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6jn27(17:1-26) 거룩하게 하옵소서
페이지 정보

본문
2006년 요한복음 제 27 강
말씀 요한복음 17:1-26
요절 요한복음 17:17
거룩하게 하옵소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제자들 이후에 올 신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합니다. 또 본문을 복음서의 지성소라고 합니다. 이 기도는 역사상 드려졌던 기도 중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기도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나타나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바다보다 넓고 깊습니다. 그의 기도는 웅장합니다. 우주적입니다. 멜다 미론은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드린 이 기도보다 더 높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들린 적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마땅히 어떤 소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가를 말한다면 17장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드린 기도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잘 배워서 이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5) : 예수님은 이제까지 제자들을 주옥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모든 문제를 떠나 하나님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난만 묵상하면서 힘들어 하지 않고 진정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앞에 감당키 어려운 고난이 있습니까? 마음을 짓누르고 힘들게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내 앞에 놓여 있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들 앞에서 예수님처럼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 17장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39번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다가온 줄 아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후회스러운 말들을 많이 합니다. 힘든 현실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소원은 바로 아버지의 소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비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은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왕으로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지옥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진리를 파악하는 이성적인 앎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사귐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정확히 알아야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크리스챤이 가진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지식이 아니라 샤마니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매우 운명적인 삶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안다는 것은 계속적이고 역동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생이란 단순히 영원토록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행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영생을 맛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고행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까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 즉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속 역사를 성취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에게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원이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20,2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린도 후서 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9절에서는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꿈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가 삶과 죽음을 초월한 불사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불타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하고 열정적이 되게 하는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순수한 소원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잘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구실 아래 자기 잘 되는 일에만 열심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해서 자신의 영광을 구합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에는 이를 외면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십자가를 진다고 해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목적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꿈과 욕심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 깊숙한 곳에 자기를 존귀하게 하고자 하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기 보다는 나는 어떻게 되는가에 마음이 자꾸 가지는 않습니까? 이는 모두 죄악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분명한 인생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이 무엇인가 깊이 깨닫고 전심으로 감당해야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인가 발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은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대학생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요 영적 지도자로 키우는 일입니다. 이 일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또 이 일을 하고자 온 생애를 드린 우리 목자님들은 얼마나 귀한 분들입니까! 우리 풀타임 자매 목자님들은 젊었을 때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도 많이 있지만 가장 귀한 보화 되신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전심으로 하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목자님들이 여러 모양의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주님의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님들의 삶을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5).
둘째, 제자들의 거룩함과 하나됨을 위한 기도(6-19) :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제자들 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실제 삶을 통해서 제자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받고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7,8).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중한 보배와 같이 여기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의 출신 성분은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세리 출신이 있었는가 하면, 운동권 출신 열혈당원들이 있었고, 또 대부분 배우지 못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지상 메시야 왕국을 이룰 줄 알고 거기서 서로 영의정 좌의정 하겠다고 다툰 것을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못난 점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도움이 되거나,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이런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이용 가치로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귀한 사람들’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오래 참으셨고, 유난히 냄새가 많이 나는 그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습니다. 또 18장을 보면 자신이 위기를 당할 때에도 자기보다 먼저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십니다.
사랑이란 그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그를 보는 것입니다. 또 그의 인간 조건보다도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섬김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양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불렀습니다(빌 4:1). 바울은 자기 양들을 그렇게 귀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그의 양들을 이렇게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지극하게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제자들은 귀한 사람들로 자라 복음 역사를 섬기는 종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가야 하는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히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리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에 양과 같은 제자들을 남겨두고 가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이들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보전해 주시고 그들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세상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자 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핍박을 받습니다. 게다가 세상에 살면 세상의 영향을 받아 죄에 빠지기도 하고, 그들과 부딪치다가 지쳐서 믿음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피하여 어디 산 속에라도 들어가서 홀로 믿음만 지키며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힘든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세상에 도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도전하여 죄를 회개시키고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도피하기보다 세상에 도전하고, 세상의 악과 싸워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세상에서 보전되고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단은 강하며, 또 기회 포착의 명수입니다. 제자들이 흩어지면 각개 격파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가 될 때 사단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 될 때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 앞에서 사단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십니다.
둘째로,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결코 세상에서 보전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전될 수 있습니까? 17절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전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들이 깨끗하게 되고 세상 소망들이 잘라져 나갑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119:9).”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함을 덧입기 위해서 말씀 투쟁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소감을 쓰는 것은 거룩한 생활을 위한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를 잘 감당함으로써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전되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여 함이니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죄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세상에 보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선교사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있는 곳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거룩한 삶을 살 때 자녀들과 양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셋째, 모든 신자들을 위한 기도(20-26) : 예수님은 제자들만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희 말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어지간해서는 하나가 되기 어렵습니다. 죄인들의 특성은 남을 판단하는데 빠르고 교만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비록 잘 못할지라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열심히 판단하고 요구합니다. 또한 죄인들은 항상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이런 죄인들인 우리가 하나 되고자 할 때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날마다 의지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교만과 이기심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 사랑없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지만 우리 죄인들을 위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겨주셨습니다.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배울 때 심령이 새로워지고 겸손해지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사랑하사 그들이 보전되고 거룩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또 믿는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깊이 영접하고 그 기도를 이루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하면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7:1-26
요절 요한복음 17:17
거룩하게 하옵소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제자들 이후에 올 신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합니다. 또 본문을 복음서의 지성소라고 합니다. 이 기도는 역사상 드려졌던 기도 중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기도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나타나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바다보다 넓고 깊습니다. 그의 기도는 웅장합니다. 우주적입니다. 멜다 미론은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드린 이 기도보다 더 높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들린 적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마땅히 어떤 소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가를 말한다면 17장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드린 기도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잘 배워서 이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5) : 예수님은 이제까지 제자들을 주옥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모든 문제를 떠나 하나님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난만 묵상하면서 힘들어 하지 않고 진정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앞에 감당키 어려운 고난이 있습니까? 마음을 짓누르고 힘들게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내 앞에 놓여 있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들 앞에서 예수님처럼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 17장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39번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다가온 줄 아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후회스러운 말들을 많이 합니다. 힘든 현실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소원은 바로 아버지의 소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비우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은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왕으로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지옥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진리를 파악하는 이성적인 앎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사귐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정확히 알아야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크리스챤이 가진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지식이 아니라 샤마니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매우 운명적인 삶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안다는 것은 계속적이고 역동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생이란 단순히 영원토록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행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영생을 맛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고행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까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 즉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속 역사를 성취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면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에게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원이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20,2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고린도 후서 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9절에서는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꿈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가 삶과 죽음을 초월한 불사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불타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하고 열정적이 되게 하는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순수한 소원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잘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구실 아래 자기 잘 되는 일에만 열심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해서 자신의 영광을 구합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에는 이를 외면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십자가를 진다고 해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목적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꿈과 욕심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 깊숙한 곳에 자기를 존귀하게 하고자 하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기 보다는 나는 어떻게 되는가에 마음이 자꾸 가지는 않습니까? 이는 모두 죄악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분명한 인생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이 무엇인가 깊이 깨닫고 전심으로 감당해야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인가 발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은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대학생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요 영적 지도자로 키우는 일입니다. 이 일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또 이 일을 하고자 온 생애를 드린 우리 목자님들은 얼마나 귀한 분들입니까! 우리 풀타임 자매 목자님들은 젊었을 때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도 많이 있지만 가장 귀한 보화 되신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전심으로 하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목자님들이 여러 모양의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주님의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님들의 삶을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5).
둘째, 제자들의 거룩함과 하나됨을 위한 기도(6-19) :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제자들 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실제 삶을 통해서 제자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받고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7,8).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중한 보배와 같이 여기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의 출신 성분은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세리 출신이 있었는가 하면, 운동권 출신 열혈당원들이 있었고, 또 대부분 배우지 못한 어부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지상 메시야 왕국을 이룰 줄 알고 거기서 서로 영의정 좌의정 하겠다고 다툰 것을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못난 점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도움이 되거나,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이런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이용 가치로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귀한 사람들’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오래 참으셨고, 유난히 냄새가 많이 나는 그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습니다. 또 18장을 보면 자신이 위기를 당할 때에도 자기보다 먼저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십니다.
사랑이란 그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그를 보는 것입니다. 또 그의 인간 조건보다도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섬김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양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불렀습니다(빌 4:1). 바울은 자기 양들을 그렇게 귀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그의 양들을 이렇게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지극하게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제자들은 귀한 사람들로 자라 복음 역사를 섬기는 종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가야 하는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간절히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리떼가 득실거리는 세상에 양과 같은 제자들을 남겨두고 가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이들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보전해 주시고 그들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세상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자 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핍박을 받습니다. 게다가 세상에 살면 세상의 영향을 받아 죄에 빠지기도 하고, 그들과 부딪치다가 지쳐서 믿음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피하여 어디 산 속에라도 들어가서 홀로 믿음만 지키며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힘든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세상에 도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도전하여 죄를 회개시키고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도피하기보다 세상에 도전하고, 세상의 악과 싸워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세상에서 보전되고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단은 강하며, 또 기회 포착의 명수입니다. 제자들이 흩어지면 각개 격파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가 될 때 사단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 될 때 성령이 역사하고, 성령 앞에서 사단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십니다.
둘째로,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결코 세상에서 보전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전될 수 있습니까? 17절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전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들이 깨끗하게 되고 세상 소망들이 잘라져 나갑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119:9).”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함을 덧입기 위해서 말씀 투쟁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소감을 쓰는 것은 거룩한 생활을 위한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를 잘 감당함으로써 세상에서 거룩하게 보전되고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여 함이니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죄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세상에 보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선교사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있는 곳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해서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거룩한 삶을 살 때 자녀들과 양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셋째, 모든 신자들을 위한 기도(20-26) : 예수님은 제자들만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희 말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어지간해서는 하나가 되기 어렵습니다. 죄인들의 특성은 남을 판단하는데 빠르고 교만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비록 잘 못할지라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열심히 판단하고 요구합니다. 또한 죄인들은 항상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이런 죄인들인 우리가 하나 되고자 할 때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날마다 의지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교만과 이기심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 사랑없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지만 우리 죄인들을 위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겨주셨습니다.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배울 때 심령이 새로워지고 겸손해지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사랑하사 그들이 보전되고 거룩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또 믿는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깊이 영접하고 그 기도를 이루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도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하면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06jn27.hwp (0byte)
79회 다운로드 | DATE : 2006-11-05 09:14:5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