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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15 강(8:1-26)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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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90회 작성일 07-07-01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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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15 강                                                               
말씀 마가복음 8:1-26
요절 마가복음 8:2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 주 수로보니게 여인의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과 믿음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 칠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심으로 제자들을 목자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누룩들이 있으면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순수하고 진실함으로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달음은 매우 더뎠습니다. 예수님은 한 맹인의 눈을 단계별로 뜨게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여름 수양회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1-21) :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이르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무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사흘 동안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의 심령에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느라 배고픈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양식보다 하늘의 양식을 먹음으로 참 만족을 누렸습니다. 우리 시대는 먹을 것이 풍족하고 즐길 것도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불만족의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던 무리들은 먹을 것이 없었지만 군소리 없이 삼일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 할까봐 염려하셨습니다.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먹여서 보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난 번 오병이어 사건을 기억하고 믿음을 보여 주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은 여전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지난번에는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어디서도 그 많은 떡을 구할 수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불신과 우둔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과 똑같은 상황에서 지난번에는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그때에 비해 먹여야 할 인원도 천명이나 줄었는데 그들은 응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식입니다. 그들은 지난 번 사건을 통해서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먹고 즐긴 것 같습니다.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나의 능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신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쉬워지면 믿음으로 하기보다 나의 능력으로 하고자 합니다. 아니 문제가 좀 어려워지면 더욱 나의 힘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크건 작건 주님을 의지해서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로 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이유를 다양하게 표현할 줄 압니다. 할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하는 데는 청산유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책을 내라고 하면 유구무언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제자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님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셨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있는 것을 찾아서 주님께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같은 상황에서 같은 방법을 쓰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제자들에게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름 수양회를 준비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느낍니다. 80명 초청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데 학생들은 방학이라 집에 갔습니다. 연극을 섬겨야 하는데 배우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학사들은 학사대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작년 여름 수양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데 기억해야 합니다. 작년 여름 수양회에 학생들이 몇 명이나 참석했습니까? 24명입니다. 거기서 누가 크게 변화되었습니까? 허바울 형제님이요. 그때 연극 역사는 어떠했습니까? 아주 좋았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어떠했나요? 무엇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오병이어를 드리는 믿음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작년이나 올해나 변함없이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올해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드려서 믿음으로 여름 수양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요한 목자님은 지난 주 휴가를 내서 두 명의 양들을 심방하고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도록 도왔습니다. 저도 함께 동행했습니다. 양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고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작은 것 속에서 가능성을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일대일, 합심하는 기도, 작은 섬김과 동역 속에서 가능성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초라하게 생각해서 꺼내놓기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찾아서 믿음으로 드릴 때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작지만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천 명을 어떻게 먹이셨습니까?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떡을 배부르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또 생선 두어 마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무리들 약 사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신 후에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반복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부족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라든가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기 위해서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일용할 양식 훈련을 사십 년 동안이나 시키셨습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을 의지해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반복교육을 통해서 믿게 하셨습니다. 반복교육을 할 때 인내가 필요합니다. 훈련을 하려면 반복해야 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실제 생활에서 능력이 나타나려면 반복해서 몸에 익혀야 합니다. 반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진전이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일수록 반복해서 실천함으로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벽기도, 일대일, 좋은 습관들은 반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습관들이 여러분을 성공의 반열에 세울 것입니다.

  칠병이어 사건 이후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가자 어떤 시험이 있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기적의 현장에 없었다면 소문을 믿지 못해서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일부라도 있었다면 그럴 리 없다는 불신으로 재차 확인하려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신 것이 어디 한 두 번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삶 자체가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표적을 다시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표적은 재미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 주려고 하는 마술과 같은 것도 아닙니다.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의 불신과 완악함으로 인해서 탄식하셨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지도자로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양들을 인도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힐난하고자 했습니다. 힐난이란 캐고 따져서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좋은 머리를 말씀을 파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비난할 꼬투리를 찾기 위해서 굴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탄식하시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13). 믿지 않고자 하는 이들에게 표적을 보여 준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도 아니하시고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은 실족시키고자 함이 아니라 믿음을 키워주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경배의 대상이지 시험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물론 기드온이나 삼손의 부모 등은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께 시험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들의 요청을 받으시고 믿음을 갖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기보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또 나의 생애 가운데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여 믿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일행은 바리새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급히 떠나느라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습니다. 일곱 광주리의 떡을 다 놓고 안드레가 가면서 먹기 위해서 주머니에 넣어온 떡 한 개 밖에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그 많은 떡을 놓고 온 것으로 인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떡이 한 개 밖에 없으니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나 걱정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그를 시험하는 것을 보고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영적인 지도자들이 되어 한 시대를 이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장래를 염려하여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보다 장로들의 유전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이 외식으로 흘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겸손히 배우지 못하고 교만하여 판단과 정죄만 일삼았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원수같이 여기던 헤롯과 동역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헤롯의 누룩은 음란하고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지도자로서 이런 자세를 갖게 되면 백성들에게 전혀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누룩에 뜨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누룩이란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우리가 빵을 만들 때 적은 누룩으로도 한 다라의 밀가루를  발효시킬 수 있습니다. 또 누룩이 한번 들어가면 빼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도자로서 누룩이 없이 순수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실제적인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제자들의 수준은 아직 빵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항상 먹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먹고서도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먹을까, 어디서 먹을까,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찰떡이 붙은 것 같이 떡에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실망이 되셨던지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예수님은 연달아 일곱 가지 질문을 따발총을 쏘듯이 갈기셨습니다.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는지, 아직도 그렇게 깨달음이 없는지 답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문제로 염려에 빠지게 되면 마음이 둔해집니다. 그들은 두 개씩이나 되는 눈을 달고도 보지 못하고, 두 개씩이나 되는 귀를 가지고 있어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밥통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밥벌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신랄하게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자기 문제를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서 이렇게 심한 말로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해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열 둘입니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일곱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21)? 

  그러면 제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떡 한 개를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누구에게 떼어 줄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떡 다섯 개를 떼어 줄 때에 열 두 바구니가 남았고, 일곱 개를 떼어 줄 때에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떡 한 개를 떼어 주면 얼마나 남을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많이 가지고 있으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없을 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배부르고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누구에게든 떼어주면 남을 것입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풍성하게 하는 방법은 내가 가진 것을 믿음으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먹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셨습니까? 사르밧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를 불러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의 말이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녀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순종했을 때 그들뿐만 아니라 엘리야도 기근 중에 잘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이런 진리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UBF역사는 바로 이런 역사입니다. 선교사를 받기만 하고 파송할 생각을 할 수 없던 시대에 말씀에 의지해서 동남아시아와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했을 때 한국도 풍성해지고 90개국에 1500명의 자비량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만을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이 될 때 생각과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돕고자 할 때 자신의 문제도 해결되고 남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제자들은 지금 떡 하나 밖에 가진 것이 없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것으로 무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먹을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짐승도 아니고 그런 것만 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 해주십니다(마6:33). 문제는 떡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우리가 삶에서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깨달음은 직관이라고도 할 수 있고 통찰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 마음에 들어온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누룩이 들어오면 마음이 뜨게 되어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실과 정직은 지도자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우리가 리더가 될수록 다른 사람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외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리더들에게 원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정직함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회개하는 생활을 하고 실제 생활에서 적용을 하면 깨달음이 분명해집니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셨던 역사를 기억할 때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역사의식이 있을 때 지식이 축적되고 통찰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삶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2. 맹인을 단계적으로 고치신 예수님(22-26) :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시자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눈에 침을 탁하고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이상하십니다. 어떻게 맹인이 안 보인다고 그 눈에 침을 뱉을 수 있을까요? 치료를 하시는데 좀 더럽습니다. 침이 당시에 치료제로 쓰였다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맹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단계적으로 고쳐주셨습니다. 맹인의 눈이 점차 밝아지는 것을 본 제자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눈도 점진적으로 밝아질 것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영적 미성숙에 대해서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시고 소망 가운데 키우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오래 참으시면서 도우신 것을 기억하고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 까지 힘써 섬겨야 합니다. 양들이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목자요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을 믿어야겠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믿음으로 나누어 줄 때 풍성하게 먹이심을 알았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을 때 믿음으로 나누는 것이 풍성하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섬기면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서 드림으로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3박 4일 동안 조용하고 시원한 곳에 가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생명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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