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17 강(9:1-29) 변형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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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17 강
말씀 마가복음 9:1-29
요절 마가복음 9:2
변형되신 예수님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우리가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초평 여름수양회를 넘치게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말씀과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서 그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제자들처럼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병들고 악한 영에 시달리는 양들을 치료하고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변형되신 예수님(1-13) :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1).”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본다는 말씀은 엿새 후에 있을 변화산의 영광을 본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그 삶에서 십자가 지기를 두려워하고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을 보여주심으로 소망을 주고자 하십니다.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시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3). 이는 변형되기 전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이사야서를 참조하면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간고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잘 드시지 못해서 얼굴은 검고 몸은 말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마른 넝쿨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꾀죄죄하였을 것입니다. 여기 저기 기운 곳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로마 황궁에 앉아서 전로마를 호령하는 가이사 아구스도는 귀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셋방도 없이 사신 예수님은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귀히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사렛 사람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본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요한계시록 1:13-16절을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진짜 모습, 본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셨을 때 연이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야와 모세는 모두가 고난의 종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께 죽기를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영광 중에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치고 고난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하는 요셉이나 다윗 모두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지막은 영광스러웠습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 이것이 성경적인 메시야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언한 만민 구속 역사를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모세도 자기가 출애굽을 했을 때 백성들이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 백성들이 얼마나 불평을 하고 원망을 했는지 말했습니다. 양들은 고집이 세서 언제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위로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책없이 끼어들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5).”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몹시 무서워하므로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영광을 사모하는 가운데 거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영광에 취해 있었습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초막을 지어 보았자 그것이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영광을 어찌 초막으로 기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이 세상도 영원하지 않거든 하물며 초막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헛생각이나 하자 하나님께서 직접 원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이 책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겁 없이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경외심이 있을 때 그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는 길이요 영광을 받는 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면 자기 생각과 다른 말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영광의 메시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서는 눈이 감겨 있었습니다. 그들이 오리라 한 엘리야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여 죽였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통한 영광보다 고난없는 영광을 추구하다보니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나중에 십자가를 모두가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12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평생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큰 빛 가운데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인 낙원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고후 12:2). 그는 이런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매를 맞고 돌로 침을 당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춥고 눌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고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이 하찮게 보였습니다. 그는 고난이 작게 보였기 때문에 날마다 죽고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내가 져야 할 십자가로 인해서 짓눌리는 분이 계십니까? 이는 십자가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활의 영광을 보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것처럼 우리도 변형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큰 영광과 위엄으로 강림하실 때에 우리가 변화됩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그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다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고전15:51-52).” 우리는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나님 우편에 앉히신다고 말씀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사도 바울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과거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늘 우편에 앉으실 때 믿는 자도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어진 모습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수양회의 부활 메시지를 통해서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사님들과 소감 강사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해서 그의 영광이 훼손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더욱 영광스럽게 됩니다.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영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도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당할 수 있는 가난과 손해, 비천해짐, 아픔과 고난이 아름답습니다. 우리 평신도 목자님들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을 일대일 성경 공부로 섬기기 위해서 투쟁을 하고 심방을 하는 모습은 영광스럽습니다. 학생들이 시대의 악한 흐름을 거슬러 영적인 투쟁을 하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지난 주 분당 샘물교회 성도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하러 갔다가 탈레반에게 납치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헌신과 아름다운 삶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고난 앞에서 비굴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이를 맞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나타날 영광을 사모하여 현재 당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14-29) : 세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보니 큰 무리가 아홉 제자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온 무리가 곧 예수님을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그러자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 아이의 부모는 귀신들린 아이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제자들이 전에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쳤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과거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기도하지 않았고 믿음이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에 대한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혀서 고치지 못했습니다(3:15, 6:13).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께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며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또 예수님께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신으로 무능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믿음이 자라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리들 중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소개되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까지 그 후에도 더디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 자립적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없으니 귀신이 너무 세다느니 환경이 어렵다느니 누가 문제라느니 논쟁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탄식했습니다. 그 세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컸고 음란 문화가 퍼져있었습니다. 귀신들린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대의 근본 문제가 불신의 문제임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근본 뿌리를 불신에서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데서 모든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이 없어서 어린 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믿음이 없어서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가장 큰 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 만이 알 수 있는 영적인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가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니 귀신이 그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자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 것입니다. 그 아이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그러면 얼른 이 아이에게 달려들어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아버지에게 주목하시며 물으셨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심기 위해서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보다는 믿음을 심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되 믿음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는지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믿음이 없고 회의적이었습니다. 동시에 솔직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되게 자기의 상태를 알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의 말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능력이 있으면 고쳐주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의 말에는 신앙적인 회의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는 귀신의 세력에서 아이를 고쳐보려고 수많은 노력을 시도해보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깊은 패배감이 생겼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왔지만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아홉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달라고 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서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2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아버지에게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깨우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묻기보다 네가 믿으라는 것입니다. 네가 믿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벼룩 훈련가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입이 넓은 병 속에 벼룩을 넣고 뚜껑을 닫아 버리면 벼룩들은 뛰기 시작합니다. 벼룩들은 툭! 툭! 하면서 점프를 합니다. 어찌하든지 병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튀고 튀고 또 튑니다. 벼룩들은 뚜껑에 부딪히지만 계속 튑니다. 계속 병마개에 까지 부딪치던 벼룩들이 좀 지나면 정상에 까지 튀어 오르지 못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벼룩 훈련가는 뚜껑을 열어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비록 벼룩들은 튀고 또 튀지만 뚜껑이 닫혔을 땐 뚜껑에 부딪히기까지 했던 벼룩들이 병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벼룩들은 절대로 병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위에 있는 뚜껑을 열어젖히고 다시 튀어 오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어떤 제약을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다시 도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시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뚜껑 위로 치솟아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견고한 뚜껑은 내 마음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병을 고쳐주기 전에 아버지의 믿음을 도와주셨습니다. 할 수 없다는 패배적이고 한계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회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다시 도전하라고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그대로 역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임요한 목동은 게임광이었습니다. 인생의 방향도 소망도 없이 살던 그가 믿음으로 숭실대학에 들어가고 이라크에도 파병되었다가 돌아오고 이제는 성적도 4.42나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그 안에 심겨진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마가 목자님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7억1천8백만원의 미수금을 받아냈습니다. 그가 새벽 기도를 믿음으로 감당하면서 체험한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오병이어를 드려서 섬기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진심을 받으시고 이번 수양회를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말씀 강사님들과 연극, 선교보고, 인생 소감, 특송, 특주, 참석자한 양등 우리의 기도를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믿음은 고백을 할 때 생깁니다. 우리도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내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의 결혼과 장래를 책임져 주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학과 공부와 양들을 변화시켜 주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자녀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이렇게 믿음을 고백했지만 마음에 찾아오는 불신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다시 기도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불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불신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믿음을 갖고자 하는 우리의 좋은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섰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믿음을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습니다. 이런 종류란 악한 영의 종류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목표를 정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반복해서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노동이고 전쟁입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수양회에 참석한 새 양들을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먹는 훈련을 하고 새벽 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하는 ‘벼룩 훈련가’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벼룩 훈련가는 병 밖으로 튀어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는 부정적인 외부 환경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목표와 비전을 갖고 다시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가복음 9:1-29
요절 마가복음 9:2
변형되신 예수님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우리가 드린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초평 여름수양회를 넘치게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말씀과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서 그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제자들처럼 영광스럽게 변형되신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 병들고 악한 영에 시달리는 양들을 치료하고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변형되신 예수님(1-13) :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1).”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본다는 말씀은 엿새 후에 있을 변화산의 영광을 본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그 삶에서 십자가 지기를 두려워하고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을 보여주심으로 소망을 주고자 하십니다.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시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3). 이는 변형되기 전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이사야서를 참조하면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간고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잘 드시지 못해서 얼굴은 검고 몸은 말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마른 넝쿨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꾀죄죄하였을 것입니다. 여기 저기 기운 곳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로마 황궁에 앉아서 전로마를 호령하는 가이사 아구스도는 귀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셋방도 없이 사신 예수님은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귀히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사렛 사람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본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요한계시록 1:13-16절을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진짜 모습, 본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셨을 때 연이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야와 모세는 모두가 고난의 종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께 죽기를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영광 중에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치고 고난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하는 요셉이나 다윗 모두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지막은 영광스러웠습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 이것이 성경적인 메시야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가 예언한 만민 구속 역사를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모세도 자기가 출애굽을 했을 때 백성들이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 백성들이 얼마나 불평을 하고 원망을 했는지 말했습니다. 양들은 고집이 세서 언제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위로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책없이 끼어들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5).”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몹시 무서워하므로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영광을 사모하는 가운데 거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영광에 취해 있었습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초막을 지어 보았자 그것이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영광을 어찌 초막으로 기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이 세상도 영원하지 않거든 하물며 초막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헛생각이나 하자 하나님께서 직접 원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이 책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겁 없이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경외심이 있을 때 그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는 길이요 영광을 받는 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경외한다면 자기 생각과 다른 말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영광의 메시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서는 눈이 감겨 있었습니다. 그들이 오리라 한 엘리야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여 죽였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통한 영광보다 고난없는 영광을 추구하다보니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세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나중에 십자가를 모두가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12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평생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큰 빛 가운데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인 낙원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고후 12:2). 그는 이런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매를 맞고 돌로 침을 당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춥고 눌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고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이 하찮게 보였습니다. 그는 고난이 작게 보였기 때문에 날마다 죽고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내가 져야 할 십자가로 인해서 짓눌리는 분이 계십니까? 이는 십자가가 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활의 영광을 보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것처럼 우리도 변형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큰 영광과 위엄으로 강림하실 때에 우리가 변화됩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그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다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고전15:51-52).” 우리는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나님 우편에 앉히신다고 말씀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사도 바울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과거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늘 우편에 앉으실 때 믿는 자도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어진 모습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수양회의 부활 메시지를 통해서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사님들과 소감 강사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해서 그의 영광이 훼손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더욱 영광스럽게 됩니다.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영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도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당할 수 있는 가난과 손해, 비천해짐, 아픔과 고난이 아름답습니다. 우리 평신도 목자님들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을 일대일 성경 공부로 섬기기 위해서 투쟁을 하고 심방을 하는 모습은 영광스럽습니다. 학생들이 시대의 악한 흐름을 거슬러 영적인 투쟁을 하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지난 주 분당 샘물교회 성도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봉사하러 갔다가 탈레반에게 납치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헌신과 아름다운 삶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고난 앞에서 비굴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이를 맞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나타날 영광을 사모하여 현재 당하는 고난을 기쁨으로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14-29) : 세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보니 큰 무리가 아홉 제자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온 무리가 곧 예수님을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그러자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 아이의 부모는 귀신들린 아이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자들에게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제자들이 전에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쳤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과거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인간적인 생각 때문에 기도하지 않았고 믿음이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에 대한 시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혀서 고치지 못했습니다(3:15, 6:13).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께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며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또 예수님께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신으로 무능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믿음이 자라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리들 중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소개되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까지 그 후에도 더디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 자립적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없으니 귀신이 너무 세다느니 환경이 어렵다느니 누가 문제라느니 논쟁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탄식했습니다. 그 세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컸고 음란 문화가 퍼져있었습니다. 귀신들린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대의 근본 문제가 불신의 문제임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근본 뿌리를 불신에서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데서 모든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이 없어서 어린 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믿음이 없어서 고치지 못한 것입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가장 큰 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 만이 알 수 있는 영적인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가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니 귀신이 그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자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 것입니다. 그 아이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그러면 얼른 이 아이에게 달려들어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아버지에게 주목하시며 물으셨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심기 위해서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보다는 믿음을 심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되 믿음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는지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믿음이 없고 회의적이었습니다. 동시에 솔직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되게 자기의 상태를 알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의 말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능력이 있으면 고쳐주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의 말에는 신앙적인 회의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는 귀신의 세력에서 아이를 고쳐보려고 수많은 노력을 시도해보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깊은 패배감이 생겼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왔지만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아홉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달라고 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서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2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아버지에게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깨우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묻기보다 네가 믿으라는 것입니다. 네가 믿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벼룩 훈련가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입이 넓은 병 속에 벼룩을 넣고 뚜껑을 닫아 버리면 벼룩들은 뛰기 시작합니다. 벼룩들은 툭! 툭! 하면서 점프를 합니다. 어찌하든지 병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튀고 튀고 또 튑니다. 벼룩들은 뚜껑에 부딪히지만 계속 튑니다. 계속 병마개에 까지 부딪치던 벼룩들이 좀 지나면 정상에 까지 튀어 오르지 못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벼룩 훈련가는 뚜껑을 열어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비록 벼룩들은 튀고 또 튀지만 뚜껑이 닫혔을 땐 뚜껑에 부딪히기까지 했던 벼룩들이 병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벼룩들은 절대로 병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위에 있는 뚜껑을 열어젖히고 다시 튀어 오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어떤 제약을 두지 아니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다시 도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시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뚜껑 위로 치솟아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견고한 뚜껑은 내 마음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병을 고쳐주기 전에 아버지의 믿음을 도와주셨습니다. 할 수 없다는 패배적이고 한계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회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다시 도전하라고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그대로 역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임요한 목동은 게임광이었습니다. 인생의 방향도 소망도 없이 살던 그가 믿음으로 숭실대학에 들어가고 이라크에도 파병되었다가 돌아오고 이제는 성적도 4.42나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그 안에 심겨진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마가 목자님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7억1천8백만원의 미수금을 받아냈습니다. 그가 새벽 기도를 믿음으로 감당하면서 체험한 승리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오병이어를 드려서 섬기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진심을 받으시고 이번 수양회를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말씀 강사님들과 연극, 선교보고, 인생 소감, 특송, 특주, 참석자한 양등 우리의 기도를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믿음은 고백을 할 때 생깁니다. 우리도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내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의 결혼과 장래를 책임져 주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학과 공부와 양들을 변화시켜 주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자녀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이렇게 믿음을 고백했지만 마음에 찾아오는 불신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다시 기도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불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불신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믿음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믿음을 갖고자 하는 우리의 좋은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섰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믿음을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습니다. 이런 종류란 악한 영의 종류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목표를 정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반복해서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노동이고 전쟁입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수양회에 참석한 새 양들을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먹는 훈련을 하고 새벽 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승리하는 ‘벼룩 훈련가’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벼룩 훈련가는 병 밖으로 튀어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는 부정적인 외부 환경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목표와 비전을 갖고 다시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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