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2 강(1:14-28) 복음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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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2 강
말씀 마가복음 1:14-28
요절 마가복음 1:15
복음을 믿으라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모든 인간은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힘이 나지 않고 무기력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한 숨 뿐이요, 느는 것은 잠입니다. 열심히 살고자 하는데 분명한 비전과 방향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얻고 기쁨과 힘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 때 가장 가치 있고 영원히 남는 삶을 살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4-15) : 14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요한이 잡혔습니다. 헤롯왕은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왕이 악한 죄를 회개하도록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이런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등불이요, 양심이었습니다. 이런 의인을 짓밟는 어두운 시대에 복음 역사를 섬긴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상황이 어렵지만 복음 역사를 믿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이 잡힘으로 마음이 아프지만 하나님 편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셨습니다. 요한이 자기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에서 그를 거두어 가심을 알았습니다. 이제 자신이 본격적으로 일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조용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성경의 전체 주제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마가복음에 14회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라는 추상적인 뜻과 함께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생각하기를 늙은이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영접할 때 내 마음에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는 이 세상에서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나라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인간의 이성과 과학 기술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사라질 나라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고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산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사는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죄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한 후에는 우리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힘이 생깁니다. 인간에게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 모든 원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 내면에 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돈과 명예와 정욕을 추구합니다. 그런 가운데 왠지 모르는 공허감과 인생의 허무감으로 무기력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는 마음은 사단의 놀이터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과 이기심, 미움과 혈기 등 온갖 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다스림으로부터 구원하여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믿는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산 소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먼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전해야 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고자 하는 인격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그 마음은 교만 대신 겸손, 이기심 대신에 사랑, 음란 대신 절제가, 그리고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한 마음이 충만합니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찬468).
2. 나를 따라 오라(16-20) : 예수님은 복음 역사를 제자를 부르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얻기 위해서 갈릴리 해변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은 삶의 현장입니다. 그곳에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머리 위로 돌려서 멀리 던졌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하면서 꿈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도 사고 배도 더 큰 것으로 장만하고 쌍두마차도 굴리고 싶었습니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 살았기 때문에 돈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된다면 좀 더 공부를 해서 성경 선생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안드레는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히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울분이 치밀었지만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어 고향에 내려와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고기를 잡는 삶은 많이 잡히면 재미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힘이 빠졌습니다. 그렇지만 고기를 잡을 때 느껴지는 짜릿한 그 손맛과 갈릴리 바다의 시원한 바람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내고 있던 어느 날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는 삶을 살라는 초청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그도 가고 예수님이 거하시는 곳에 그도 거하면서 예수님의 사상과 인격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두신 소망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로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낚는 어부는 사람들을 죄와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내는 전도자입니다. 사람낚는 어부는 사람을 사랑하고 진리로 양육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어부들을 그 시대의 목자요 성경 선생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당시 선생들과 비교해 볼 때 너무 미약해 보입니다. 배운 것이 없는 어부들이 어떻게 강력한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 역사를 시작하시면서 보통 사람들을 미래의 영적인 지도자로 키우고자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몇몇 사람들을 키운다고 해서 세상 역사가 변화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몇몇의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준이요 원칙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매우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면서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터나 칼빈, 멜랑히톤 등과 같은 몇몇의 사람들을 통해서 종교 개혁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파송한 몇몇의 선교사님들이 각 나라에서 영적인 지도자들을 이런 소망 가운데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 UBF 역사도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광주 지방 대학생들을 키우는 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선교단체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첫 조상인 전요한 선교사님은 학생 때는 말이 어눌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자의 심정은 충만하셨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 친구들을 깨워서 사라배리 선교사님이 인도하는 영어 성경 공부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센터에 나오는 양들을 위해서 자리 정리를 하면서 힘든 학생들이 있으면 카운슬링을 했습니다. 그는 한국 대표를 맡고 670명이던 역사를 15000명까지 키운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지금은 UBF 세계 총재로서 큰일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도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예수님을 잘 배워 장차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그들은 주저없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제자의 삶에 따르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결혼을 했고 장모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앞뒤를 재거나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은 때로는 이와 같이 무모해 보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무식하고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험을 합니다. 그들은 즉각적인 결단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더 가시다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셨습니다.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그 아버지를 도와서 그물을 깁고 있는데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실 때 부모의 형편을 보아가면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야고보의 아버지가 두 아들과 품꾼들과 함께 일한 것을 보면 조금 부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한된 시간 안에 구속 역사를 완성하셔야 했기 때문에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면서 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서 두 사람씩 부르시고 열심히 일하는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마치 이안나 선교사님과 윤로사 사모님을 부른 것처럼 유인화,유인경 자매님들을 부르셨습니다. 또 이디모데 선교사님과 나안드레아 사모님처럼 형제자매도 부르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불렀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그물을 깁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일생을 보면 한 사람은 열심히 개척을 하고 한 사람은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면서 동역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에는 앞에서 일을 추진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다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되 반복적으로 부르지 않고 한번 부르셨습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그들도 군말 없이 그물과 아버지와 품꾼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요?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들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갖는 권세와 위엄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만날 생활인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삶에 대해 무의미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먹기 위해 살면서 무가치하게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그들은 그 날도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지만 실은 허무하고 피곤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이 있을 때 그들은 사명인이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결단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도 제자로 키울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을 보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 권위있는 새 교훈이로다(21-28) : 예수님은 네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유대인 열 명이 모이면 세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강대국들에 짓밟혔지만 회당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회당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정치적인 이야기나 경제적인 담론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불행한 것은 돈이 없거나 환경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고귀함을 상실하고 물질과 육신의 노예가 되어 짐승과 같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절대 진리를 상실하고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하는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비전이 없이 현실의 조그만 것에 얽매여 답답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선한 일을 행하도록 준비시키기에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회당이든, 집에서든, 길에서든, 해변에서든, 산에서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사역의 원칙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선교를 할 때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울이 로마 셋집에서 전파하는 것에서 지금도 우리에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대일 성경 공부와 그룹별 성경공부를 통해서 강력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놀랐습니다. ‘놀라니’(엑세플레손토)라는 헬라어 동사는 어떤 큰 공포나 놀라움, 심지어 기쁨이라고 할지라도 강한 감정상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자극을 받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본문에서는 지속적으로 놀라고 있는 상태를 암시합니다. 마태는 산상수훈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을 전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마7:28).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르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사람의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영감이 넘치고 감화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옛 말씀을 전하였지만 듣는 사람들은 매우 새롭게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전했기 때문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권위가 있습니다. 오늘날 유럽 교회가 쇠퇴하게 된 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이 사라지자 이런 결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권위있는 성경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마침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 귀신은 ‘나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이를 볼 때 더러운 귀신들이 한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를 죄와 죽음의 권세로 고통스럽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들은 자유롭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을 절망하게 만들고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더러운 귀신은 많은 사람들이 음란한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더러운 귀신은 모든 범죄와 악의 원인인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에게서 명예심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짐승처럼 살도록 만들어버립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더러운 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씻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들의 행동을 통제한다고 해서 더러운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깨끗해지려면 영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지배하는 더러운 영을 쫓아냅니다. 악령은 핵폭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도 그의 권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권세자이십니다. 복음 역사는 더러운 귀신들과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즉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는 것을 보자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물었습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명하여 쫓아냄으로 그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더러운 귀신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으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부르심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가복음 1:14-28
요절 마가복음 1:15
복음을 믿으라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모든 인간은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힘이 나지 않고 무기력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한 숨 뿐이요, 느는 것은 잠입니다. 열심히 살고자 하는데 분명한 비전과 방향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얻고 기쁨과 힘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 때 가장 가치 있고 영원히 남는 삶을 살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4-15) : 14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요한이 잡혔습니다. 헤롯왕은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왕이 악한 죄를 회개하도록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이런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등불이요, 양심이었습니다. 이런 의인을 짓밟는 어두운 시대에 복음 역사를 섬긴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상황이 어렵지만 복음 역사를 믿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요한이 잡힘으로 마음이 아프지만 하나님 편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셨습니다. 요한이 자기 사명을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에서 그를 거두어 가심을 알았습니다. 이제 자신이 본격적으로 일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조용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전한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성경의 전체 주제도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마가복음에 14회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라는 추상적인 뜻과 함께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생각하기를 늙은이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영접할 때 내 마음에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는 이 세상에서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나라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인간의 이성과 과학 기술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사라질 나라입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고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산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사는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죄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한 후에는 우리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힘이 생깁니다. 인간에게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 모든 원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 내면에 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돈과 명예와 정욕을 추구합니다. 그런 가운데 왠지 모르는 공허감과 인생의 허무감으로 무기력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는 마음은 사단의 놀이터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과 이기심, 미움과 혈기 등 온갖 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다스림으로부터 구원하여 우리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믿는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산 소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먼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전해야 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고자 하는 인격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그 마음은 교만 대신 겸손, 이기심 대신에 사랑, 음란 대신 절제가, 그리고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한 마음이 충만합니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찬468).
2. 나를 따라 오라(16-20) : 예수님은 복음 역사를 제자를 부르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얻기 위해서 갈릴리 해변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은 삶의 현장입니다. 그곳에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머리 위로 돌려서 멀리 던졌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하면서 꿈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집도 사고 배도 더 큰 것으로 장만하고 쌍두마차도 굴리고 싶었습니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 살았기 때문에 돈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된다면 좀 더 공부를 해서 성경 선생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안드레는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히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울분이 치밀었지만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어 고향에 내려와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고기를 잡는 삶은 많이 잡히면 재미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힘이 빠졌습니다. 그렇지만 고기를 잡을 때 느껴지는 짜릿한 그 손맛과 갈릴리 바다의 시원한 바람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내고 있던 어느 날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는 삶을 살라는 초청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그도 가고 예수님이 거하시는 곳에 그도 거하면서 예수님의 사상과 인격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두신 소망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로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낚는 어부는 사람들을 죄와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내는 전도자입니다. 사람낚는 어부는 사람을 사랑하고 진리로 양육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어부들을 그 시대의 목자요 성경 선생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당시 선생들과 비교해 볼 때 너무 미약해 보입니다. 배운 것이 없는 어부들이 어떻게 강력한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 역사를 시작하시면서 보통 사람들을 미래의 영적인 지도자로 키우고자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몇몇 사람들을 키운다고 해서 세상 역사가 변화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몇몇의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준이요 원칙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매우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면서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터나 칼빈, 멜랑히톤 등과 같은 몇몇의 사람들을 통해서 종교 개혁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파송한 몇몇의 선교사님들이 각 나라에서 영적인 지도자들을 이런 소망 가운데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 UBF 역사도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광주 지방 대학생들을 키우는 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선교단체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첫 조상인 전요한 선교사님은 학생 때는 말이 어눌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자의 심정은 충만하셨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 친구들을 깨워서 사라배리 선교사님이 인도하는 영어 성경 공부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센터에 나오는 양들을 위해서 자리 정리를 하면서 힘든 학생들이 있으면 카운슬링을 했습니다. 그는 한국 대표를 맡고 670명이던 역사를 15000명까지 키운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지금은 UBF 세계 총재로서 큰일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도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예수님을 잘 배워 장차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그들은 주저없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제자의 삶에 따르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결혼을 했고 장모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앞뒤를 재거나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은 때로는 이와 같이 무모해 보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무식하고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험을 합니다. 그들은 즉각적인 결단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더 가시다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셨습니다.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그 아버지를 도와서 그물을 깁고 있는데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실 때 부모의 형편을 보아가면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야고보의 아버지가 두 아들과 품꾼들과 함께 일한 것을 보면 조금 부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한된 시간 안에 구속 역사를 완성하셔야 했기 때문에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면서 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서 두 사람씩 부르시고 열심히 일하는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마치 이안나 선교사님과 윤로사 사모님을 부른 것처럼 유인화,유인경 자매님들을 부르셨습니다. 또 이디모데 선교사님과 나안드레아 사모님처럼 형제자매도 부르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불렀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을 때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그물을 깁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일생을 보면 한 사람은 열심히 개척을 하고 한 사람은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면서 동역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일에는 앞에서 일을 추진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다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되 반복적으로 부르지 않고 한번 부르셨습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그들도 군말 없이 그물과 아버지와 품꾼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요?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들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갖는 권세와 위엄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만날 생활인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삶에 대해 무의미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먹기 위해 살면서 무가치하게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그들은 그 날도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지만 실은 허무하고 피곤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이 있을 때 그들은 사명인이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결단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도 제자로 키울 수 있는 몇몇 사람들을 보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 권위있는 새 교훈이로다(21-28) : 예수님은 네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은 유대인 열 명이 모이면 세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강대국들에 짓밟혔지만 회당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회당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정치적인 이야기나 경제적인 담론을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불행한 것은 돈이 없거나 환경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고귀함을 상실하고 물질과 육신의 노예가 되어 짐승과 같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절대 진리를 상실하고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하는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비전이 없이 현실의 조그만 것에 얽매여 답답하고 힘든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선한 일을 행하도록 준비시키기에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회당이든, 집에서든, 길에서든, 해변에서든, 산에서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사역의 원칙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선교를 할 때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울이 로마 셋집에서 전파하는 것에서 지금도 우리에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대일 성경 공부와 그룹별 성경공부를 통해서 강력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놀랐습니다. ‘놀라니’(엑세플레손토)라는 헬라어 동사는 어떤 큰 공포나 놀라움, 심지어 기쁨이라고 할지라도 강한 감정상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자극을 받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본문에서는 지속적으로 놀라고 있는 상태를 암시합니다. 마태는 산상수훈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을 전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마7:28).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르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사람의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영감이 넘치고 감화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옛 말씀을 전하였지만 듣는 사람들은 매우 새롭게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전했기 때문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권위가 있습니다. 오늘날 유럽 교회가 쇠퇴하게 된 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이 사라지자 이런 결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권위있는 성경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마침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 귀신은 ‘나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이를 볼 때 더러운 귀신들이 한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를 죄와 죽음의 권세로 고통스럽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들은 자유롭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을 절망하게 만들고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더러운 귀신은 많은 사람들이 음란한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더러운 귀신은 모든 범죄와 악의 원인인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에게서 명예심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짐승처럼 살도록 만들어버립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더러운 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씻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들의 행동을 통제한다고 해서 더러운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깨끗해지려면 영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지배하는 더러운 영을 쫓아냅니다. 악령은 핵폭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도 그의 권세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권세자이십니다. 복음 역사는 더러운 귀신들과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즉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는 것을 보자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물었습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예수님이 귀신에게 명하여 쫓아냄으로 그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더러운 귀신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으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제자 양성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부르심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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