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5 강(2:18-3:6)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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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봄 마가복음 제 5 강
말씀 마가복음 2:18 - 3:6
요절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금식 문제와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상, 복음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소망을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가죽 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 금식에 대한 논쟁(18-20)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 금식했습니다. 본래 금식은 죄의 회개라든가, 민족이 당하는 슬픈 사건 예를 들면 예루살렘 포위, 예루살렘 함락, 성전 파괴 등을 겪고 나서 이를 잊기 않기 위해서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참된 금식은 죄를 끊는 진실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사 58:3-12). 그런데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의를 보이기 위해서 금식했습니다. 금식이 하나님을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따졌습니다. 그들은 지금 금식 중이라서 배가 고프고 힘이 없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즐기고 있는 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더구나 이런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더 중요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이스라엘에서 혼인잔치는 일주일씩 거행되었습니다. 이때는 금식기간이라도 금식이 면제되었습니다. 결혼식의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신랑에 비유합니다(사62:5).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구원하는 일을 그리스도와 양들을 중매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 11:2). 신랑은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기쁜 때입니다. 신앙생활은 금식하듯이 슬프고 비장하고 심각한 것이 아니라, 혼인잔치와 같이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마음껏 구원의 기쁨을 누리면 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20). 그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지금 우리는 굳이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욕심이나 다른 것을 신랑이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여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때에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너무 세상의 오락을 즐거워할 때 텔레비전 금식을 하든지, 인터넷 사용을 끊어서 경건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음으로 진실하고 사랑스럽고 감사가 충만하여 믿음의 향기를 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임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이 항상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21-22) : 예수님은 바른 금식에 대해 가르치신 후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을 붙여 놓으면 서로 상하기 때문에 붙이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 부대가 터져 버립니다. 그러면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 부대도 쓸모없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중풍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긍휼이 풍성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감화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욕쟁이를 경건한 사람으로, 원망과 불평하는 사람을 감사가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음란하고 정욕적인 사람을 성결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면 맹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듯이 하나님과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향기를 풍기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복음은 교만한 사울을 사도 바울로 변화시켜 이방의 빛으로 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백정이 예수님을 믿자 선교사들이 그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태도는 양반과 상놈이 존재하던 시절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이 퍼져나갔습니다. 양반과 상놈,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신앙 경륜이 쌓여도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깨어져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이 계속해서 변화되고 성장하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3. 안식일 논쟁(23-3:6) :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열면서 이삭을 잘랐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은 젊은데다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도록 환경을 만들고, 병자를 고치는 일을 섬기고, 그 밖에 섬겨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갈 수 없듯이 항상 배고픈 제자들은 밀밭을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밀알을 입 속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추수를 하고 탈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너무 예민해 보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에 관해서 39개조 234항의 세부 조항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율법적인 사람들의 공격을 받자 그들을 어떻게 변호하셨습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아비아달 부자가 함께 그곳에 있었고, 또한 함께 다윗의 무리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 아히멜렉은 사울의 손에 죽고 아들 아비아달이 그 대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마가는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자연스럽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진설병은 성소 안 떡상 위에 진열해 두는 거룩한 떡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따라 열 두 개의 떡을 두 줄로 진열했습니다(출 25;30, 레4:5-8). 그런데 다윗이 삼일을 굶고 있었기 때문에 아히멜렉은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물려낸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법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요 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안식일 법을 지켰으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되 율법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여기에 이해와 긍휼이 있고 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안식일의 참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은 쉼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상적인 일들을 쉬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즐겁고 기쁘게 찬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쉼이 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예수님의 뜻에 맞게 보내야 합니다. 그가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잘 지켜서 육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영적인 건강도 잘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안식일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참된 안식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잘 지키는 본을 3장 1-6절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한 손이 말라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두 손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시고 이 두 손을 사용하여 합심하고 동역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두 손으로 박수도 치고 피아노도 치고 권투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손이 말라버림으로 먹고, 옷을 입고, 교제하는 때에 불편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한 손 마른 것은 단순히 불편한 문제가 아니라 절박한 인생 문제였습니다. 그가 취직을 하려고 시험을 보면 필기시험에서는 합격이 되는데 면접시험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말이 나오면 상대방으로부터 참 잘 생겼다는 말을 듣고 기대를 갖지만 만나고 나서는 그들이 고개를 돌리곤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는 한쪽 손만 말랐는데 그의 인생 전체가 영향을 받아 못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한 손 마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인생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슬프고 억울하고 한스러운 인생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위축이 되고 다른 사람과 관계성을 잘 맺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를 받아 괴로워하고, 쉽게 오해를 하고, 사람을 미워합니다. 자기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시달리기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흘립니다. 깊은 열등감으로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학합니다.
한 손 마른 자를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이 사람을 보자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하셨습니다. 그가 마른 손이 고침을 받고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가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가정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로서 예수님을 삐딱하게 보고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이 사람을 미끼로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사단이 가득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고 연약한 이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살기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아셨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다음 기회에 고쳐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위기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예수님은 이 사람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루면서 바리새인들 까지 돕고자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안식일 규례가 그 자체를 지키는 것보다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것임을 알려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이 사람의 인생을 회복시켜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옳은 일에 목숨을 걸고자 하십니다. 그 시대의 불의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무엇이 옳은가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를 갈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낡은 가죽부대였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셨습니다. 완악한 마음이란 잘못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배우고 깨달으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노하지 않으십니다. 잘못을 알고서도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우리가 때마다 완악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영접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기 위해서는 자의식과 수치심을 깨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아픔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또 괜히 손을 내밀었다가 고침도 받지 못하고 창피만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특히 자존심이 깨어지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 도저히 내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손을 뒤로 감추고 회당을 뛰쳐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평생 한 손 마른채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몰래 고쳐주시든지 아니면 뒤로 가서 단둘이 고쳐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그가 분명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의 마른 손을 고쳐주는 것보다 그가 믿음을 갖고 내면이 치유 받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그가 어렵사리 손을 내밀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곧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만세를 불렀을 것입니다.
우리가 내밀어야 하는 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병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기심으로 병든 손, 감추어 두고 싶은 죄악,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오그라든 손, 자폐증적인 내면의 문제를 예수님께 내밀고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한계를 느끼면서 불신으로 오그라든 손을 예수님께 내밀 때 치유를 받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마른 손,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른 손을 예수님께 내밀어 치유 받고 자립적이고 감사가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어린 시절 술과 혈기로 가정을 다스리는 아버지로 인해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사랑의 감정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말씀 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마른 손을 내밀었을 때 치유 받고 인생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랑이 풍성한 목자가 되어 많은 양들을 섬기고 살리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치유된 손을 세상에 내밀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사랑의 손, 섬김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르라진 손을 펴서 나누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회복의 역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연합해서 강력한 힘으로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적인 마음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새 가죽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의 마른 손을 내밀어서 치유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캠퍼스 메마른 영혼들을 섬기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가복음 2:18 - 3:6
요절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금식 문제와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상, 복음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소망을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가죽 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 금식에 대한 논쟁(18-20)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 금식했습니다. 본래 금식은 죄의 회개라든가, 민족이 당하는 슬픈 사건 예를 들면 예루살렘 포위, 예루살렘 함락, 성전 파괴 등을 겪고 나서 이를 잊기 않기 위해서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참된 금식은 죄를 끊는 진실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사 58:3-12). 그런데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의를 보이기 위해서 금식했습니다. 금식이 하나님을 위해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따졌습니다. 그들은 지금 금식 중이라서 배가 고프고 힘이 없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즐기고 있는 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더구나 이런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더 중요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이스라엘에서 혼인잔치는 일주일씩 거행되었습니다. 이때는 금식기간이라도 금식이 면제되었습니다. 결혼식의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신랑에 비유합니다(사62:5).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고 양들을 구원하는 일을 그리스도와 양들을 중매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 11:2). 신랑은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기쁜 때입니다. 신앙생활은 금식하듯이 슬프고 비장하고 심각한 것이 아니라, 혼인잔치와 같이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마음껏 구원의 기쁨을 누리면 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20). 그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지금 우리는 굳이 금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욕심이나 다른 것을 신랑이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여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때에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너무 세상의 오락을 즐거워할 때 텔레비전 금식을 하든지, 인터넷 사용을 끊어서 경건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음으로 진실하고 사랑스럽고 감사가 충만하여 믿음의 향기를 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임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이 항상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21-22) : 예수님은 바른 금식에 대해 가르치신 후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을 붙여 놓으면 서로 상하기 때문에 붙이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가죽 부대가 터져 버립니다. 그러면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 부대도 쓸모없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귀신을 내어 쫓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중풍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긍휼이 풍성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감화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욕쟁이를 경건한 사람으로, 원망과 불평하는 사람을 감사가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음란하고 정욕적인 사람을 성결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면 맹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듯이 하나님과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향기를 풍기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복음은 교만한 사울을 사도 바울로 변화시켜 이방의 빛으로 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백정이 예수님을 믿자 선교사들이 그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태도는 양반과 상놈이 존재하던 시절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이 퍼져나갔습니다. 양반과 상놈,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의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신앙 경륜이 쌓여도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깨어져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이 계속해서 변화되고 성장하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3. 안식일 논쟁(23-3:6) :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열면서 이삭을 잘랐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은 젊은데다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도록 환경을 만들고, 병자를 고치는 일을 섬기고, 그 밖에 섬겨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갈 수 없듯이 항상 배고픈 제자들은 밀밭을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밀알을 입 속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추수를 하고 탈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너무 예민해 보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에 관해서 39개조 234항의 세부 조항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율법적인 사람들의 공격을 받자 그들을 어떻게 변호하셨습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아비아달 부자가 함께 그곳에 있었고, 또한 함께 다윗의 무리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 아히멜렉은 사울의 손에 죽고 아들 아비아달이 그 대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마가는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자연스럽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진설병은 성소 안 떡상 위에 진열해 두는 거룩한 떡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따라 열 두 개의 떡을 두 줄로 진열했습니다(출 25;30, 레4:5-8). 그런데 다윗이 삼일을 굶고 있었기 때문에 아히멜렉은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물려낸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법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요 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안식일 법을 지켰으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되 율법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여기에 이해와 긍휼이 있고 또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안식일의 참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은 쉼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상적인 일들을 쉬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즐겁고 기쁘게 찬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쉼이 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예수님의 뜻에 맞게 보내야 합니다. 그가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잘 지켜서 육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영적인 건강도 잘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안식일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참된 안식을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잘 지키는 본을 3장 1-6절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한 손이 말라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두 손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시고 이 두 손을 사용하여 합심하고 동역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두 손으로 박수도 치고 피아노도 치고 권투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손이 말라버림으로 먹고, 옷을 입고, 교제하는 때에 불편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한 손 마른 것은 단순히 불편한 문제가 아니라 절박한 인생 문제였습니다. 그가 취직을 하려고 시험을 보면 필기시험에서는 합격이 되는데 면접시험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말이 나오면 상대방으로부터 참 잘 생겼다는 말을 듣고 기대를 갖지만 만나고 나서는 그들이 고개를 돌리곤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는 한쪽 손만 말랐는데 그의 인생 전체가 영향을 받아 못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한 손 마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인생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슬프고 억울하고 한스러운 인생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위축이 되고 다른 사람과 관계성을 잘 맺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를 받아 괴로워하고, 쉽게 오해를 하고, 사람을 미워합니다. 자기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시달리기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흘립니다. 깊은 열등감으로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학합니다.
한 손 마른 자를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이 사람을 보자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하셨습니다. 그가 마른 손이 고침을 받고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가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가정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이 사람들은 바리새인들로서 예수님을 삐딱하게 보고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이 사람을 미끼로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사단이 가득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고 연약한 이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살기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아셨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다음 기회에 고쳐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위기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예수님은 이 사람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루면서 바리새인들 까지 돕고자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안식일 규례가 그 자체를 지키는 것보다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것임을 알려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이 사람의 인생을 회복시켜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옳은 일에 목숨을 걸고자 하십니다. 그 시대의 불의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무엇이 옳은가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를 갈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낡은 가죽부대였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셨습니다. 완악한 마음이란 잘못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배우고 깨달으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노하지 않으십니다. 잘못을 알고서도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우리가 때마다 완악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영접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이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기 위해서는 자의식과 수치심을 깨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아픔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또 괜히 손을 내밀었다가 고침도 받지 못하고 창피만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특히 자존심이 깨어지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 도저히 내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손을 뒤로 감추고 회당을 뛰쳐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평생 한 손 마른채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몰래 고쳐주시든지 아니면 뒤로 가서 단둘이 고쳐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그가 분명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의 마른 손을 고쳐주는 것보다 그가 믿음을 갖고 내면이 치유 받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그가 어렵사리 손을 내밀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곧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만세를 불렀을 것입니다.
우리가 내밀어야 하는 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병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기심으로 병든 손, 감추어 두고 싶은 죄악,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오그라든 손, 자폐증적인 내면의 문제를 예수님께 내밀고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한계를 느끼면서 불신으로 오그라든 손을 예수님께 내밀 때 치유를 받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마른 손,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른 손을 예수님께 내밀어 치유 받고 자립적이고 감사가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어린 시절 술과 혈기로 가정을 다스리는 아버지로 인해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사랑의 감정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그러나 말씀 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마른 손을 내밀었을 때 치유 받고 인생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랑이 풍성한 목자가 되어 많은 양들을 섬기고 살리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치유된 손을 세상에 내밀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한 손 마른 자와 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사랑의 손, 섬김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오르라진 손을 펴서 나누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회복의 역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연합해서 강력한 힘으로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적인 마음을 회개하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새 가죽부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의 마른 손을 내밀어서 치유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캠퍼스 메마른 영혼들을 섬기는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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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회 다운로드 | DATE : 2007-04-22 10: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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