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4 강(2:1-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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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4 강
말씀 마가복음 2:1-17
요절 마가복음 2: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자가 되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새 사람 되게 하고자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해가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소망두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적인 의사가 되셔서 그들을 고쳐 주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 시간 저희 각자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1.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12) : 예수님은 수 일 후에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자 많은 사람이 모여서 집 안뿐 아니라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란 로고스로서 복음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인간은 죄인이고 죄 문제를 해결 받을 때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기쁨과 평화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으로서 듣는 사람의 마음에 힘을 주고 세상의 문제를 극복하며 자립 신앙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에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병 고침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사람들 때문에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 문제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자기 문제가 가장 커 보였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양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자 할 때 여러 장벽에 부딪치게 되죠? 중풍병자 친구들은 이 장벽을 어떻게 뛰어넘었을까요? 중풍병자 친구들은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 대한 사랑이 매우 뜨거웠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들은 장애가 있다고 해서 뒤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안 되는 이유를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이 좋지 않다, 안 되겠다, 돌아가자, 이런다고 되겠냐? 회의를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써서 하고자 해도 일이 잘 안 될 때 귀찮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절박함과 의지가 더 강해졌습니다. 그들은 이번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지 않는다면 그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친구를 예수님께 앞에 데려가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썼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뚫어 길을 만들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붕을 뚫을 수 없었다면 땅굴을 팠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치기 한다는 비난, 남의 집을 허락없이 부순다는 비난받을 각오를 하고 지붕을 뚫었습니다. 지붕에서 흙이 떨어지고 먼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이더니 침상이 내려오고 그 위에 한 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반응을 기대했을까요?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 무슨 짓이냐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무엇을 봅니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주로 봅니다. 세상 가치관, 육신주의, 물질주의에 기초해서 보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을 매우 기뻐하시고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어 예수님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의 죄가 떠나갔습니다. 그의 근원적인 문제가 죄이기 때문에 병보다 먼저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사실 그는 병으로 고통하면서 죄로 인해 저주를 받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매사에 다른 사람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식사뿐만 아니라 대소변도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병에 걸렸기 때문에 이렇게 의존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무력감이 그를 더욱 절망스럽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운명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열 가지를 잘 해주고 한 가지를 섭섭하게 해 주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병으로 인해서 자의식에 시달렸습니다. 죽고 싶은 심정도 들었고 슬프고 눈물 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 내면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의 근원적인 문제를 보셨습니다. 인간이 고통하는 것은 죄때문입니다.
육신의 병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마음의 병입니다.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먼저 고침을 받아야 됩니다. ‘오 아볼로’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바람만 불어도 뼈가 부러지는 ‘골형성부전증’이라는 병이 있어 늘 방에 갇혀 지내야 하고, 키도 1m가 채 안 되는 분입니다. 그에게는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습니다. 그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50통 내지 100통씩 써서 지금까지 30여만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취직 못해 자살을 꾀하는 청년, 원망이 가득한 말기 암 환자, 이혼 위기를 맞은 부부, 과체중으로 고민하는 여고생, 이유 없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부, 감옥에 갇힌 재소자, 탈영을 꿈꾸는 군인 등등…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생을 다시 살게 되었다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편지를 쓰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한 줄 알았어요. 정말 그랬어요. 뼈가 부러지지 않는데 무슨 근심이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병이 없어도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요. 알고 보니 건강한 사람이 행복해지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이를 볼 때 육신적인 장애가 결코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조건 탓, 환경 탓, 남을 탓하면서 삶을 낭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온전해지려면 육신의 병을 낫게 하기보다 마음의 병이 나아야 하고, 환경이나 조건을 개선하기보다도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자 거기 앉아 있던 서기관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요 신학자로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이런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병만 고쳐주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죄 사함의 중요성을 보이시고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 사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임을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겉보기에는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 더 쉽습니다.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씀은 보여 주어야 하기에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집과 좋은 자동차와 쾌락을 즐겨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원히 고통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무력감은 죄의 결과입니다. 사람을 미워해도 무력해집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불신할 때도, 원망과 불평할 때도 무력해집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으면 힘이 생깁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가 넘칩니다. 모든 것을 다 누렸던 다윗왕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노래했습니다(롬4:6,7).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내면의 자유와 평강이 있습니다. 영혼의 기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잠재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도전적이고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부드럽고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고와 슬픔을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이미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죄 사함은 ‘힘’입니다. 그 힘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힘찬 삶을 살 수 있는 생명력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영적인 중풍병을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감으로써 죄 사함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나를 따르라(13-17) : 예수님은 다시 바닷가에 나가셨습니다. 큰 무리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세관에 앉아서 고민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레위인데 그의 부모님은 무슨 기대를 하고 이런 이름을 주었을까요? 레위는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업인데 지금 로마인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선민의 자존심을 버리고 로마의 사냥개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왜 이런 삶을 살고 있을까요? 오직 하나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돈을 벌 목적으로 세리가 되었고, 거기에 따르는 지탄은 감수하고자 했습니다. 또 지탄을 감수하면서도 돈을 벌고자 한 데에는 그만큼 돈에 맺힌 한이나 절실한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와 사연이 있었건 그는 결과적으로 돈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중풍병자는 무기력한 죄인의 대표라면 세리 레위는 이기적인 죄인의 대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 추구하는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사납고 차가운 죄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로마 정부를 등에 업을 만큼 수완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또 남이 뭐라던 돈을 벌만큼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능력과 수완, 집념과 성실을 다 해 돈을 추구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이 짓 때려치워야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되지…” “돈 많이 벌어 좋은 일 많이 할 거야.” 하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덧 돈이 그에게 최고의 가치가 되었고, 그는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로마서 2장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과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사람은 사는 날 동안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고 끝날에는 영생이 있을 것이지만,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는 사는 날 동안 그 영혼에 환난과 곤고가 있으며 그 끝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레위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이기적인 욕심을 구하고, 영원한 가치보다도 썩어 버릴 돈을 추구했으니 그 영혼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밤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몰매를 때리고 자기가 모아 둔 돈을 다 빼앗아 가는 악몽을 꾸다가, 아침에는 식은땀에 흥건히 젖어서 깨어나곤 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돈에 한이 맺혀서 세리가 되기는 했지만 그 동안 동족에게 하지 못할 일을 해야 했을 때 그 양심의 괴로움이 어떠했겠습니까? 또 아무도 그와 상대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 고독이 어떠했겠으며, 성전이나 회당에 가서 예배드릴 수도 없었으니 하나님께 저주받은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회를 통해서 도움을 받고, 사회에서 인정받음으로써 보람을 갖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레위를 볼 때 도끼 눈으로 보고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레위는 악랄한 자신이 미워서, 돈만 추구하다 지쳐버린 영혼을 살리고 싶어서, 이제는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지만, 율법적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할 자신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세리로 살고 있는 것에 회의를 느끼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사의 눈으로 그를 보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는 순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나 같은 것을 불러 주시다니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즉시 계산기와 장부를 내 던지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와 함께 하면서 그의 삶을 배워야 하고 그의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그에게 거는 소망이 컸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가 인생의 목적을 회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메시야라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경건한 의인들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셨습니다. 죄인 레위가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소망하면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구를 따라다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나쁜 친구를 따라다니게 되면 여러 가지 나쁜 행동을 배우게 됩니다. 욕을 잘 하는 사람을 따라 다니면 자연스럽게 욕쟁이가 됩니다. 술친구를 따라 다니면 건수를 만들어 술집을 드나들게 됩니다. 음란한 사람을 따라 다니면 음란 비디오를 보게 되고 음담패설을 하게 됩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사기치고 돈 때문에 살인까지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따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인도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잘 따라가면 우리의 인생은 생명과 구원의 길, 진리의 길로 가게 됩니다. 밤하늘에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겉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 같으나 마음으로는 다른 것을 따를 때가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 사람의 인정, 자기 야망, 세상 욕심을 따라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몸과 마음과 지성을 다해서 잘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레위는 예수님이 자신을 불러주신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에 세리 친구들과 죄인들을 불러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을 알고 새 삶을 살도록 돕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바이블 아카데미를 준비하고 친구들을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베드로가 사회를 보고 요한이 소감을 발표하고 안드레는 자리 정리하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들은 오랜 만에 밝게 웃고 떠들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세리 레위의 집에서 잔치하는 것을 구경하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들은 예수님께는 직접 말씀을 드리지는못하고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인들은 의인과 격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인이 의인을 부정하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판단과 정죄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잘해도 의인의 심정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럴 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우리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병든 자,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의인이 있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는 의인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돕고자 하지만 도우실 수 없습니다. 마치 자신이 병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환자는 의사라도 도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병든 자요 죄인인 줄을 알고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누구나 용서하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악랄한 세리라고 할지라도 영접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의사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소망을 두셨습니다. 병자가 그 병만 치료되면 건강한 사람이 되듯이 죄인도 죄 사함을 받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죄 사함의 권세자 예수님,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평생 중풍병자처럼 무기력하게 살게 됩니다. 늘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미움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또 인간의 사랑과 인정에 매여서 울고 웃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이기심으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늘 고독하고 기쁨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한 돈의 노예, 욕심의 노예가 되어서 일생을 추하고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 사함의 권세자 예수님을 만나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어떤 죄도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기쁘고 행복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말씀 마가복음 2:1-17
요절 마가복음 2:17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자가 되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새 사람 되게 하고자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해가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소망두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적인 의사가 되셔서 그들을 고쳐 주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 시간 저희 각자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1.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12) : 예수님은 수 일 후에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자 많은 사람이 모여서 집 안뿐 아니라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도’란 로고스로서 복음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인간은 죄인이고 죄 문제를 해결 받을 때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기쁨과 평화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으로서 듣는 사람의 마음에 힘을 주고 세상의 문제를 극복하며 자립 신앙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에게 몰려온 사람들에게 병 고침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사람들 때문에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 문제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자기 문제가 가장 커 보였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양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자 할 때 여러 장벽에 부딪치게 되죠? 중풍병자 친구들은 이 장벽을 어떻게 뛰어넘었을까요? 중풍병자 친구들은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 대한 사랑이 매우 뜨거웠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들은 장애가 있다고 해서 뒤로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안 되는 이유를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이 좋지 않다, 안 되겠다, 돌아가자, 이런다고 되겠냐? 회의를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써서 하고자 해도 일이 잘 안 될 때 귀찮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절박함과 의지가 더 강해졌습니다. 그들은 이번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지 않는다면 그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친구를 예수님께 앞에 데려가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썼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뚫어 길을 만들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붕을 뚫을 수 없었다면 땅굴을 팠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치기 한다는 비난, 남의 집을 허락없이 부순다는 비난받을 각오를 하고 지붕을 뚫었습니다. 지붕에서 흙이 떨어지고 먼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이더니 침상이 내려오고 그 위에 한 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반응을 기대했을까요?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 무슨 짓이냐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무엇을 봅니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주로 봅니다. 세상 가치관, 육신주의, 물질주의에 기초해서 보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을 매우 기뻐하시고 칭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어 예수님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의 죄가 떠나갔습니다. 그의 근원적인 문제가 죄이기 때문에 병보다 먼저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사실 그는 병으로 고통하면서 죄로 인해 저주를 받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매사에 다른 사람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식사뿐만 아니라 대소변도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병에 걸렸기 때문에 이렇게 의존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무력감이 그를 더욱 절망스럽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운명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도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열 가지를 잘 해주고 한 가지를 섭섭하게 해 주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병으로 인해서 자의식에 시달렸습니다. 죽고 싶은 심정도 들었고 슬프고 눈물 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 내면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의 근원적인 문제를 보셨습니다. 인간이 고통하는 것은 죄때문입니다.
육신의 병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마음의 병입니다.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먼저 고침을 받아야 됩니다. ‘오 아볼로’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바람만 불어도 뼈가 부러지는 ‘골형성부전증’이라는 병이 있어 늘 방에 갇혀 지내야 하고, 키도 1m가 채 안 되는 분입니다. 그에게는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습니다. 그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50통 내지 100통씩 써서 지금까지 30여만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취직 못해 자살을 꾀하는 청년, 원망이 가득한 말기 암 환자, 이혼 위기를 맞은 부부, 과체중으로 고민하는 여고생, 이유 없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주부, 감옥에 갇힌 재소자, 탈영을 꿈꾸는 군인 등등…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생을 다시 살게 되었다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편지를 쓰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다 행복한 줄 알았어요. 정말 그랬어요. 뼈가 부러지지 않는데 무슨 근심이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병이 없어도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요. 알고 보니 건강한 사람이 행복해지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이를 볼 때 육신적인 장애가 결코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조건 탓, 환경 탓, 남을 탓하면서 삶을 낭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온전해지려면 육신의 병을 낫게 하기보다 마음의 병이 나아야 하고, 환경이나 조건을 개선하기보다도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자 거기 앉아 있던 서기관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이요 신학자로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이런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병만 고쳐주면 그만인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죄 사함의 중요성을 보이시고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 사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임을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겉보기에는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 더 쉽습니다.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씀은 보여 주어야 하기에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큰 집과 좋은 자동차와 쾌락을 즐겨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원히 고통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무력감은 죄의 결과입니다. 사람을 미워해도 무력해집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불신할 때도, 원망과 불평할 때도 무력해집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으면 힘이 생깁니다. 죄 사함을 받으면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가 넘칩니다. 모든 것을 다 누렸던 다윗왕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노래했습니다(롬4:6,7).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내면의 자유와 평강이 있습니다. 영혼의 기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잠재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도전적이고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부드럽고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고와 슬픔을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이미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죄 사함은 ‘힘’입니다. 그 힘은 우리에게 어떤 조건과 환경 가운데서도 힘찬 삶을 살 수 있는 생명력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영적인 중풍병을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감으로써 죄 사함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나를 따르라(13-17) : 예수님은 다시 바닷가에 나가셨습니다. 큰 무리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세관에 앉아서 고민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레위인데 그의 부모님은 무슨 기대를 하고 이런 이름을 주었을까요? 레위는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업인데 지금 로마인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선민의 자존심을 버리고 로마의 사냥개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왜 이런 삶을 살고 있을까요? 오직 하나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돈을 벌 목적으로 세리가 되었고, 거기에 따르는 지탄은 감수하고자 했습니다. 또 지탄을 감수하면서도 돈을 벌고자 한 데에는 그만큼 돈에 맺힌 한이나 절실한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와 사연이 있었건 그는 결과적으로 돈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중풍병자는 무기력한 죄인의 대표라면 세리 레위는 이기적인 죄인의 대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 추구하는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사납고 차가운 죄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로마 정부를 등에 업을 만큼 수완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또 남이 뭐라던 돈을 벌만큼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능력과 수완, 집념과 성실을 다 해 돈을 추구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이 짓 때려치워야지…”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되지…” “돈 많이 벌어 좋은 일 많이 할 거야.” 하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덧 돈이 그에게 최고의 가치가 되었고, 그는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로마서 2장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과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사람은 사는 날 동안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고 끝날에는 영생이 있을 것이지만,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는 사는 날 동안 그 영혼에 환난과 곤고가 있으며 그 끝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레위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이기적인 욕심을 구하고, 영원한 가치보다도 썩어 버릴 돈을 추구했으니 그 영혼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밤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몰매를 때리고 자기가 모아 둔 돈을 다 빼앗아 가는 악몽을 꾸다가, 아침에는 식은땀에 흥건히 젖어서 깨어나곤 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돈에 한이 맺혀서 세리가 되기는 했지만 그 동안 동족에게 하지 못할 일을 해야 했을 때 그 양심의 괴로움이 어떠했겠습니까? 또 아무도 그와 상대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 고독이 어떠했겠으며, 성전이나 회당에 가서 예배드릴 수도 없었으니 하나님께 저주받은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회를 통해서 도움을 받고, 사회에서 인정받음으로써 보람을 갖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레위를 볼 때 도끼 눈으로 보고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레위는 악랄한 자신이 미워서, 돈만 추구하다 지쳐버린 영혼을 살리고 싶어서, 이제는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지만, 율법적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할 자신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세리로 살고 있는 것에 회의를 느끼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사의 눈으로 그를 보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는 순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나 같은 것을 불러 주시다니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즉시 계산기와 장부를 내 던지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와 함께 하면서 그의 삶을 배워야 하고 그의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그에게 거는 소망이 컸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가 인생의 목적을 회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메시야라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는 경건한 의인들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셨습니다. 죄인 레위가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소망하면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구를 따라다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나쁜 친구를 따라다니게 되면 여러 가지 나쁜 행동을 배우게 됩니다. 욕을 잘 하는 사람을 따라 다니면 자연스럽게 욕쟁이가 됩니다. 술친구를 따라 다니면 건수를 만들어 술집을 드나들게 됩니다. 음란한 사람을 따라 다니면 음란 비디오를 보게 되고 음담패설을 하게 됩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사기치고 돈 때문에 살인까지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따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좋은 인도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잘 따라가면 우리의 인생은 생명과 구원의 길, 진리의 길로 가게 됩니다. 밤하늘에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겉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 같으나 마음으로는 다른 것을 따를 때가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 사람의 인정, 자기 야망, 세상 욕심을 따라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몸과 마음과 지성을 다해서 잘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레위는 예수님이 자신을 불러주신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에 세리 친구들과 죄인들을 불러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친구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을 알고 새 삶을 살도록 돕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바이블 아카데미를 준비하고 친구들을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베드로가 사회를 보고 요한이 소감을 발표하고 안드레는 자리 정리하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들은 오랜 만에 밝게 웃고 떠들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세리 레위의 집에서 잔치하는 것을 구경하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들은 예수님께는 직접 말씀을 드리지는못하고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인들은 의인과 격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인이 의인을 부정하게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죄인들에 대한 판단과 정죄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잘해도 의인의 심정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럴 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우리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병든 자,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의인이 있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는 의인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돕고자 하지만 도우실 수 없습니다. 마치 자신이 병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환자는 의사라도 도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병든 자요 죄인인 줄을 알고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누구나 용서하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악랄한 세리라고 할지라도 영접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의사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소망을 두셨습니다. 병자가 그 병만 치료되면 건강한 사람이 되듯이 죄인도 죄 사함을 받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죄 사함의 권세자 예수님,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평생 중풍병자처럼 무기력하게 살게 됩니다. 늘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미움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또 인간의 사랑과 인정에 매여서 울고 웃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이기심으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늘 고독하고 기쁨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한 돈의 노예, 욕심의 노예가 되어서 일생을 추하고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 사함의 권세자 예수님을 만나 죄를 사함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어떤 죄도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기쁘고 행복한 삶,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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