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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14 강(7:24-37) 이 말을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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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65회 작성일 07-06-2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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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14 강                                                               
말씀 마가복음 7:24 - 37
요절 마가복음 7:29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오늘 말씀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온 내용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딸로 인해서 탄식하며 지내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탄식이 변하여 믿음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보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영적인 현실을 볼 때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에바다! 열리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자 그 혀가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습니다. 사람은 말을 분명하게 하고 또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이란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건강할 때 건강한 말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바른 마음, 건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 시간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아뢰는 가운데 우리의 말 못할 인생 문제들에서 나음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1. 이 말을 하였으니(24-30) :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했으나 숨길 수 없었습니다. 두로 지방은 항구도시로서 그 주민들은 부유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옛적부터 무역을 잘해 부강했고 가나안 우상 숭배의 진원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로 지방은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핍박을 떠나 제자들을 키우는데 힘을 쓰고자 이방 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방 땅에 들어가셨지만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의 빛이시오 생명의 빛이요 태양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때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란 시리아 페니키아 족속이란 뜻입니다. 헬라인은 당시 지성의 꽃을 피운 사람들이요 문명화된 민족입니다. 페니키아에서 알파벳이 만들어졌습니다.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의 꽃을 피운 그곳에서도 더러운 귀신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이 여자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딸이 언제부터인지 귀신들려 행하는 모습을 볼 때 탄식하며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딸이 귀신이 발작을 하면 욕지거리를 하고,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고, 섬뜩한 표정으로 자기 엄마를 위협했습니다. 때로는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자기 방에 쳐 박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런 중에 이 헬라 여인은 이스라엘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여인의 마음에 심겨지자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원수 같은 이방인이요 또 여자로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믿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마 15:22).”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가 탄식하며 간구했습니다. 이 여인은 딸의 고통과 수치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귀신의 세력, 죄의 세력, 어두운 세력에서 나의 사랑하는 딸을 구원해 달라는 이 어머니의 기도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영적인 자녀들, 육적인 자녀들을 위해서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을 더러운 귀신에게서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께 나아가 탄식하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구하는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아니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쌀쌀맞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원수 같은 이방인이라고 감정대로 대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인종차별하시는 것입니까?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여인도 예수님은 인내와 사랑으로 감당해 주셨는데 어찌 이렇게 차갑게 대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먼저 자녀를 배불리 먹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목자로 오셨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24절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교전략은 이스라엘을 먼저 풍성하게 축복하사 제사장 나라로 만드시고 그들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먹이는 것입니다. 한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인 편에서 생각해 보면 이는 정말 자신을 깔아뭉개는 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인은 자존심이 상해서 으르렁 거리며 한번 물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당한 것이 얼만데 예수님마저 이러실 수 있느냐며 반발할 수 있습니다. “나보고 개라고요 그럼 어디 한번 물려 보세요.”라며 손톱에 날을 세우고 대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은 시원할 수 있지만 일이 꼬이고 자신은 더욱 비참하게 됩니다. 자신을 개라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일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대답을 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차가운 말씀을 들었을 때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감정적으로 받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생각은 지당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옳소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는 것은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빵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빵 한 덩이가 아니고 단지 빵부스러기에 불과하오니 그것조차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유대인들이 병 고침의 기적을 풍성하게 받은 것에 비하면 자기 딸을 고쳐주시는 것은 빵부스러기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한 방 먹으신 것 같습니다. 이방 여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놀라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귀신이 그 어린 딸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러면 “이 말을 하였으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주여 옳소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시오 자신은 개 같은 이방인임을 인정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반발하거나 대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주권자시오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행사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입니다. 주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여인은 자신이 개 같은 존재임을 인정했습니다. 여인은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께 혈기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개같이 비천한 존재임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식 잘못 키운 죄 많은 여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다 마음이 부패하여서 더러운 것들을 토해 냅니다. 또 그 토한 것들을 다시 먹는 더러운 개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사야 41: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서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하셨습니다. 이전 번역에서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입을 통해서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내려가게 될 것인가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벌레요, 사람들에게 밟히는 진흙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되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슬픔과 죄와 질고를 담당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에 지혜가 임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개라고 불릴지라도 들개가 아니라 주인의 사랑을 받는 애완용 개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유우머와 재치가 있습니까? 또 주님이 부스러기 같은 은혜를 주시기만 해도 아이가 나을 수 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 여인은 믿음의 여장부였습니다. 예수님의 무시하는 듯한 말씀을 받아 넘길 수 있는 내면이 건강한 여인이었습니다. 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사람이 겸손하면 주님의 무한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데도 쥐꼬리만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서 은혜의 세계, 믿음의 세계라는 문턱을 넘지 못해 넘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자존심을 꺾고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 앞에는 무한한 은혜와 축복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그는 아람 왕의 군대장관으로 존귀한 자였으나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문둥병을 고침 받기 위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로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한 번 문밖에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통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전달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심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는 화를 내며 ‘우리나라에 요단강보다도 좋은 강이 얼마든지 있다.’하며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옆에 있던 종이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말했으니 들읍시다. 선지자가 더 큰 일을 하라고 해도 우리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는 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그는 자존심을 꺾고 하나님의 종이 말한 대로 순종했습니다. 이때 문둥병이 깨끗이 나음 받는 은혜를 덧입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목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히 고난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양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내가 받아야 할 수치와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장차 받을 영광은 현재 받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둘째, 여인의 말은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던지시는 부스러기만으로도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한 덩이 빵이 아니라 부스러기 같은 것이 라도 귀하게 여기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더러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하여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아주시지 않으면 나는 갈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매달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상 위에서가 아니면 상 아래서라도 먹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에라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상태가 심하든 약하든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건강한 인생, 열매 맺는 인생, 비전이 충만한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다. 축복의 통로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전에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기 위해서, 강하게 하기 위해서, 축복 때문에 오히려 병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욥이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욥기 13:24절에 보면 이렇게 토로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도대체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왜 나를 이 고난 속에 놔두시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한 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로다(욥23:10).” 욥은 하나님의 침묵이 자신에 대한 저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임한 환난이 자신을 단련하기 위한 축복의 훈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정금같이 영광스럽게 만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차원 높은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속이 상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였지만 욥은 끝까지 순전을 지켰습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욥기 42: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부어주셨습니다. 이런 외적인 축복보다 더 귀한 신령한 복을 그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는 것 같지만 우리를 위한 차원 높은 축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사 고난 받는 자들의 위로자요 복의 근원으로 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탄식이 주님의 응답으로 기쁨의 노래로 변하기를 기도합니다.
 
  2.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신 예수님(31-37) : 예수님은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귀가 나쁘면 대개 말도 더듬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말을 잘해서 은혜를 받았는데 이 사람은 메시야가 오셨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고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답답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고쳐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의 믿음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그의 살아 있는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여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몸부림치며 탄식하셨을까요? 그 사람이 답답하고 불쌍했을 뿐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먹고, 하는 말이 몹쓸 말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고, 또 말에도 겸손과 믿음이 있고, 여유와 재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그 말이 악하기만 했습니다. 회당에서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가 엿보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벙어리처럼 잠잠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입을 열면 예수님을 향하여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블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식의 악하고 상처 주는 말만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말씀을 듣고 이적을 보았지만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를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드뭅니다. 아니,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들의 말만 듣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서 이상하고 천하고 악한 말을 합니다. 또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가치관과 인생관이 정해집니다. 이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귀가 먹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없으니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에바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말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시고 저희들에게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경계하셨습니다. 그런데 경계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널리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심히 놀라서 말했습니다.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저자 마가는 그들의 말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사 35:5,6).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지금도 귀먹고 말 더듬는 우리들을 고쳐주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말이 분명해지면 가치관이 분명해지고, 소원과 꿈이 분명해지고, 사명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그 삶이 분명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말이 분명해 지려면 마음이 치료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과 말을 치료하시고 말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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