설턴트, 곧 지혜로운 상담자를 의미합니다. 모사는 옳은 것을 택하도록 도와줍니다. 가장 좋은 길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에나 지혜롭게 지도하는 분이십니다. 참 경배의 대상을 몰라 인생의 목마름 가운데 죽어가던, 그러면서도 돕는 예수님께 완전히 싸가지 없게 굴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되신 예수님을 깨닫고 영접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흥분한 군중들에게 당장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여인을 너무도 지혜롭게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헤아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사가 되셔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모르는 것들을 깨닫게 하시며 돕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혜가 부족할 때마다 모사이신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범사에 우리의 모사이신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께 간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길을 지도해 주십니다.(잠3:6)
셋째,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아기의 이름이 모두 특별하지만 특히 이 이름은 가장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그 누구에게도 붙일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곧 한 아기는 하나님과 본체이신 신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거친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셨습니다. 말씀으로 38년 된 중풍병자도 일어나 걷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허물과 죄악을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시고 ‘다 이루었다’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박살내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죄악 된 세상을 이기는 힘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4,5) 우리는 형편이 좋을 때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히는 가나안 족속들이나 앗수르, 바벨론 등의 강대국들이 바알, 아세라 등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영적 간음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을 책망하시고 회개케 하시기 위해 이방인들을 잠시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영적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믿음은 믿음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현실 논리에 빠져 믿음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는 분명하게 책망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보고 이것을 꿰뚫는 영적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앗수르를 제거하시고, 바벨론은 또한 바사를 통해 제거하시고, 바벨론 포로들을 고레스를 통해 귀환케 하시며 성전을 재건하게 하실 것까지 역사하실 비전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현재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며 현실 논리에 빠져 믿음에 대해 냉소적이 되는 불신의 죄악을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시대의 예언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역사가 성취 된 것을 본 축복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넷째,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예수님의 영존성과 인류를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부성적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있지만 약점이 있고, 또한 언젠가는 돌아가시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아버지라 할지라도 육신의 아버지는 한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재미동포인 제임스 김이 미국의 오리건 주 산악지대에서 실종된 뒤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부인과 두 딸을 차에 남겨두고 혼자 혹한과 폭설을 뚫고 구조 요청에 나섰다가 숨진 사건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육신의 아버지는 큰 사랑이 있다 할지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버지도 언젠가는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죄로 인해 멸망과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도 성령으로 우리 각 사람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다섯째, 평강의 왕이십니다. 평강은 평화, 평안 등의 뜻입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사실 왕과 평강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왕은 자신과 왕권을 위해 백성위에 군림하고 힘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나 한 아기는 왕이시되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오셨고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신 왕이십니다. 한 아기는 이 땅에 peace maker로 오셨습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불화의 높은 담이 쳐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의와 공로로는 이것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곧 화목제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의 담을 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군천사들이 이렇게 찬양을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근본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계명을 어긴 후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인도 질투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인 후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유리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아기로 오신 평강의 왕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고 그 통치도 받지 않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죄의 다스림을 받으며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유리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부족한 물질 문제, 취업도 잘 안되고 언제 실직 당할까 하는 실업 문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문제, 불확실한 장래 문제, 북한 핵에 대한 위협문제, 어지럽고 혼탁한 정치 문제 등으로 불안해하고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오늘 날의 많은 아담과 가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인간이 범죄 한 순간부터 메시야를 약속하셨고, 이사야와 같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이를 위해 하늘 보좌와 영광을 버리시고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감사 찬송 드립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어떻게 되며 어떻게 이루어지게 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한 아기가 통치할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정사와 평강은 끝이 없이 더하여만 갈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약속된 메시아가 통치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영원토록 보존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다섯 왕을 거치며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습니다. 믿음이 안 좋은 왕, 믿음이 좋은 왕, 믿음이 별로인 왕, 믿음이 훌륭한 왕, 그리고 믿음이 아예 없는 나쁜 왕까지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며 고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한 아기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소망했던 약속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열심으로 700년 후에 이루셨습니다. 세상 나라는 길어야 1,000년도 어렵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몇몇 대통령들을 거쳤습니다.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며 고통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보다도 더욱 분명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이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 자들입니다.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고 계심을 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오직 우리에게 오신 한 아기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무엇보다 나에게 오신 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 모두 넘치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축하하여야 하겠습니다. 2006년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의 중심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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