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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7년 부활절 특강 제 1 강(15:1-47)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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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342회 작성일 07-04-0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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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부활절 특강 제 1 강                                                       
말씀 마가복음 15:1-47
요절 마가복음 15:39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신비롭습니다. 그 깊은 의미를 묵상한다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십자가를 매일 보아도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생동안 십자가를 묵상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장식용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고 죄사함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각자에게 새롭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1. 심문 받으시는 왕의 침묵(1-15) : 새벽에 대제사장들은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였습니다. 의논했다는 말은 이미 사형에 처하고자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고 분명히 대답하셨고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자 그들은 신성 모독이라며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밤에 두 번이나 재판을 했습니다. 본래 공회는 낮에 열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새벽에 공회를 연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은 오늘 안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했습니다. 그날 예수님을 처리하지 못하면 그 다음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이 안식일 다음 날로 미뤄지면 그 사이에 백성들 사이에 예수님 체포에 대한 소문이 다 퍼지게 될 것이고 그럴 경우 일이 그들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못한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분노를 피하고 싶었고, 그들 스스로 사형을 집행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이방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네가 메시야냐’라는 뜻과 ‘네가 로마를 반역한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로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 황제에게 반역을 꾀하는 자라며 정치적으로 고발하고 세금을 내지 말도록 선동했다는 둥 여러 가지 거짓 고소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또 물었습니다.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있는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한 마디도 변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고자 결심하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더 이상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의 고발은 계속되었고 빌라도의 질문도 계속되었지만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강력하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생사가 걸린 문제 앞에서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기이한 현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상을 인정하는 것도 자신을 변호하는 것도 거부하셨습니다. 지금 진행되는 일들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7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심문을 받으시면서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그의 진실과 고결함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대제사장들의 거짓 고소는 서로 맞지 않아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그의 심문에 대답을 하지 않자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빌라도는  엄청난 재앙이 자기 위로 와락 덮쳐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마27:19).”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더욱 떨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로우셨습니다.

  이를 볼 때 불행한 사람은 심문을 받는 예수님이 아니라 보좌에 앉아 있는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빌라도는 영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전통과 심성을 알았습니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범죄자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를 민족주의자였던 열심당원으로 볼 근거가 희박합니다.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풀려나기를 바라면서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 준 줄 앎이었습니다. 시기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않고 사람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권세가 있고 죄인과 각종 병자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는 목자의 사랑을 알고 양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고 시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가 귀신을 쫓아내면 마귀의 힘을 빌어서 쫓아낸다고 모함하며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에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과 양 무리들을 섬기고자 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체면과 권위를 세우고자 할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고단수의 정치가들이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요청에 대한 무리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였습니다. “바라바, 바라바, 바라바!” 빌라도는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바라바를 요구하는 무리들의 외침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사람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리가 더욱 소리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아라!”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역사가 어떠한지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대제사장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의심을 심었습니다. 그들의 선동에 의해서 바라바는 의인이 되고 예수님은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진리가 없으니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고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유익과 목적을 위해서 선과 악을 뒤집었습니다.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타협하고 악을 행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작은 유익 때문에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백성들은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고 분위기를 따라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소리쳤습니다. 사단의 종이 된 그들은 가장 불쌍하고 가엾은 인생들이었습니다. 실용주의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이 선이고 손해가 나는 것을 악하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유익이 진리입니다. 그들에게 절대 진리는 없습니다.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15). 그에게 진리가 없으니 자신의 장래와 자식들을 위해서 악한 길을 택했습니다. 대로마 총독이 겁쟁이 같이 공회와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의 마음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는 말씀만 있었어도 그들의 압력에 굴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인간적으로 영리했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매우 어리석었습니다.

  2.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16-20) : 군인들이 예수님을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총독 관저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왕이나 귀족의 옷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웠습니다. 가시관은 왕의 면류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시관은 고난의 왕이 쓰는 왕관이었습니다. 가시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꾹 눌러 씌웠을 때 예수님의 이마에서는 피가 방울방울 스미어 나왔고 이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군인들은 황제에게 경배를 하듯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했습니다. 막대기로 가시관을 쓴 머리를 탁 치며 가래침을 그의 얼굴에 퇘하고 뱉어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반복해서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면서 가학적인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무지 가운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며 상처를 입히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언을 따라서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약속된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이사야 53:4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은 극한 상황에서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조롱과 멸시를 받을 만한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죄를 위해서 잔인한 군병들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온유하고 저항하지 않는 ‘왕’은 거친 세상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조롱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악으로 인해서 욕을 먹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수모를 당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와 실수로 인해서 조롱과 수치를 당할 때도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이런 조롱과 멸시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받아야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조롱과 멸시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수치를 면하고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겉보기에는 온전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또한 죄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나음을 받은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하여 죽고 의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3.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유대인의 왕(21-47) :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끌려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로 막대를 지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면서 거리를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불가해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군인들이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우고 따라가게 했습니다. 로마 제국 내에 있는 사람들은 군인들의 요청이 있을 때 5리 까지 그들의 짐을 지고 갈 의무가 있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그는 알 수 없는 평안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그의 영혼에 휘돌아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모든 죄가 씻겨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주심을 확신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의 왕”을 보았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진 후에 그와 그의 가족이 다 예수님을 믿고 초대 교회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손과 발에는 신경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마취주사를 맞지 않고 못을 박을 경우 까무러치기 쉽습니다. 이를 아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의 잔을 한 모금이라도 버리지 않고 다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체념 후의 자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결단의 자유라는 고통스러운 짐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 분은 매 순간 죄인들을 위해서 고난을 감당하고자 새로운 결단을 하셨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누이고 그의 두 다리를 포개서 발바닥을 관통하도록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의 양 손목에 대못을 대고 쾅쾅쾅 못을 박았습니다. 동맥과 정맥 줄이 끊기면서 피가 분수같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 피는 십자가를 적시고 땅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파 놓은 구덩이에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아주 짧고 단순하게 기록했습니다. 그 풍성하고 무한한 의미를 사람의 언어로 기록함으로 가두지 않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써야 할 때 마가는 며칠을 울고 나서야 기록했을 것입니다. 군인들은 십자가 아래서 히히덕거리며 그 옷을 제비 뽑았습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때가 제 삼시 곧 오전 아홉시였습니다.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강도 둘을 예수님과 함께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9,30).”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31,32).”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 자들도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여기 저기, 아래 위에서 비난하는 소리, 조롱하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비방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자기를 구원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는 충분히 힘이 있는데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을까요? 이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오래 동안 준비해 오신 구속 역사의 절정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어야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습니다. 자신은 순종할 뿐이고 자기를 높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는 가장 밝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에 태양도 빛을 비추기를 멈추었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태양조차도 세상의 불의를 견딜 수 없어 빛을 비추지 않았습니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 받으신 예수님의 무시무시한 고독을 뜻합니다. 어두움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예수님의 마지막 울부짖음은 너무나 깊어서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하신 말씀을 묵상해 볼 때 그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끊어졌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생명을 다하기까지 모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배반과 적들의 미움, 원수들의 악의를 견디셨습니다. 그는 그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생명을 던지고 싶은 타는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울 때에도 한 마디의 신음소리도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깨어졌을 때 그는 크게 우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는 한 예수님은 모든 고통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부활 후에 사랑의 관계가 회복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이지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그는 매우 슬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울지 말아야 함을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울어야만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남녀가 결혼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는 한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많은 이혼 가정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아이들은 버림받는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을 아시고 그들의 위로자요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무력하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원수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야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그들의 조롱은 예수님의 현상태에 대한 조롱을 넘어서서 그가 주장하고 가르쳤던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역시 우리가 옳았다. 이제 우리가 이겼다. 너에게 남겨진 몫은 그 위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죽는 것뿐이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의미를 예수님께서 아셨다고 해도 그들이 말하는 대로 자신이 옳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셨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패배였습니다. 패배의 자리에서, 육체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원수들 앞에서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토록 한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일로 평가될 때 그 좌절감과 분노가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도 고통 때문에 신음하셨습니다. 고통에는 고통 자체의 무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과거에 어떤 고통을 당했었지만 기도와 말씀으로 그 고통을 이겨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아직 무너질 만한 고통을 경험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고통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고통이 주는 그 무게 자체 때문에 주저 않게 되고 맙니다. 무너질 만한 고통이 오면 누구나 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철저히 패배한 모습을 견디시면서, 무시무시한 고독 가운데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우리는 고독한 가운데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죄로 인해서 버림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버림받으심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저주 때문에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들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짖자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 백부장은 십자가 형을 받아 죽어가는 많은 죄수들을 목격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아주 강하고 딱딱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막강한 로마를 대표하는 이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죽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분의 신성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구원의 왕이란 의미입니다.

  이 날은 금요일로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존경받는 공회원으로서 그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탁월한 지위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었습니다. 또 유대 사회에서 쌓아 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바라보고 이런 위험한 일을 했을까요? 그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부활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을 때 십자가는 모든 것의 마지막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나라를 위해서 자신이 세상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던지는 신앙적인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요, 무엇을 위해서 그것을 희생해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요셉의 무덤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앞으로도 영원히 칭송거리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한 또 한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수치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로 인한 고통과 저주와 심판을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슬픔도 담당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세상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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