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3 강(1:29-45)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609회 작성일 07-03-25 10:48

본문

2007년 봄 마가복음 제 3 강                                                     
말씀 마가복음 1:29-45
요절 마가복음 1:38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우리의 인생은 한 번 뿐입니다. 우리의 젊음도 잠깐입니다. 우리가 이 한번 뿐인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마다 다 무엇인가를 위해 삽니다. 자기의 욕심과 야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부모님의 기대와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사는 사람, 자식들을 위해 사는 사람 등.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사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저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시몬이 제자로 부르심을 입었지만 얼굴이 어두운 것을 보고 그의 집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이 열병은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그 지역의 습한 기후로 인해 생기는 풍토병이었습니다. 이 분의 병은 장기적으로 오래 지속된 만성적 질병이었습니다. 그녀의 온 몸은 펄펄 끓어 열이 40도는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약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자 그 여인의 열병이 떠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바쁘셨지만 늙고 병든 한 여인을 돌보기 위해 시간을 내셨습니다. 그녀는 곧 일어나 예수님을 수종들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복음 역사를 위해서 일생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저물어 해 질 때란 토요일 해가 진때로서 안식일이 끝난 때를 말합니다. 낮의 열기가 식어지고 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지만, 하루 종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신 예수님에게는 쉼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끝나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와서 온 동네가 베드로의 집 문 앞에 모였습니다. 갑자기 베드로의 집 앞 마당은 야전 병원으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연이어 신음신음 앓는 병자들을 데려왔습니다. 각종 귀신들린 자들도 데려왔습니다. 병자를 돌보고 귀신을 내 쫓는 것은 영육간에 매우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병자들을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하나 하나 안아주듯이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심정으로 육신의 병든 자, 마음의 병든 자들을 치유하사 온전케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 중 하루를 생각해 볼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어제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시몬의 장모를 심방하여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저녁에는 병든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병든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짬 시간을 내어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에게는 개인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 시간을 가졌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음 날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결단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하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사명에 불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위대한 믿음과 신앙의 성숙이 일어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방식으로 모든 일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과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는 어떤 영적인 일도 수행할 수 없고, 또한 어떤 영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늘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줄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생활을 변화시키고 능력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사탄의 세력과 지배를 몰아내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십일 새벽 기도를 허락하시고 복음 전도를 힘있게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목자 한 사람이 성경을 공부할 한 명 이상의 양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단순히 한 명의 일대일 양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중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복음 사업이 아니라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시몬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좋으니 살맛이 났습니다. 그들은 새벽이지만 흥분이 되어 외쳤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무리들은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성가실 정도로 찾고 또 찾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인생 문제를 해결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시몬도 이에 편승해서 성공적인 목자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말하면 “오! 예.”라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시몬의 기분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인생 목적이 무엇인지를 시몬에게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시몬의 감추어진 소원과 예수님의 목적이 8장에 가서 부딪칩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인으로 오셨습니다. 사명의 사람은 목적이 있는 인생을 삽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명과 비전과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성공적인 복음사업가가 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나 성공보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일에 힘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10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갈릴리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마가복음 10:45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동기가 긍휼이었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병 고침과 귀신을 쫓아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예언했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우리가 전도해야 하는 범위는 땅 끝까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그는 수많은 배척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불사조와 같이 일어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하나님은 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까? 그것은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도의 열매는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희생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화목제물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가족과 친지, 친구, 동료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지 단지 기적이나 베풀어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통해서 죄로부터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임을 압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들의 영적인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더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우리는 전도하면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기 위해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할 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우리가 전도한다고 해서 다 호의적이지는 않습니다. 개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부정직하고 이기적이고 꼴 보기 싫어서 교회에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복음 전도의 장애물이 못된 신자들인 것입니다. 신자의 영향력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직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영적인 면 못지않게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면을 각별히 신경 써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도 인정받는 좋은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뒷받침 되어야 전도가 힘을 받습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이렇게 나빴던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교회 안에서 보다 사회 속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입니다. 절제입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사람들의 연약함을 안고 치유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까 별의 별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기보다 성공주의, 물량주의에 빠졌던 죄를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복음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왜 이 나라가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가 일인당 국민소득 3만불인 나라가 되는 것보다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 한 국민소득 5만불인 나라가 되어도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플로이드 맥클링이란 분은 전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도란 우리가 해야만 하는 어떤 활동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과 매일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우리가 참으로 믿고 있는 바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비교인들이 신자들의 말과 행위가 다른 이중적인 모습에 상처를 입고 실족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들은 말이나 전도 기술로는 도저히 전도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과 바른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려는 주님의 삶의 철학이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이웃 사랑이 전도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의 표현이기 때문에 전도자의 인격으로 가장 잘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전도 전략은 전도자 자신입니다. 전도란 전도지를 돌리거나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보다 더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도는 우리의 전 삶을 포함하는 것이며 우리가 남들 앞에서 어떻게 살기로 작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구마 전도 왕’의 ‘젓가락 전도법’이 널리 소개되었습니다. 익은 고구마인가 아니면 생고구마인가 하는 문제보다도 오히려 ‘누가 찌르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평소에 인격이 훌륭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찌르면 그 결과가 매우 효과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전도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수고로도 충분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공중 앞에 나설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기까지 하루 종일 기다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을 때 숨어 있던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나병환자였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그가 나왔다면 그는 목숨을 걸고 나왔을 것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사람은 온 몸에 나병이 퍼진 사람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하기 때문에 도시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육체적 고통과 함께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살아야했기 때문에 외로움이 견디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 취급을 당했습니다. 인격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그것이 힘들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은 그를 놀릴 뿐만 아니라 돌을 던져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인들은 그를 보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나병 환자였지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나병환자였지만 메시야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올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나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감정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왔습니다. 믿음의 세계에 인간적인 한계란 없습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치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께 드리기라도 하듯이 겸손한 몸가짐으로 예수님께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주권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제까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긍휼을 구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대해주셨습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가 보기에 흉측했지만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그에 대한 동정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사람들이 접촉하면 부정해지는 나병이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심으로 그의 부정에 동참하셨습니다. 부정한 그에게 손을 대심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만 아니라 말로, 더 나아가 행동으로 그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은 부정이 지닌 힘보다 더 강하고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그를 고칠 수 있었지만 그에게 손을 대심으로 고치셨습니다. 신체적인 접촉은 예수님의 사랑을 진하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깨끗하여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파괴된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회에 적응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람 속에 섞여서 사랑의 관계성을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후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문이 나게 되면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해 복음 전파 사역이 방해를 받게 되고 아직은 그들과 갈등할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은 주님께 받은 은혜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감격적으로 전하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예수님께 몰려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전도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은 일생토록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영성이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자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인간관계 맺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단순한 생활을 하여 시간을 내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한 사람이상이 치유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67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33 마가복음 이엘리야 3474 05-06
332 마가복음 이엘리야 3432 04-29
331 마가복음 이엘리야 3551 04-22
330 마가복음 이엘리야 3514 04-15
329 마가복음 이엘리야 3646 04-08
328 마가복음 이엘리야 3343 04-01
열람중 마가복음 이엘리야 3610 03-25
326 마가복음 이엘리야 3401 03-18
325 마가복음 이엘리야 3659 03-11
324 수양회 구마가 4410 03-09
323 여호수아 이엘리야 3614 03-04
322 여호수아 이엘리야 3413 02-18
321 여호수아 이엘리야 3577 02-11
320 여호수아 이엘리야 3602 02-04
319 여호수아 이엘리야 3937 01-28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