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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19 강(10:1-31)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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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282회 작성일 07-08-0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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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19강                                                               
말씀 마가복음 10:1-31
요절 마가복음 10:26-27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첫째 결혼의 진리에 대해서, 둘째,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이 시간 결혼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깊이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결혼의 진리(1-12) : 예수님께서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그를 시험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당시에 세례 요한이 헤롯의 결혼 문제를 하나님 편에서 말하다 죽었습니다. 헤롯의 결혼은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정욕대로 아내를 버리고 동생의 아내를 취했습니다. 그의 악영향으로 인해서 평범한 사람들도 아내를 버리는 일을 정당화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이혼 문제는 그 사회의 핫 이슈였습니다. 그러면 왜 이혼 문제가 예수님께 시험이 될까요? 바리새인들은 여론을 조장하여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자라거나 아니면 헤롯을 비난한다고 매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간계를 간파하시고 되물으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님은 문제의 해답을 성경에서 찾고자 하셨습니다. 신명기 24: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여기서 ‘수치되는 일’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서 상반된 입장이 있었습니다. 샤마이 파는 이를 도덕적으로 수치스러운 것 즉 간통이나 유대인 아내가 지켜야 할 법을 어긴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힐렐파는 남편을 곤란하게 하는 것 전체를 포괄하여 해석했습니다. 그 결과 성격이 조금만 틀리거나 요리를 맛있게 못하거나 청소를 못해도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칠거지악이 있지요? 그 중에 아내가 말이 많아도 아내를 내보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혼하는 경우를 보면 외도, 성격 문제, 물질 문제, 가정 폭력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셨습니까? 5-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이 완악해서 차선책으로 이혼을 허락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결혼 제도를 하나님께서 창설하셨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결혼의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결혼은 어찌되었던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둘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이혼을 하게 되면 당장은 시원할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들에게는 깊은 상처와 아픔, 배신감, 슬픔, 후회 등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날 이혼율이 54%이상이 되는 이유는 자기가 좋아서 결혼을 했다는 생각, 사랑의 감정에 이끌려서 결혼을 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서 결혼을 했으니 내가 싫어서 이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결혼관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쉽게 결혼을 하고 쉽게 이혼을 합니다. 이들은 이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상황이 닥치면 그것을 크게 부풀려서 생각을 하고 문제를 극복하고자 치열하게 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있을 때 어찌하든지 문제를 극복하고자 투쟁하게 됩니다. 문제를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사랑의 관계가 더욱 견고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결혼을 합니다. 믿음의 결혼이란 결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을 갖고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혼을 할 당시는 그것만이 살 길인 것 같지만 이혼을 한 사람은 또 다시 이혼을 할 확률이 높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혼을 하게 되면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가 찢어지게 되는 것임으로 두 사람이 상처를 받습니다. 슬픔, 배신감, 미움, 후회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에게 미치는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정서적인 불안감을 느끼고 대인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녀들은 자신들에 대한 자책감으로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그 부모에 대한 미움으로 고통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절대로 이혼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은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인격과 성경적인 결혼관을 갖추고 결혼을 하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습니다. 아내나 남편을 얻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잠18:22).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서로 동역하여 감당하기 위해 결혼을 합니다. 나의 도움이 없으면 상대방은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이 내게 필요하고 나도 저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정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거룩한 자녀들을 생산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열매가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가정은 가꾸어야 합니다. 복된 가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기도하고 가꾸어 가야 합니다. 저는 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이는 불행한 부모님들의 결혼 생활을 보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처들로 인해서 결혼을 하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은 마음에서 결혼을 미루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 기초한 결혼관을 갖는 가운데 내면의 상처들이 치유되고 믿음이 성숙하여 아름다운 가정 교회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믿음의 결혼을 통해서 상처가 치유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연단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라(13-16) :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시도록 간청하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동일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영육간에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고 영향력이 있는 거목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애들은 저리 가”라며 겁을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입을 삐쭉이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어머니들은 제자들에게 실망하여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어떻게 환영하셨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자’란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않고 어린아이들 같이 단순한 사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붙이지 않고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축복을 바라고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겸손히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저희가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를 얻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16).

  셋째, 구원의 길(17-27) : 예수님께서 길에서 나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 나아온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부자(10:22)요, 청년(마 19:20)이요, 관원(눅 18:18)이었습니다. 그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부와 권력을 쟁취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청년들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이런 것들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으면 이런 모든 것들이 헛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가장 선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이 청년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선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는 다른 선한 사람으로부터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구원의 방식이 무엇인가 질문을 했습니다. 이 청년의 선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선행 구원이라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앞서 이혼 문제를 들고 나온 바리새인들을 돕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신 것처럼 이 사람에게도 성경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사실 하나님의 법을 다 행하면 삽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면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100%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영생을 얻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구약의 율법, 십계명은 애굽에서 구출되어 나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삶의 법으로서 주신 것이지만, 가정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아담 이후로 태어날 때부터 죄인들로 출발합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자신의 죄악됨을 더욱 깊이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율법에 열심이었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고 탄식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자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유치원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율법대로 살고자 투쟁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청년의 정욕을 극복하고자 투쟁했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성경을 암송했습니다. 이번 주에 CBF어린이들이 새벽기도를 시작했는데 그도 열심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의 거룩한 삶을 위한 투쟁은 타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흠이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사랑하사 방향을 주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자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조건은 그가 가진 재물을 다 팔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시고,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마 5:17). 메시야를 따르지 않고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결정적으로 방해가 되는 것은 재물이었습니다. 메시야냐 재물이냐를 선택해야 할 때에 그는 재물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둘 다를 취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가고 싶지만 헌금과 십일조 때문에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가장 걸림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하나님 위에 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하나님 위에 가 있기도 하고,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꿈이 하나님보다 위에 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을 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하면 하나님도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보배이신지를 잘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가자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재물이 많은 사람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기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돈 버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은 쓰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돈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유용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의 첫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면 우상이 됩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제자들은 기왕 이 세상에서 살거라면 부자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놀라 서로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그들은 가난한 구원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면 구원 받기 위해서 모두 가난하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 청년같이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가 궁금했습니다. 그들의 소망도 세상에 많이 가 있었고 구원에 관한 도리도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재물을 팔 수 있는 힘도 주시고 욕심을 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는 역사를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여러 사건 사고를 통해서 부자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이 노력이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언약을 통해서 실패한 인생들에게 새로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는 은혜로운 방법입니다. 딤후 1:9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그의 은혜로운 선택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 온전한 구원을 힘써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자 베드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무슨 보상이 있을 것인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을 버리려면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버린 것의 백배의 축복을 이생에서 주십니다. 내세에는 영생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를 믿을 때 무엇이든지 주와 복음을 위하여 버리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와 복음을 위해서 버리는 것은 투자입니다. 백배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투자입니다. 그러나 핍박도 각오해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박해를 받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축복하사 이제 선교사를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이 보내는 나라로 키워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복을 받은 다음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주와 복음을 위해 기여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재물을 쓰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며 큰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을 때 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기 의를 물리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희생이 큼으로 서로 내가 먼저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버린 것이 자기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버린 것이 자기 의가 되어서 교만과 안일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버린 후에는 끊임없이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혼이 만연한 이 시대에 우리가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 세상의 빛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주되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부족한 한 가지를 팔고 주님을 따름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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