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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16 강(8:27-38) 주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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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49회 작성일 07-07-08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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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16 강                                                               
말씀 마가복음 8:27-38
요절 마가복음 8:29

주는 그리스도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고백은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사도 신경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앙 고백은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예수님을 잘 알고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받은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라야 합니까?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제자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는 예수님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유대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임명을 받을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으로서 사역을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총명한 사람도 뛰어난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16:17절에서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구원자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므로 결국 우리 각자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 그리스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그리스도란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과 광풍을 잔잔케 하신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만이 절대적인 구원자이십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독선적이라고 말합니다. 불교나 유교나 힌두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포용적인데 기독교만이 배타적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종교의 추구하는 목적은 다 똑 같이 인간의 행복이고 가는 길만 다르니 아무 종교나 하나 선택해서 믿으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이런 것은 상대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불교의 석가나 유교의 공자나 이슬람교의 마호멧은 모두가 인간입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모두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이 창시한 종교도 인간이 만든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한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뤄 주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어떤 신도 섬겨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요14:6). 베드로는 천하에 예수님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행 4:12). 이 시대에도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돈도 과학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힘을 바쳐서 사랑할 유일한 대상입니다. 중국의 석학 임어당은 중국의 많은 사상을 섭렵하고,「생활의 발견」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년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양은 떴다. 촛불을 꺼라.” 우리는 태양처럼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모든 촛불을 꺼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지금 살아계신 왕, 선지자,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보면 그리스도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그리스도는 실제적인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중풍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세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친히 살아서 세계선교의 역사를 진두지휘하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공회의 제사장이나 헤롯왕이나 로마 총독이나 로마 황제보다 더욱 큰 분이십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그들의 살아 있는 왕으로 믿고 이를 세상 권세자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전파했습니다. 사도들에게 그리스도는 쇠사슬을 벗겨 주시고 옥문을 열어주시는 지극히 크시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왕으로 믿었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쇠사슬에 매여 있었을지라도 세상 권세자 앞에서 당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을 이렇게 현재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에도 거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셔서 우리의 생사화복, 직장, 가정, 학과, 친구, 건강 등 모든 문제를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살리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전생애를 책임지시고 인도해주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문제 많은 우리에게 놀라운 상담자요, 무능한 우리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의지할 것 없는 우리에게 영원히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시오,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경배의 대상이시오,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할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이나 연인이나 직장 상관을 그리스도로 모시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두려워 떨지만 예수님을 인하여는 떨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데서 만족을 얻고자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항상 세상적인 것에 우선적 가치를 두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맨 나중에 시간과 물질을 드립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다면 예수님께 최우선적 가치를 두고 예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구원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롬10:9-10). 우리가 순간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고백하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십니다. 이 세상을 살 때 악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친히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살아계심을 여러 표적으로 드러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죄 많은 시대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경배해야 합니다.
 
  31-3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정치적인 라이벌이나 적대적인 모든 사람을 패배시키고 없앰으로서 권력을 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은 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지독한 이기심을 인해서, 더러운 음란과 정욕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교만을 감당하기 위해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인해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악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행2:24). 그리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빌 2:10).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 값을 치루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자신이 고난을 받고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항변했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책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영광의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사람들의 인기를 한참 얻고 있고 이대로 밀고 나가면 대권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 배와 그물과 가족들을 버렸지만 이제 그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그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죽어버리시면 예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버린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버림을 받을 수도 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가치가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들에게 버림받지 않고자 노력을 하지 않는가 불만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존재와 그 가르침이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장로들의 전통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또 사람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킴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반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죽어야 부활을 하는데 죽는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부활하신다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는 것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반복해서 말씀을 심으시고 영광을 보여 주시고 나서 9:10절에 가서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고난을 받으리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버림받고 배척을 받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메시야를 따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회개하고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의 길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초인적인 크리스챤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에게든지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말세의 특징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딤후 3:1-2).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우상은 자기 숭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완성, 자기성취, 자기만족을 위해서 삽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높이고자 하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받고자 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자기 영광을 높이는 쪽으로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기를 버리는 투쟁을 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 수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를 세우고자 하다가 허무하게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 안에 있는 죄악되고 타락한 자기를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자기부인”이란 자기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앞세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은 적자생존의 싸움터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6:33절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인생에서 한 가지 신비는 이 세상에 고통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윌리암 캐리는 매우 헌신적이고 용기있는 인도의 개척 선교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오랜 세월 동안 정신병에 걸려서 옆방에 있으면서도 방문을 닫고 살았습니다. 그녀는 결국 슬프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윌리암 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인생의 비극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면 그는 크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내적인 문제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생전에 3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초대 크리스챤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알았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을 때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와 같이 죽어야합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월급이 작은 직장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삶에서 즐겁지 않은 부분에서 단순히 인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 목적과 사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챤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삽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는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마9:37-38).”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크리스챤 중 90%가 30대가 되기 전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대입시를 준비하면서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신앙생활을 하지만 신입생 때에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하는 25%의 학생이 졸업 때 쯤 되면 5%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하는가 알 수 있습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투쟁, 자기가 죽는 고통을 감당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 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같지만 결국은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십니다(딤후 1:7).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강하게 도우실 것입니다(빌4:13). 인생에서 부딪치는 시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달리고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안에서 그의 선하신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여시고 매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기억하게 하시고 결코 부끄럽지 않게 하십니다. 도리어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한편 자기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예수님과 복음을 부끄러워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안개와 같은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베드로가 생각한 것처럼 이 땅에서 영광을 얻고 재미있게 편하고 쉽게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반드시 부활이 있고 재림이 있습니다. 그 부활의 때에, 재림의 때에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요, 복된 사람입니다. 저희들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자기부인의 길,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가서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당연히 나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특권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 전적인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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