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6 강(3:7-35) 열둘을 세우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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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봄 마가복음 제 6 강
말씀 마가복음 3:7-35
요절 마가복음 3:14,15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은 큰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많은 병자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사역이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아시고 제자 양성을 하고자 방향 전환을 하셨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자신이 다시 사역을 시작할 수 있다면 여행을 줄이고 공부를 더 하며, 대중 전도보다 제자 양성에 헌신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제자들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깊은 경륜을 깨닫고 이 일에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뜻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섬기던 당시 백성들을 인도하고 섬겨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타락하고 사단의 도구가 되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인생 문제로 고통하고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구름떼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무엇을 하고자 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여기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란 평소에 ‘마음에 두었던 자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예수님의 마음에 두었던 자들,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원하신다.’ 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 때 이것은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입니까? 예수님은 광대한 우주만물과 우리 인간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오 왕이 되사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일찍이 나를 마음에 두셨고 예수님의 제자요 영적 지도자로 뽑기를 원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럽고 놀라운 일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디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상처를 받고 열등감과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며 고통합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많이 있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온갖 눈물겨운 노력을 다 합니다. 다른 이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를 지으시고, 그를 구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않고서는 그 누구의 인정을 받아도 참된 만족은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셔서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아시고 원하시고 불러주셨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이 나를 원하지 않았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고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하나님이 마음에 두시고 원하신 귀하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열두 제자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우리는 마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태는 원래 세리 레위였는데 그를 원하던 사람은 그를 이용해서 세금을 걷었던 로마 관리나 그의 단골 술집 마담 밖에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출교시켜버림으로 회당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지 못하게 했고 그와 식사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고 그의 등 뒤에서 온갖 욕설과 험담을 퍼부었습니다. 오늘날이었다면 아마 그는 자살사이트를 열심히 뒤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이 원하시고 제자로 뽑아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은혜와 사랑과 소망이 충만하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뜻을 두고 부르셨습니다(사49:1-5).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 전부터 뜻을 두고 부르셨습니다(엡 1:4). 하나님은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나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한없이 연약하고 우리의 죄성이 끈질기고 지독할지라도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책임지시고 변화시키시고 온전하게 해 주십니다. 로마서 11:29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열두 제자들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13b절을 보십시오. “나아온지라.” 이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함으로 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나를 원하시고 부르실 때 즉각적으로, 감사함으로, 순종함으로 응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은 열둘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계승자들이요, 새 이스라엘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전세계 구원역사의 주역들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열두 제자를 키우고자 하셨습니까?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만큼 친구가 주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다 보면 그 사람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사람과 비슷해지게 됩니다. 말씨도 비슷해지고 기호도 닮게 되고 가치관도 비슷해집니다. 제자들은 삼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의 섬김, 전도하시는 예수님, 한 영혼을 목숨을 걸고 끝까지 감당하시는 모습 등등.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영적인 가치관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고난을 배우고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신자의 삶, 제자의 삶은 일생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배워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매주 주일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고 기도하며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은혜요 특권인지요.
둘째, 전도하게 하려고 부르셨습니다.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여기서 ‘보낸다’는 것은 ‘전권대사’로 보낸다는 뜻입니다. 복음 전도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주의 총사령관이신 예수님의 권세를 위임받아 세상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의 신분은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홍익대학교의 영적인 대사로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우리가 홍익대에 나가서 전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대사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홍익대생들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고 인생의 길이 됩니다. 생명을 줍니다. 벧전 2:9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번에 배사라 선교사님이 광주를 방문했을 때에 한 목사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배사라선교사님께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연거푸 감사를 표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8년 전, 1959년에 배사라 선교사님이 UBF 역사를 시작하기 직전에, 주로 지방 순회전도를 다니셨습니다. 한 번은 나주에 있는 시골마을을 찾아가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때 만난 김정중이라는 그 청년은 폐결핵 3기 환자였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한 범죄조직에 가담하여 많은 죄를 짓고 수감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병을 얻어 폐결핵, 신경통 등 4개의 합병증으로 시달리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감옥에서도 살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고 집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요양이나 하다 죽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배사라선교사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서 전도를 하고 그 청년을 차에 태우고 와서 광주기독병원에 맡겼습니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기대를 하지 않고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사라선교사님이 기적도 있는 것이니까 믿고 한번 해 보자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사람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또한 그는 복음을 영접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영광에서 가장 큰 교회인 영광대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현재 광주에 있는 광신대학교이사장이십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배웠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그 미국 처녀 선교사가 시골마을까지 와서 다 죽어가는 청년에게 전도해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목사님은 축복을 많이 받아서 아들은 둘 다 지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목회를 하고 있고 딸은 검사요, 사위는 판사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의 전도가 이처럼 한 사람을 살리고 온 가정을 복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정치 이야기나 사업 이야기나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기보다 내가 체험한 예수님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것은 돈 버는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인 이야기입니다. 좀 더 근원적인 이야기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8:11-13).”고 했습니다. 지금 같이 정보전달 기술이 발달된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영적인 기갈에 걸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인터넷과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과 잡지, 책 등 수없이 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대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듣는 사람에게 맞는 말씀을 전하여 제대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번에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격 사건으로 32명이 죽었는데 조승희도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복음 신앙을 가르쳐 주고 함께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가 이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로 인터넷과 게임만 가까이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폭력적인 영화를 끼고 살았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도 없고 대화의 상대가 없었습니다.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어둡고 폭력적인 문화만 접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 생각이 온통 그런 것들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삭막한 도시에서 온통 죽고 죽이는 게임문화, 음란한 인터넷 영상, 폭력적인 영화를 너무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이런 사람은 은둔형 외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울분형 외톨이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자기를 폐쇄시키고 자기 속에서 미움과 분노를 키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폭력적인 만화, 잔인한 인터넷 게임, 판타지 소설의 범람, 가족 간 대화의 부재, 청년 실업 등으로 이런 은둔형 내지는 울분형 외톨이들이 점점 늘어간다고 합니다. 이를 생각할 때에 이 시대가 심히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목자 한 사람이 한 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선생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작은 일이지만 이 시대를 섬기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셋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대개 사람들은 인간이 불행한 이유가 돈이 없거나 학벌이 없거나 외모가 못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생 문제들 때문에 괴롭고 고통스런 삶을 산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근본적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죄와 악령의 세력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배후에 교묘하게 숨어 역사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괴시키고 미움과 불신을 심습니다. 교만한 생각을 심고 두려움과 불안을 심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안목의 정욕으로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합니다. 사람을 봐도 늘 외모로만 보게 하고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돈과 시간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붓게 합니다. 사탄은 또한 돈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돈을 인생 목적으로 삼도록 하고 돈을 섬기도록 하고 돈만 벌수 있다면 몸을 팔고, 사람도 서슴치 않고 죽이도록 합니다. 사탄은 또한 여러 가지 세상 욕심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들로 인해 괴로운 인생을 삽니다. 반발심의 영에 사로잡혀 겸손히 배우고자 하기보다는 항상 튕기고 반발만 하는 사람, 교만의 영에 사로잡혀 안하무인인 사람, 이기심의 영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항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 욕심의 영에 사로잡혀 욕심에 이끌려 사는 사람 등. 우리의 힘으로는 이런 악한 영들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단보다 더 강하신 예수님, 악령을 내어 쫓으시는 영적인 권세자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그리고 양들 안에 역사하는 악령의 세력을 분별하고 싸워 물리치는 영적인 권능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19절을 보십시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예수님이 원하시고 부르신 열두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어부들, 세리, 열혈당원, 무명인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장차 사도행전을 이룰 대사도가 될 비전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생명구원역사의 중요한 기둥들이요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들이요 성경선생이 될 소망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여러 가지 훈련도 해 주시고, 사랑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소망과 믿음대로 변화되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요 인류의 스승들로 쓰임 받았습니다. 별 볼일 없이 한 줌의 흙으로 허무하게 사라질 존재가 별과 같이 하나님 역사와 인류 역사에 영원히 빛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단12:3).
우리의 현재 모습은 연약하고 죄악되고 보잘 것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원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요 홍익대의 목자로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소망 가운데 키우시고 변화시키사 영광스럽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며 예수님이 주시는 훈련과 연단을 잘 받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자요 위대한 전도자요 악령을 내어 쫓는 권세있는 영적 지도자들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가복음 3:7-35
요절 마가복음 3:14,15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은 큰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많은 병자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사역이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아시고 제자 양성을 하고자 방향 전환을 하셨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자신이 다시 사역을 시작할 수 있다면 여행을 줄이고 공부를 더 하며, 대중 전도보다 제자 양성에 헌신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제자들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깊은 경륜을 깨닫고 이 일에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뜻을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섬기던 당시 백성들을 인도하고 섬겨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타락하고 사단의 도구가 되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인생 문제로 고통하고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구름떼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무엇을 하고자 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여기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란 평소에 ‘마음에 두었던 자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예수님의 마음에 두었던 자들,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원하신다.’ 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 때 이것은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입니까? 예수님은 광대한 우주만물과 우리 인간들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오 왕이 되사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일찍이 나를 마음에 두셨고 예수님의 제자요 영적 지도자로 뽑기를 원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럽고 놀라운 일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디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상처를 받고 열등감과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며 고통합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많이 있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온갖 눈물겨운 노력을 다 합니다. 다른 이에게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를 지으시고, 그를 구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않고서는 그 누구의 인정을 받아도 참된 만족은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셔서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아시고 원하시고 불러주셨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이 나를 원하지 않았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고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하나님이 마음에 두시고 원하신 귀하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열두 제자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우리는 마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태는 원래 세리 레위였는데 그를 원하던 사람은 그를 이용해서 세금을 걷었던 로마 관리나 그의 단골 술집 마담 밖에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출교시켜버림으로 회당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지 못하게 했고 그와 식사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고 그의 등 뒤에서 온갖 욕설과 험담을 퍼부었습니다. 오늘날이었다면 아마 그는 자살사이트를 열심히 뒤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이 원하시고 제자로 뽑아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은혜와 사랑과 소망이 충만하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뜻을 두고 부르셨습니다(사49:1-5).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 전부터 뜻을 두고 부르셨습니다(엡 1:4). 하나님은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되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나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한없이 연약하고 우리의 죄성이 끈질기고 지독할지라도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책임지시고 변화시키시고 온전하게 해 주십니다. 로마서 11:29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열두 제자들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13b절을 보십시오. “나아온지라.” 이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함으로 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나를 원하시고 부르실 때 즉각적으로, 감사함으로, 순종함으로 응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은 열둘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구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계승자들이요, 새 이스라엘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전세계 구원역사의 주역들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열두 제자를 키우고자 하셨습니까?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만큼 친구가 주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다 보면 그 사람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사람과 비슷해지게 됩니다. 말씨도 비슷해지고 기호도 닮게 되고 가치관도 비슷해집니다. 제자들은 삼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의 섬김, 전도하시는 예수님, 한 영혼을 목숨을 걸고 끝까지 감당하시는 모습 등등.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영적인 가치관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고난을 배우고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신자의 삶, 제자의 삶은 일생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배워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매주 주일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고 기도하며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은혜요 특권인지요.
둘째, 전도하게 하려고 부르셨습니다.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여기서 ‘보낸다’는 것은 ‘전권대사’로 보낸다는 뜻입니다. 복음 전도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주의 총사령관이신 예수님의 권세를 위임받아 세상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의 신분은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홍익대학교의 영적인 대사로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우리가 홍익대에 나가서 전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대사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홍익대생들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고 인생의 길이 됩니다. 생명을 줍니다. 벧전 2:9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번에 배사라 선교사님이 광주를 방문했을 때에 한 목사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배사라선교사님께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연거푸 감사를 표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8년 전, 1959년에 배사라 선교사님이 UBF 역사를 시작하기 직전에, 주로 지방 순회전도를 다니셨습니다. 한 번은 나주에 있는 시골마을을 찾아가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때 만난 김정중이라는 그 청년은 폐결핵 3기 환자였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한 범죄조직에 가담하여 많은 죄를 짓고 수감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병을 얻어 폐결핵, 신경통 등 4개의 합병증으로 시달리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감옥에서도 살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고 집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요양이나 하다 죽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배사라선교사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서 전도를 하고 그 청년을 차에 태우고 와서 광주기독병원에 맡겼습니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기대를 하지 않고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사라선교사님이 기적도 있는 것이니까 믿고 한번 해 보자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사람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또한 그는 복음을 영접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영광에서 가장 큰 교회인 영광대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현재 광주에 있는 광신대학교이사장이십니다. 저는 이를 통해서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배웠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그 미국 처녀 선교사가 시골마을까지 와서 다 죽어가는 청년에게 전도해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목사님은 축복을 많이 받아서 아들은 둘 다 지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목회를 하고 있고 딸은 검사요, 사위는 판사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의 전도가 이처럼 한 사람을 살리고 온 가정을 복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정치 이야기나 사업 이야기나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기보다 내가 체험한 예수님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것은 돈 버는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인 이야기입니다. 좀 더 근원적인 이야기를 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8:11-13).”고 했습니다. 지금 같이 정보전달 기술이 발달된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영적인 기갈에 걸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인터넷과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과 잡지, 책 등 수없이 많은 매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대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듣는 사람에게 맞는 말씀을 전하여 제대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번에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격 사건으로 32명이 죽었는데 조승희도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복음 신앙을 가르쳐 주고 함께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가 이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로 인터넷과 게임만 가까이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폭력적인 영화를 끼고 살았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도 없고 대화의 상대가 없었습니다.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어둡고 폭력적인 문화만 접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 생각이 온통 그런 것들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삭막한 도시에서 온통 죽고 죽이는 게임문화, 음란한 인터넷 영상, 폭력적인 영화를 너무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이런 사람은 은둔형 외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울분형 외톨이라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자기를 폐쇄시키고 자기 속에서 미움과 분노를 키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폭력적인 만화, 잔인한 인터넷 게임, 판타지 소설의 범람, 가족 간 대화의 부재, 청년 실업 등으로 이런 은둔형 내지는 울분형 외톨이들이 점점 늘어간다고 합니다. 이를 생각할 때에 이 시대가 심히 걱정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목자 한 사람이 한 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선생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작은 일이지만 이 시대를 섬기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셋째,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대개 사람들은 인간이 불행한 이유가 돈이 없거나 학벌이 없거나 외모가 못나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생 문제들 때문에 괴롭고 고통스런 삶을 산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근본적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죄와 악령의 세력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배후에 교묘하게 숨어 역사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괴시키고 미움과 불신을 심습니다. 교만한 생각을 심고 두려움과 불안을 심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안목의 정욕으로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합니다. 사람을 봐도 늘 외모로만 보게 하고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돈과 시간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붓게 합니다. 사탄은 또한 돈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돈을 인생 목적으로 삼도록 하고 돈을 섬기도록 하고 돈만 벌수 있다면 몸을 팔고, 사람도 서슴치 않고 죽이도록 합니다. 사탄은 또한 여러 가지 세상 욕심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모두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들로 인해 괴로운 인생을 삽니다. 반발심의 영에 사로잡혀 겸손히 배우고자 하기보다는 항상 튕기고 반발만 하는 사람, 교만의 영에 사로잡혀 안하무인인 사람, 이기심의 영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항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 욕심의 영에 사로잡혀 욕심에 이끌려 사는 사람 등. 우리의 힘으로는 이런 악한 영들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단보다 더 강하신 예수님, 악령을 내어 쫓으시는 영적인 권세자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그리고 양들 안에 역사하는 악령의 세력을 분별하고 싸워 물리치는 영적인 권능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19절을 보십시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예수님이 원하시고 부르신 열두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어부들, 세리, 열혈당원, 무명인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장차 사도행전을 이룰 대사도가 될 비전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생명구원역사의 중요한 기둥들이요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들이요 성경선생이 될 소망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여러 가지 훈련도 해 주시고, 사랑으로 키우셨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소망과 믿음대로 변화되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요 인류의 스승들로 쓰임 받았습니다. 별 볼일 없이 한 줌의 흙으로 허무하게 사라질 존재가 별과 같이 하나님 역사와 인류 역사에 영원히 빛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단12:3).
우리의 현재 모습은 연약하고 죄악되고 보잘 것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원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요 홍익대의 목자로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소망 가운데 키우시고 변화시키사 영광스럽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며 예수님이 주시는 훈련과 연단을 잘 받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자요 위대한 전도자요 악령을 내어 쫓는 권세있는 영적 지도자들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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