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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06jn28(18:1-40) 내가 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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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262회 작성일 06-11-12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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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요한복음 제 28 강                                                       
말씀 요한복음 18:1-40
요절 요한복음 18:37

내가 왕이니라
“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진리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진리를 선포하시며 진리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는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당하시면서도,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면서도 왕으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보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자 선한 증거를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왕되신 예수님을 깊이 알고 경배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검보다 하나님의 잔을 택한 예수님(1-12) : 예수님은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셨습니다.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거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님을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그곳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하실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다 알고 있는 그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당당히 나아가셨습니다. 이때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왔습니다. 이 군대에 천부장이 낀 것을 볼 때 600명으로 구성된 로마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나왔습니다. 강도를 잡는 것같이 하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환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으면 백성들의 민요가 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지나고 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지만 그것이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서 일은 갑작스럽게 빨리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은 무장을 했지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나섰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칠 고난이 무엇인가 다 아셨습니다. 그는 체포당하고 심문받으시고 조롱과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골고다에 올라가 십자가 위에서 저주스럽게 죽을 일을 아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할 고난과 수치와 멸시를 아셨지만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찾는 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나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하는 충성심과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선한 목자의 심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이 닥치는 것을 알면 피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도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후에 있을 영광스러운 부활을 바라보시며 나아가셨습니다. 우리도 고난 뒤에 있을 영광을 생각한다면 적극적으로 고난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학생으로서 학업을 감당하기 위해 따르는 고난을 이겨낼 때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입니다. 목자로서 양을 치기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훌륭한 목자를 키울 수 있습니다. 말씀의 종으로서 말씀을 파는 수고가 있어야 말씀의 생수를 길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 뒤에 있는 승리를 확신할 때 담대하게 문제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원수들 편에 가서 함께 서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신임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에 대한 욕심과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사단에게 붙잡혀서 예수님을 대적들에게 은 30을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그는 진리보다 자신의 장래와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스승을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악한 의도를 숨기고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다가왔습니다(마26:49).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는 참으로 가증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와 달리 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체포하는 장면을 언급하지 않고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을 기록함으로써 왕되신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군인들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그들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내로라.”는 말씀은 출3: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자기 선포를 의미합니다. 원수들은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에 눌려 물러서며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같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 이들을 꼬실라 버릴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은 중무장을 했지만 그들은 어두움의 세력이었습니다. 겉보기에 대단해 보이지만 실은 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의 왕으로서 당당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이 가신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제자들을 매우 아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순간에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얼떨결에 검을 휘둘렀는데 대제사장의 종의 머리를 자르지 못하고 오른편 귀만 베어버렸습니다. 베드로가 어부로서 회 뜨는 일은 잘했지만 군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셨습니다.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을 말리고자 했습니다. 그는 평소와 같이 무조건 일을 저지르면 예수님께서 뒷감당을 해 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은 참으로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검을 쓰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합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완성하셔야 하는 예수님의 영적인 싸움을 혈과 육의 싸움으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개죽음을 당한다면 구속 역사를 망쳐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지금이 어떤 때인지 때를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혈기와 감정에 기초해서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는 자신은 속이 시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이었습니다. 검은 힘을 상징합니다. 검은 강해 보입니다. 결과가 금방 나타납니다. 말고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귀가 떨어져 나간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베드로가 나중에 당하게 되었습니다. 검은 반드시 검을 부릅니다. 검을 쓰는 자는 복수의 악순환이라는 고리에 걸려들어 결국 망하게 됩니다. 우리도 생활하면서 검을 휘두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방법이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분으로 살지 말고 뜻으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유다의 배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 대제사장 때문에, 저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는 분노와 미움, 판단하는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을 마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잔을 마시는 것은 연약해 보입니다. 겉으로 볼 때 답답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잔을 마시는 방법이 약해보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함께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영 더 되는 천군천사들을 동원하여 앞에 있는 군대를 쓸어버릴 수 있었지만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잔을 마시고자 했습니다. 사람은 다 기쁨의 잔, 승리의 잔, 축복의 단 잔을 마시기 원하지,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몸에 좋은 한약도 입에 쓰기 때문에 잘 안 마실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꺼이 이 죽음의 쓴 잔을 드시고자 결단하실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고 죽어야만 인류의 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구원을 위해서 만세전부터 예비해 놓으신 구원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죽음의 쓴 잔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잔을 자신에게 내리신 하나님께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거나 서운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잔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믿고 내리신 잔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마시라고 주실 수 없는 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내게 맡기신 잔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다른 잔도 아니고 죽음의 잔을 주시는데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이라고 말하고 영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아버지가 영광의 잔을 주고, 축복을 주면 자랑스럽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죽음의 잔을 내어 미는데 그것을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처음에는 쉽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잔을 영접하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 잔은 비극의 잔이요 슬픔의 잔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이 잔은 사랑의 잔이요 사명의 잔이요, 진리의 잔입니다. 예수님은 그 잔이 자신에게는 죽음의 잔이지만 온 인류에게는 구원의 잔이요, 생명의 잔임을 아셨기 때문에 기꺼이 그 잔을 드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진리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예수님은 스스로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잔을 마셨습니다. 

  우리도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잔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새벽을 깨워서 기도하는 기도의 잔, 전도의 잔, 제자 양성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무리를 키우는 것보다 제자 양성을 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많은 희생이 요구됩니다. 목자가 양들과 함께 뛰어야 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 부인을 하지 않으면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주신 잔을 마실 때 당장은 죽을 것 같지만 그 열매는 달고 영광스럽습니다. 여러분이 마셔야 하는 하나님이 주신 잔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을 이기는 유익한 길은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의 세 번 부인(13-27) :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은 체포한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요한이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며 따졌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아니야 난 아니야’하고는 얼른 들어갔습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어 춥다’하면서 슬쩍 숯불 가까이로 다가가 함께 서서 불을 쬐었습니다.

  한편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교훈에 대해서 대답하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은 진리를 항상 공개적으로 자신있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복음 진리는 세계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섰던 종 하나가 대제사장에게 과잉 충성하여 손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따지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지금 밤이기 때문에 불법 심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무엇인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때리는 것도 불법입니다. 그들이 거짓되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진리가 있으므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는 이전 대제사장 안나스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안나스는 할 말이 없으니까 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고 있는데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또 부인했습니다. “나는 아니라.” 그러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였습니다. 그가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못하였느냐!” 베드로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 번째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을 참다 못한 닭이 곧 울었습니다. “꼬꼬댁 꼬꼬댁, 베드로야 그럴 수 있느냐? 회개하라.” 

  그러면 주와 함께 죽기까지 하겠다던 천하의 베드로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말로는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려움이 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권면을 따라서 기도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하였을 때 자기도 모르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사단의 역사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반항 한번 하지 않고 체포당하시는 것을 보고 두려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하지 않으면 본성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상황에 끌려다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상황의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베드로를 볼 때 우리는 인간적인 의리와 충성심만으로는 믿음의 중심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그러므로 저희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므로 믿음과 용기를 덧입고 승리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장시간 기도하셨던 것처럼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진리의 왕 예수님(28-40) : 저들이 예수님을 가야바에게로 끌고 가니 새벽이었습니다.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법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이방인과 교제함으로 더럽힘을 받지 않으려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사악하고 위선적인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그러자 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종교 문제에 대해 관대했습니다. 황제를 모독하거나 반역을 일삼지 않는다면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유대법대로 돌에 맞아죽는 일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되어지는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는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바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억지로 일을 만들려고 달려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훈련을 받으라고 하시면 훈련을 받고, 고난을 받으라고 하시면 고난을 받고, 작은 일을 하라고 하시면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마음으로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고소 내용을 보고 의아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가 왕일 수 있을까? 그는 예수님을 조소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빌라도를 돕고자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빌라도에게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질문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가 무엇인가 심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어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 속에 있고 또 교회를 통해서 가시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라의 속성이 어떠한지 말씀하셨습니다. 37b절을 보십시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이 세상에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와 사랑, 평화로 다스립니다. 이 세상은 권모술수가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정사와 권세의 속성은 마귀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임금을 마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캠퍼스에서 친구들에게, 직장의 동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왕으로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고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를 듣는다고 말씀하시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는 진리를 진정으로 알고자 물은 것이 아니라 진리가 다 뭐냐, 진리가 대수냐 하면서 자신은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도리어 유대인들에게 나아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그러면 무죄석방을 해야죠. 그런데 그는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백성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죄가 없는 예수님을 당연히 석방해야 했지만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타협을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인정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백성들은 강도 바라바를 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빌라도는 역사에 길이 남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현실적인 유익 때문에 진리되신 예수님을 버리고 파멸의 길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처럼 진리에 기초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진리는 많이 배움으로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진실을 추구할 때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것보다는 자신을 비울 때 진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우리가 자기를 비워 진리되신 예수님을 배우고 진리의 왕국을 소망하며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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