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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18 강(9:30-50) 첫째가 되고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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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49회 작성일 07-07-2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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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18 강                                               
말씀 마가복음 9:30 - 50
요절 마가복음 9:35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오늘 말씀에는 제자들이 세상적인 가치관에 기초해서 큰 자가 되고자 투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큰 자가 되면 부와 권세와 명예와 행복이 따라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자 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것도 다 큰 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정치판에서도 대통령을 가장 큰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는 진정한 위대성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 밑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친 후에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방을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죽임이 임박했기 때문에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하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영광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길을 가면서도 서로 누가 크냐며 쟁론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가장 선두로 달리고 있는 베드로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네거티브 전략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야 말로 첫째 자리에 앉기에 가장 합당하다고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생긴 권력투쟁으로 인해서 사랑의 관계성이 깨지고 미움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연합하고 베드로는 안드레와 다른 제자들을 끌어들여서 그 자리를 지키고자 하면서 제자들 내부에 분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파, 야고보파, 변화산파, 산 밑의 파로 나뉘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심각한 상태를 감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 앞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티격태격 싸우는 자신들이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첫째가 되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첫째, 첫째가 되는 삶은 겸손과 섬김에서 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뭇 사람의 끝이 되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선진국인 이집트의 학술과 무술에 능했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지도자로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그를 지도자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광야 40년 훈련을 받고 나서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입이 뻣뻣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자리가 아니 끝자리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는 겸손하게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감당하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만나면 본성적으로 누가 크냐고 비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나이로 학번으로 비교하고, 재산이나 능력으로 비교합니다. 누가 어떤 차를 타느냐, 외모가 어떠냐로 비교합니다. 어린 제자들은 끊임없이 비교의식과 경쟁심으로 시달렸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 권위를 부리고 섬김을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요 섬기는 사람이요 인격이 큰 사람입니다.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어도 인격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그 자리가 고통스럽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더 깊어집니다. 

  세상에서는 능력이 탁월해서 모든 사람 위에 올라서야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맨 위에 올라가서 자신이 꽃을 피워야 위대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다른 사람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자신은 흙 속에 묻혀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위대한 사람이 있게 한 사람이 더 위대한 것 아닙니까? 사실 헬렌 켈러보다 그가 있게 한 설리반이 더 위대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본성은 나를 앞세우고 나를 자랑하고 내가 칭찬 받고 영광을 받고 싶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한번 휘둘러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자기 능력을 키워 위대해지고자 하면 끝없이 경쟁해야 합니다. 누구 한 사람 제쳤다 싶으면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납니다. 세상에는 기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습니다. 나는 놈 위에는 솟구치는 놈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를 드러내고자 하면 항상 비교의식과 경쟁의식, 열등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흙과 같이 낮아져서 섬기고, 사랑하고자 하면 마음에 평안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청년이 테레사 수녀를 찾아와서 물었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평생 아프고 병든 사람들만 섬기고 사시니 힘들지 않으세요? 세상에 높은 지위에 앉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지 않으세요?” 이때 테레사 수녀가 그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삶에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세상적인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희 모두가 겸손이 주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기꺼이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뭇 사람 뿐만 아니라 뭇 창조물의 첫째요,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이 되셨습니다(빌2:6-7). 그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병든 자들의 아버지요,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죄인들을 섬기시되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막10:45).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영접하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성은 그의 능력이나 권세보다 섬김에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섬김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새 생명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섬김을 생각할 때에 어떤 인간적인 생각과 손해의식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기꺼이 낮아져서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연약하고 무가치해서 유대인들은 어린 아이를 사람 숫자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는 이기적이고 고집이 셉니다. 영적으로 볼 때 어린 아이는 믿음이 어리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돈과 정욕에 약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습니다.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면 그들은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들 편에 서서 섬세하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양들을 사랑하고 그 연약함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잘라 버리면 남을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양들은 먼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교육을 시키고 그 다음에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키우는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영적으로 어린 사람들을 감당하고 성숙하게 자라도록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제자입니다.

  둘째, 위대한 삶은 포용성에서 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그는 매우 자랑스럽게 이 말을 했습니다. 그의 태도는 매우 배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상표등록을 해 놓았으니 우리 허락 없이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자세는 나중에 사마리아에 들어갔을 때 자기들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제안하는 마음입니다. 내 편이 아니면 다 틀리고 죽어도 좋다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생각입니다. 이는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은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요한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39-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는 생각은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지체들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우군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 우리의 가족들은 미래의 동역자들입니다. 하물며 지금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는 내 양도 주님의 양이고 다른 사람의 양도 주님의 양임을 알고 영접해야 합니다. 내 요회, 내 부, 내 센터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든 주님의 사람들을 영접해야 합니다. 내 모임만이 최고라는 교만과 우월감을 버리고 겸손하게 배우고 동역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인 배타성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울타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주위에 자꾸 울타리를 칩니다. 담을 쌓습니다. 우리 남편, 우리 양, 우리 집, 우리 센터, 우리 고향, 우리 학교, 우리 나라 등등 우리라는 말을 즐겨 합니다.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서로를 포용하고 주님의 일꾼들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종들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섬김으로 복을 받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자기 속에 있는 죄와 싸우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작은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42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들은 믿음이 어린 자들입니다. 영적인 지식도 부족하고 분별력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가치관대로 살기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믿음이 좋은 제자가 믿음이 어린 제자 앞에서 마음껏 우상의 제물을 먹었는데 믿음이 어린 양이 이를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하다가 양심에 죄의식을 느끼고 결국 이로 인해서 실족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우상의 고기를 먹는 문제로 믿음이 어린 사람을 실족케 한다면 자신은 일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자유가 있지만 종의 자세로 그 자유를 억제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작은 자를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 제자는 치열한 자기와의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만일 손이 범죄하게 하면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만일 내 발이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라고 하십니다.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만일 내 눈이 나로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습니다. 리더가 내뱉는 불평과 불만을 듣고 양들이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자가 골초라거나 알콜 중독이라거나 음란 사이트에 밥 먹듯이 들어가거나 교회에서 연애를 하는 것만 보아도 실족을 합니다. 양들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목자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실족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자 하나라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 섬세하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자라야 합니다.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래서 제자는 양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자기의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은 양심이 민감합니다. 악인은 양심이 둔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거룩한 양심을 갖게 됩니다. 거룩한 삶은 평범해 보이지만 진정으로 행복하고 위대한 삶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이런 경건한 기쁨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인생의 지고한 복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인생을 투자한다는 것은 영원히 헛된 것입니다. 반대로 영원한 것에 인생을 투자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반드시 있습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요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입니다. 소금을 치듯이 불이 위로부터 떨어집니다. 그런 불에 태워지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지옥은 영원히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대한 분명한 의식만 있어도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서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옛날에 유대인들은 원수들과 화해할 때에 소금을 두고 화평조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소금이 귀해서 그런지 아니면 소금이 자기를 녹여서 맛을 내는 특성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소금은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내 머리에 떨어지는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쏟아 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나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됩니다. 나의 죄는 사라지고 예수님의 의를 덧입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화목하려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화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죄인도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에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지옥 불에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에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을 때 진정으로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다른 아무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되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싸워야 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위대한 삶이 무엇인가 살펴보았습니다. 위대한 삶은 첫째, 겸손하고 섬기는 삶입니다. 둘째는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죄문제와 싸우는 거룩한 삶에 위대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더욱 내면성이 깊어지고 복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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