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29(19:1-42)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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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29 강
말씀 요한복음 19:1-42
요절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달고 죽으셨습니다. 왜 유대인의 왕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 죽어야 했을까요? 그 왕이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이런 의문들을 풀어보고 정말 복된 소식이 무엇인지 마음에 새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유대인의 왕(1-28) :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에 의해서 무죄임이 드러났습니다(18:38). 그러면 당연히 석방을 해야 하지만 빌라도는 정치가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예수님께 채찍질을 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알몸으로 온 몸에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꾹 눌러 씌웠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이마에는 굵은 가시들이 박히면서 핏방울이 맺히고 흘러내렸습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군병들은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조롱했습니다.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그들은 평안을 구하면서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후려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잠잠히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밖에 나가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4).” 예수님은 채찍에 맞은 처참한 몸과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자기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는 기꺼이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오셨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빌라도는 자신을 왕으로 내세운다고 고소한 이 사람을 보라,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가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힘없는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동정을 얻어 풀어주고자 했는데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벌써 세 번째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석방해야 했지만 자기의 정치 생명과 장래를 위해서 백성들의 불의한 요구에 타협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폭도로 변한 군중들이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는 재판관으로서 중심을 잡지 못했습니다.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백성들의 무리한 요구에 대책없이 맡겨버렸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만한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는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25억의 크리스챤들이 그의 죄를 되뇌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머리를 쓰다가 유대인들에게 말려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도 법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우리 법대로 하면 마땅히 처형되어야 합니다.” 하고 우겨댔습니다(7).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지난 밤 아내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그 죄 없는 사람에게 상관하지 마세요. 지난 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어요(마 27:19).”
빌라도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너는 어디로서냐?”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더 진지하게 심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은 그가 현재 받으시는 고통이 아버지의 뜻에 대한 복종임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주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마26:63,64). 그러나 빌라도가 주님께 질문했을 때에는, 빌라도가 자신이 묻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는 메시아에 대한 개념이나 그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빌라도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안달이 나서 재촉했습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이는 빌라도의 허세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사실 상황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났습니다.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권세를 자랑하는 빌라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11).”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빌라도보다 유대인들의 죄는 더 컸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썼지만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으면 예수님과 함께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정치가인 빌라도는 난감했습니다. 그는 다시 예수님을 끌고 나와서 박석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14a절을 보십시오. “이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로마 시간으로 육시란 정오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시점에서 그날 저녁에 먹을 유월절 만찬을 위해서 제사장들이 성전 마당에서 유월절 양을 도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유월절 양으로 죽으시는 것입니다(1:29). 이로 인해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방인인 빌라도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에게 “보라 너희 왕이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광분하여 소리질렀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예수님은 왕으로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빌라도는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물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맺은 시내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 백성을 구원하사 자유를 주고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 소망을 두셨습니다.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옛 언약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파기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반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왕노릇을 해왔습니다. 자기들이 계속해서 왕노릇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극악무도한 죄로 인해 그들은 70년에 멸망을 당하고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방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반역으로 인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 시내 언약이 파기되고 새 언약의 역사가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구약의 마침이며 신약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입니다. 그 언약의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백성이 창조되고 하나님의 새 백성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의 반역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율법대로 속죄 제사로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시달리셨기 때문에 여러 번 쓰러지셨습니다. 그의 온 몸은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치 않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자기의 죄 때문에 지는 십자가이지만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가장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인류의 죄가 다 그 십자가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골고다를 오르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왕들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기의 영화와 권세와 부귀를 자랑하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구원의 왕이십니다. 그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그는 메시아로서 과업을 완성하고 왕으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수난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정체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네 짐승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네 짐승은 다가올 네 제국과 그 왕들을 상징했습니다. 그 제국은 바벨론, 페르샤, 헬라,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나님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었습니다(단7:14). 다니엘이 본 환상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왕이시요 영원한 통치자이십니다. 이 사실을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도록 예수님의 죄패에는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기록되었습니다(20).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왕노릇하고 싶어합니다. 가정에서 왕노릇하고 싶어합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왕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권좌에 올라 통치하고 권세를 부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왕이 되셨습니까?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는 구원의 왕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생명을 받고 구원의 은혜를 받았지만 항상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그렇게 많은 사랑과 섬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항하고 죄악된 행동을 할 때 징계를 합니다. 그러나 징계를 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받지만 반복해서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죄악된 자녀에 대해서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된 우리가 죄악된 행동을 반복하지만 여전히 용서하시고 성장하도록 섬겨주십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아도 변화된 삶이 잠깐 뿐이지만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겔39:25). 우리가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주님께서 죄악된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다스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 이루었다(29-30) : 이 후에 모든 일이 이룬 줄을 아신 예수님은 “내가 목 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에서 해면을 적셔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아담 이래 모든 사람의 죄로 인한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시고 우리 인생들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루셨다는 뜻입니다. 시 7:11절에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쏟아 부어야 할 그 분노를 예수님께 부으셨습니다. 루터는 자기가 만일 하나님이었다면 인류를 매일 수없이 죽여 버려야 했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인간의 실존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를 통해 우리를 보시며 타오르는 분노가 누그러뜨리십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향한 긍휼로 불타오르십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히9:12). 구약시대에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구속이요, 온전치 못한 속죄였습니다. 이는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솔로몬이 제 아무리 일천번제를 드렸다 한들 그것이 온전한 속죄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한 사람의 죄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습니까?(히9:13,14). “다 이루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완전히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도 완벽하게 사해졌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성전의 모든 제사 의식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희생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끊어졌던 관계성의 다리가 완벽하게 복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실 때에 성전의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하시는 이 예수님의 음성은 죄에 대한 해방의 선언이요,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일어난 회복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정죄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내가 죄 짐을 지고 고통하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값을 다 치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과 그 의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나의 모든 괴롭고 무거운 죄의 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우리는 참 자유와 안식과 쉼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36:31절에서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이기심이 미워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미워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안일이 미워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교만과 정욕이 미워집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나의 더러운 말들, 욕하는 말들이 미워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고난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충성스러우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사역을 끝내시는 예수님은 기쁨의 외침을 외치셨습니다. 사명의 길을 마치신 예수님의 앞에는 부활과 승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학생으로서 져야 할 십자가, 평신도 목자로서 져야 할 십자가, 어머니요 아내요 사모로서 져야 할 십자가, 풀타임 목자로서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단으로서 져야 할 십자가도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보다 자기 생각이 앞서게 되면 십자가는 더욱 무겁게 느껴집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가기가 어렵습니다. 십자가는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동역을 하려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사람을 훈련시키려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섬기는 생활을 하려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사실 마음을 다해서 섬기고자 하면 자기가 죽어납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다가 감정대로 행하면 사랑의 관계성이 깨집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또 내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표가 나지 않으면 섬길 마음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속 역사의 작은 모퉁이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우리가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이라도 한번 맡았으면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끝마무리가 확실한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셋째,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31-42) : 유대인들은 이 날이 예비일로서 안식일의 큰 날이었기 때문에 부정을 타지 아니하고 잔치 상을 먹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말고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했습니다. 군병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예수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이 피는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대로였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 이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 의롭게 하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또 이 물은 우리로 하여금 위로부터 다시 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요3:3,5). 야곱의 우물물과 달리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생수입니다(요4:14). 이 물은 요7:38절에서 예언한 대로 “우리 배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물은 하나님의 영,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영광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졌습니다(요7:39, 16:7).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예수님의 영광 받으심과 동시에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죄사함을 받게 하는 제사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게 한 사건입니다. 이제 이 성령의 생수가 예수님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메마른 우리의 심령을 적시고 황량한 온 세상을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두려움이 많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변화되었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믿음을 숨겼는데 이 일 후에 담대해져서 빌라도더러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했습니다. 그는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습니다. 일찍 예수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기에 모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허무한 인생을 의미있는 인생으로, 방황하던 사람을 목표와 비전의 사람으로, 안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열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바꾸어 가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요 왕이십니다. 우리 인생들의 죄와 아픔과 수치를 말없이 담당하시는 사랑의 왕이 되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심으로 화평의 왕이 되십니다. 저희들이 이 예수님을 나의 평생의 왕으로 모시고 섬기고 살아가므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9:1-42
요절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우리는 오늘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 사건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달고 죽으셨습니다. 왜 유대인의 왕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 죽어야 했을까요? 그 왕이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이런 의문들을 풀어보고 정말 복된 소식이 무엇인지 마음에 새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유대인의 왕(1-28) :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에 의해서 무죄임이 드러났습니다(18:38). 그러면 당연히 석방을 해야 하지만 빌라도는 정치가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예수님께 채찍질을 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알몸으로 온 몸에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꾹 눌러 씌웠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이마에는 굵은 가시들이 박히면서 핏방울이 맺히고 흘러내렸습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군병들은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조롱했습니다.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그들은 평안을 구하면서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후려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잠잠히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밖에 나가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4).” 예수님은 채찍에 맞은 처참한 몸과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자기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는 기꺼이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오셨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빌라도는 자신을 왕으로 내세운다고 고소한 이 사람을 보라,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가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힘없는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동정을 얻어 풀어주고자 했는데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벌써 세 번째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석방해야 했지만 자기의 정치 생명과 장래를 위해서 백성들의 불의한 요구에 타협을 했습니다. 빌라도는 폭도로 변한 군중들이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는 재판관으로서 중심을 잡지 못했습니다.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백성들의 무리한 요구에 대책없이 맡겨버렸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만한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는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25억의 크리스챤들이 그의 죄를 되뇌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머리를 쓰다가 유대인들에게 말려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도 법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우리 법대로 하면 마땅히 처형되어야 합니다.” 하고 우겨댔습니다(7).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지난 밤 아내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그 죄 없는 사람에게 상관하지 마세요. 지난 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어요(마 27:19).”
빌라도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너는 어디로서냐?”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더 진지하게 심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은 그가 현재 받으시는 고통이 아버지의 뜻에 대한 복종임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주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마26:63,64). 그러나 빌라도가 주님께 질문했을 때에는, 빌라도가 자신이 묻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는 메시아에 대한 개념이나 그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빌라도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안달이 나서 재촉했습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이는 빌라도의 허세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사실 상황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났습니다.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권세를 자랑하는 빌라도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11).”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빌라도보다 유대인들의 죄는 더 컸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으려고 힘썼지만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으면 예수님과 함께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정치가인 빌라도는 난감했습니다. 그는 다시 예수님을 끌고 나와서 박석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14a절을 보십시오. “이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로마 시간으로 육시란 정오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시점에서 그날 저녁에 먹을 유월절 만찬을 위해서 제사장들이 성전 마당에서 유월절 양을 도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유월절 양으로 죽으시는 것입니다(1:29). 이로 인해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방인인 빌라도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에게 “보라 너희 왕이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광분하여 소리질렀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예수님은 왕으로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빌라도는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물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맺은 시내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 백성을 구원하사 자유를 주고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 소망을 두셨습니다.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자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옛 언약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파기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반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왕노릇을 해왔습니다. 자기들이 계속해서 왕노릇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극악무도한 죄로 인해 그들은 70년에 멸망을 당하고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방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반역으로 인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 시내 언약이 파기되고 새 언약의 역사가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구약의 마침이며 신약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입니다. 그 언약의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백성이 창조되고 하나님의 새 백성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의 반역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율법대로 속죄 제사로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시달리셨기 때문에 여러 번 쓰러지셨습니다. 그의 온 몸은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치 않고 골고다에 오르셨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자기의 죄 때문에 지는 십자가이지만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가장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인류의 죄가 다 그 십자가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골고다를 오르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왕들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기의 영화와 권세와 부귀를 자랑하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구원의 왕이십니다. 그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그는 메시아로서 과업을 완성하고 왕으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수난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정체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네 짐승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네 짐승은 다가올 네 제국과 그 왕들을 상징했습니다. 그 제국은 바벨론, 페르샤, 헬라,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나님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었습니다(단7:14). 다니엘이 본 환상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왕이시요 영원한 통치자이십니다. 이 사실을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도록 예수님의 죄패에는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기록되었습니다(20).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왕노릇하고 싶어합니다. 가정에서 왕노릇하고 싶어합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왕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권좌에 올라 통치하고 권세를 부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왕이 되셨습니까?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는 구원의 왕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생명을 받고 구원의 은혜를 받았지만 항상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그렇게 많은 사랑과 섬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항하고 죄악된 행동을 할 때 징계를 합니다. 그러나 징계를 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받지만 반복해서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죄악된 자녀에 대해서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된 우리가 죄악된 행동을 반복하지만 여전히 용서하시고 성장하도록 섬겨주십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아도 변화된 삶이 잠깐 뿐이지만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겔39:25). 우리가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주님께서 죄악된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다스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 이루었다(29-30) : 이 후에 모든 일이 이룬 줄을 아신 예수님은 “내가 목 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에서 해면을 적셔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아담 이래 모든 사람의 죄로 인한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시고 우리 인생들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루셨다는 뜻입니다. 시 7:11절에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쏟아 부어야 할 그 분노를 예수님께 부으셨습니다. 루터는 자기가 만일 하나님이었다면 인류를 매일 수없이 죽여 버려야 했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인간의 실존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를 통해 우리를 보시며 타오르는 분노가 누그러뜨리십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향한 긍휼로 불타오르십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히9:12). 구약시대에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구속이요, 온전치 못한 속죄였습니다. 이는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솔로몬이 제 아무리 일천번제를 드렸다 한들 그것이 온전한 속죄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한 사람의 죄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습니까?(히9:13,14). “다 이루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완전히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도 완벽하게 사해졌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서 더 이상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성전의 모든 제사 의식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희생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끊어졌던 관계성의 다리가 완벽하게 복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실 때에 성전의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하시는 이 예수님의 음성은 죄에 대한 해방의 선언이요,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일어난 회복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정죄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내가 죄 짐을 지고 고통하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값을 다 치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과 그 의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나의 모든 괴롭고 무거운 죄의 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우리는 참 자유와 안식과 쉼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36:31절에서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이기심이 미워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미워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안일이 미워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나의 교만과 정욕이 미워집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나의 더러운 말들, 욕하는 말들이 미워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고난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충성스러우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사역을 끝내시는 예수님은 기쁨의 외침을 외치셨습니다. 사명의 길을 마치신 예수님의 앞에는 부활과 승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학생으로서 져야 할 십자가, 평신도 목자로서 져야 할 십자가, 어머니요 아내요 사모로서 져야 할 십자가, 풀타임 목자로서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단으로서 져야 할 십자가도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보다 자기 생각이 앞서게 되면 십자가는 더욱 무겁게 느껴집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가기가 어렵습니다. 십자가는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동역을 하려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사람을 훈련시키려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섬기는 생활을 하려면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사실 마음을 다해서 섬기고자 하면 자기가 죽어납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다가 감정대로 행하면 사랑의 관계성이 깨집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또 내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표가 나지 않으면 섬길 마음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속 역사의 작은 모퉁이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우리가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이라도 한번 맡았으면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끝마무리가 확실한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셋째,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31-42) : 유대인들은 이 날이 예비일로서 안식일의 큰 날이었기 때문에 부정을 타지 아니하고 잔치 상을 먹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말고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했습니다. 군병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예수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이 피는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대로였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 이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 의롭게 하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는 효력이 있습니다. 또 이 물은 우리로 하여금 위로부터 다시 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요3:3,5). 야곱의 우물물과 달리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영생수입니다(요4:14). 이 물은 요7:38절에서 예언한 대로 “우리 배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물은 하나님의 영,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영광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졌습니다(요7:39, 16:7).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예수님의 영광 받으심과 동시에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이는 믿는 자에게 죄사함을 받게 하는 제사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게 한 사건입니다. 이제 이 성령의 생수가 예수님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메마른 우리의 심령을 적시고 황량한 온 세상을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두려움이 많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변화되었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믿음을 숨겼는데 이 일 후에 담대해져서 빌라도더러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했습니다. 그는 빌라도의 허락을 받고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습니다. 일찍 예수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기에 모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허무한 인생을 의미있는 인생으로, 방황하던 사람을 목표와 비전의 사람으로, 안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열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바꾸어 가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요 왕이십니다. 우리 인생들의 죄와 아픔과 수치를 말없이 담당하시는 사랑의 왕이 되십니다. 죄 없으신 분이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심으로 화평의 왕이 되십니다. 저희들이 이 예수님을 나의 평생의 왕으로 모시고 섬기고 살아가므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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