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13 강(7:1-23) 마음을 깨끗이 씻어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07년 마가복음 제 13 강
말씀 마가복음 7:1 - 23
요절 마가복음 7:23
마음을 깨끗이 씻어라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은 깨끗하고 순수함을 좋아합니다. 만약 씻지 않은 그릇에 담긴 병균이 득실거리는 음식을 먹고 더러운 물을 마시며 산다면 쉽게 병에 걸리고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깨끗한 음식, 깨끗한 환경뿐만 아니라 몸을 깨끗하게 하고자 많은 노력을 합니다. 우리의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더럽고 지저분하면 성공을 해서 사람들이 부러워해도 자신에 대해서 자존감을 가질 수 없고 심판의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겉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면 마음이 늘 개운하여 어디에 가도 무엇을 해도 떳떳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어떻게 마음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겉으로 율법을 잘 지키기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1-7). 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중 몇이 와서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지방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당할 수 없으니까 예루살렘에서 지원을 나온 ‘종교적인 저격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데 손끝에서 팔뚝까지 물을 흘려서 씻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쁘다보니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는 밥맛이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쩝쩝거리며 요란하게 밥을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한 랍비는 감옥에 갇혔을 때 식수로 손을 씻는데 쓰느라 갈증으로 죽었을 정도로 철저하게 전통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샤워를 하지 않고는 먹지 아니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릇은 반질반질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장로들의 전통이 생긴 내력은 이러합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나 레위기나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율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이 율법을 지키려면 구체적인 시행세칙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는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출 20:8-11), 그러면 음식을 만드는 일이나, 아플 때나 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한 세칙이 필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지나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달라지고, 생활양식이 변함에 따라 더 많은 세칙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런 세칙들은 그때그때 연세가 많고 학식이 높고 신앙심이 깊은 어른들, 즉 장로들에 의해서 정해지고,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왔습니다. 이를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패망하여 포로로 끌려간 후 이스라엘이 다시 일어나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민족적인 각성이 일어나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성문화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미슈나’요,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책이 ‘탈무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전통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로들이 정한 ‘사람의 계명’(7)이요 ‘사람의 전통’(8)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지 사람의 계명이나 전통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손을 씻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입에 달고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돈에 가 있었고, 명예와 인기에 가 있었고, 또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말끝마다 하나님,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손을 부지런히 씻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겉을 꾸며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하거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거나 자신이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 우리는 마음에 있는 탐욕과 음탕과 불법을 방치하게 되고, 점점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려면 일을 잘한다는 사람들의 인정에 만족하지 말고 또 자기는 남보다 더 의롭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보다 마음을 받기 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제사보다 마음의 신령한 예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신명기 6:5절에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둘째, 자기 유익과 편안함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야 합니다(8-13). 8,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탈무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에 상충하는 것보다 랍비들의 목소리에 상충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더욱더 심한 범죄다.”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 율법 즉 하나님의 권위보다 더욱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한 수도원에 쥐가 하도 많아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매우 버릇이 없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단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장이 예배 시간에는 고양이를 문 앞에 묶어 두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수도원장도 죽고 고양이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배 시간에 늘 있던 고양이가 없는 것이 섭섭하여 잘 놀던 고양이 한 마리를 잡아다가 예배 시간에 문 앞에 묶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전통을 잘 지킨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전통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민수기 30장에 나오는 서원을 경직되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르반이 선언된 것이라도 그 소유자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있다고 유전은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 중의 하나를 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르반을 선언한 사람은 마음을 바꾸어서 그것으로 부모님을 도우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서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한 부분을 사용해서 다른 부분을 부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기 한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빵을 꺼내 혼자 먹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괘씸하기도 하고 배가 고프기도 해서 넌지시 말했습니다. “저는 요즈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혼자 빵을 먹던 사람이 “그래요? 저는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에서 많은 은혜를 받는 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유익과 합리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합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사모님들이 양을 친다는 우리의 고르반을 앞세워 집안 살림을 게을리 할 수 있고, 목자님들이 소감이라는 우리의 고르반을 앞세워 센터에만 있으면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아내를 돕는 일을 외면할 수 있고, 학생 목자들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우리의 고르반을 앞세워 공부에 태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 생신이나 회갑 등에 참석하여 효를 행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부모님을 섬겨야 하는 것도 다 한 때입니다. 돌아가시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은 그 은혜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이 하나님 보다 위에 서면 안 됩니다. 오늘날은 가족을 굉장히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도 하나님 안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지만 가족들에게 교회 밖에 모른다고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족사를 챙기는 일에 대해서 성숙해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준비된 마음으로 와야 하지만 경배와 찬양 시간이 지나서야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경배와 찬양도 예배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 된 전통들은 살리고 시대에 맞지 않는 것들은 바꾸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유익과 편의를 앞세우면 절대 마음이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어떤 손해가 따르고 어떤 고난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라야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마음을 씻어야 합니다(14-23).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시 무리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유대인들은 더러운 것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망치는 것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더러운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프거나 위가 그것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설사를 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몸은 청결을 유지합니다. 음식이나 씻지 아니한 손으로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부정하게 하는 음식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행 10:14-15, 15;28-29).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물었습니다(17).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18,19).” 그러면 사람을 진정으로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0-23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라는 것은 끊임없이 속에서 나와서 우리를 더럽힙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더럽힙니다. 더러운 언어가 사람의 인격을 더럽힙니다. 음란한 생각이 우리를 더럽힙니다. 탐욕은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자 합니다. 탐욕은 더 가지는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리려는 폭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사람을 얼마나 추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또 내 분노가 나를 망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질투, 내 속에 있는 비방, 내 속에 있는 교만, 내 속에 있는 우매함이 나를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버렸을 때부터 사람의 마음은 음란과 탐욕과 악독과 교만이 나오는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시편 14편의 시인은 한탄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렘 17:9).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인간의 부패는 절망적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눈을 감고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칼을 갈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인터넷이나 영상 등을 보면서 마음으로 간음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봅시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대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월감에 사로잡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고 때로는 열등감으로 괴로워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고르반 유전으로 부모님께 불효하지 않았는지 돌이켜 봅시다. 하나님께 허락하신 귀한 동역자를 사랑하지 못하고 섬김 받기만을 요구하고 섬기는 생활에는 게으르지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자녀들을 무책임하게 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학교와 직장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죄와 타협하지 않았는지 상관들이 두려워서 죄악된 문화 속에 끌려 다닌 적이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모임에 부족한 것을 주인의식을 가지고 감당하고자 애를 쓰기보다 지도자를 탓하며 비판한 하지는 않았는지. 나를 위해서는 시간과 물질을 마음대로 쓰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육체가 더러워지면 씻으면 되는데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회개해야 합니다. 요엘 2:1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우리가 마음을 찢어 회개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손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열심히 씻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꾸 숨깁니다. 자꾸 씻는 일을 뒤로 미룹니다. 우리 안에서 죄의 소욕이 끊임없이 솟아올라오기 때문에 마음에 죄의 쓰레기는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오래 놔두면 금방 파리가 끓고 악취가 나기 때문에 열심히 내다 버립니다. 그러나 마음의 쓰레기는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도 별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구더기가 들끓는데도 그냥 꾹꾹 참습니다. 설마 다른 사람이 알랴 하면서 대강 덮어 버립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런데 하면서 합리화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 양심에 지적하시는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요일 1:8-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둘째로, 예수의 피를 믿어야 합니다. 레위기 17: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우리는 더러운 죄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어떤 흉악한 죄라도 다 씻어냅니다.
셋째로, 우리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따라 삼가야 합니다. 시편 119: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진리의 말씀으로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가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높여드리는 삶을 추구하다 보면 깨끗한 일생을 살게 됩니다. 깨끗한 삶은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삶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고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진정한 거룩을 실천하게 됩니다.
넷째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도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일회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몸에 짊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에스겔 36:26,27절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사도행전 2:38절은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몸을 의의 병기로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통하여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잘라버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더러운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사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이 더러운 것을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영접하면 음란한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어지고 거룩한 삶을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마음을 씻을 때 탐욕이 사라지고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심지어 전에는 불행하고 힘들어하던 일도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을 씻으면 교만을 부리며 유치하고 지저분하게 살기보다 겸손하고 성숙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마음을 씻으면 행패 부리며 피 튀기는 삶을 멋으로 여기던 사람이 온유하고 덕을 세우는 삶, 정말 멋있고 깨끗한 삶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의롭다 여기고, 손 씻었으니까 깨끗하다고 주장하며 자기를 속이면, 절대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위선과 거짓이 생겨 더욱 더욱 더러워질 뿐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공동체가 건강해지고 이 사회를 밝히는데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말씀 마가복음 7:1 - 23
요절 마가복음 7:23
마음을 깨끗이 씻어라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은 깨끗하고 순수함을 좋아합니다. 만약 씻지 않은 그릇에 담긴 병균이 득실거리는 음식을 먹고 더러운 물을 마시며 산다면 쉽게 병에 걸리고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깨끗한 음식, 깨끗한 환경뿐만 아니라 몸을 깨끗하게 하고자 많은 노력을 합니다. 우리의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더럽고 지저분하면 성공을 해서 사람들이 부러워해도 자신에 대해서 자존감을 가질 수 없고 심판의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겉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면 마음이 늘 개운하여 어디에 가도 무엇을 해도 떳떳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어떻게 마음을 깨끗이 씻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겉으로 율법을 잘 지키기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1-7). 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중 몇이 와서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지방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당할 수 없으니까 예루살렘에서 지원을 나온 ‘종교적인 저격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데 손끝에서 팔뚝까지 물을 흘려서 씻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쁘다보니 씻지 아니한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는 밥맛이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쩝쩝거리며 요란하게 밥을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한 랍비는 감옥에 갇혔을 때 식수로 손을 씻는데 쓰느라 갈증으로 죽었을 정도로 철저하게 전통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샤워를 하지 않고는 먹지 아니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릇은 반질반질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장로들의 전통이 생긴 내력은 이러합니다. 구약성경의 출애굽기나 레위기나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율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이 율법을 지키려면 구체적인 시행세칙이 필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는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출 20:8-11), 그러면 음식을 만드는 일이나, 아플 때나 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데 대한 세칙이 필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지나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달라지고, 생활양식이 변함에 따라 더 많은 세칙이 필요해졌습니다. 이런 세칙들은 그때그때 연세가 많고 학식이 높고 신앙심이 깊은 어른들, 즉 장로들에 의해서 정해지고,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내려왔습니다. 이를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패망하여 포로로 끌려간 후 이스라엘이 다시 일어나려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민족적인 각성이 일어나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성문화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미슈나’요,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책이 ‘탈무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전통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로들이 정한 ‘사람의 계명’(7)이요 ‘사람의 전통’(8)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지 사람의 계명이나 전통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손을 씻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입에 달고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돈에 가 있었고, 명예와 인기에 가 있었고, 또 ‘콩밭’에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말끝마다 하나님,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손을 부지런히 씻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겉을 꾸며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하거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거나 자신이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 우리는 마음에 있는 탐욕과 음탕과 불법을 방치하게 되고, 점점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려면 일을 잘한다는 사람들의 인정에 만족하지 말고 또 자기는 남보다 더 의롭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보다 마음을 받기 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제사보다 마음의 신령한 예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신명기 6:5절에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둘째, 자기 유익과 편안함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야 합니다(8-13). 8,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탈무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에 상충하는 것보다 랍비들의 목소리에 상충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더욱더 심한 범죄다.”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 율법 즉 하나님의 권위보다 더욱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한 수도원에 쥐가 하도 많아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매우 버릇이 없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단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장이 예배 시간에는 고양이를 문 앞에 묶어 두라고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수도원장도 죽고 고양이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배 시간에 늘 있던 고양이가 없는 것이 섭섭하여 잘 놀던 고양이 한 마리를 잡아다가 예배 시간에 문 앞에 묶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전통을 잘 지킨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전통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민수기 30장에 나오는 서원을 경직되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르반이 선언된 것이라도 그 소유자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있다고 유전은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 중의 하나를 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르반을 선언한 사람은 마음을 바꾸어서 그것으로 부모님을 도우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서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한 부분을 사용해서 다른 부분을 부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기 한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빵을 꺼내 혼자 먹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괘씸하기도 하고 배가 고프기도 해서 넌지시 말했습니다. “저는 요즈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혼자 빵을 먹던 사람이 “그래요? 저는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에서 많은 은혜를 받는 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유익과 합리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합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사모님들이 양을 친다는 우리의 고르반을 앞세워 집안 살림을 게을리 할 수 있고, 목자님들이 소감이라는 우리의 고르반을 앞세워 센터에만 있으면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아내를 돕는 일을 외면할 수 있고, 학생 목자들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우리의 고르반을 앞세워 공부에 태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 생신이나 회갑 등에 참석하여 효를 행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부모님을 섬겨야 하는 것도 다 한 때입니다. 돌아가시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은 그 은혜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족이 하나님 보다 위에 서면 안 됩니다. 오늘날은 가족을 굉장히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도 하나님 안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지만 가족들에게 교회 밖에 모른다고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족사를 챙기는 일에 대해서 성숙해야 합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준비된 마음으로 와야 하지만 경배와 찬양 시간이 지나서야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경배와 찬양도 예배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 된 전통들은 살리고 시대에 맞지 않는 것들은 바꾸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유익과 편의를 앞세우면 절대 마음이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어떤 손해가 따르고 어떤 고난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라야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마음을 씻어야 합니다(14-23).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시 무리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유대인들은 더러운 것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망치는 것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더러운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프거나 위가 그것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설사를 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몸은 청결을 유지합니다. 음식이나 씻지 아니한 손으로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부정하게 하는 음식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행 10:14-15, 15;28-29).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물었습니다(17).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18,19).” 그러면 사람을 진정으로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0-23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라는 것은 끊임없이 속에서 나와서 우리를 더럽힙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더럽힙니다. 더러운 언어가 사람의 인격을 더럽힙니다. 음란한 생각이 우리를 더럽힙니다. 탐욕은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자 합니다. 탐욕은 더 가지는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리려는 폭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사람을 얼마나 추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또 내 분노가 나를 망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질투, 내 속에 있는 비방, 내 속에 있는 교만, 내 속에 있는 우매함이 나를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버렸을 때부터 사람의 마음은 음란과 탐욕과 악독과 교만이 나오는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시편 14편의 시인은 한탄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렘 17:9).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인간의 부패는 절망적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눈을 감고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칼을 갈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인터넷이나 영상 등을 보면서 마음으로 간음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봅시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대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월감에 사로잡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고 때로는 열등감으로 괴로워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고르반 유전으로 부모님께 불효하지 않았는지 돌이켜 봅시다. 하나님께 허락하신 귀한 동역자를 사랑하지 못하고 섬김 받기만을 요구하고 섬기는 생활에는 게으르지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자녀들을 무책임하게 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학교와 직장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죄와 타협하지 않았는지 상관들이 두려워서 죄악된 문화 속에 끌려 다닌 적이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모임에 부족한 것을 주인의식을 가지고 감당하고자 애를 쓰기보다 지도자를 탓하며 비판한 하지는 않았는지. 나를 위해서는 시간과 물질을 마음대로 쓰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육체가 더러워지면 씻으면 되는데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회개해야 합니다. 요엘 2:1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우리가 마음을 찢어 회개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손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열심히 씻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꾸 숨깁니다. 자꾸 씻는 일을 뒤로 미룹니다. 우리 안에서 죄의 소욕이 끊임없이 솟아올라오기 때문에 마음에 죄의 쓰레기는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오래 놔두면 금방 파리가 끓고 악취가 나기 때문에 열심히 내다 버립니다. 그러나 마음의 쓰레기는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도 별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구더기가 들끓는데도 그냥 꾹꾹 참습니다. 설마 다른 사람이 알랴 하면서 대강 덮어 버립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런데 하면서 합리화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 양심에 지적하시는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요일 1:8-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둘째로, 예수의 피를 믿어야 합니다. 레위기 17: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우리는 더러운 죄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어떤 흉악한 죄라도 다 씻어냅니다.
셋째로, 우리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따라 삼가야 합니다. 시편 119: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진리의 말씀으로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가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높여드리는 삶을 추구하다 보면 깨끗한 일생을 살게 됩니다. 깨끗한 삶은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삶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고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진정한 거룩을 실천하게 됩니다.
넷째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도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일회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몸에 짊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에스겔 36:26,27절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사도행전 2:38절은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몸을 의의 병기로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통하여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잘라버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더러운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사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이 더러운 것을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영접하면 음란한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어지고 거룩한 삶을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마음을 씻을 때 탐욕이 사라지고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심지어 전에는 불행하고 힘들어하던 일도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마음을 씻으면 교만을 부리며 유치하고 지저분하게 살기보다 겸손하고 성숙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마음을 씻으면 행패 부리며 피 튀기는 삶을 멋으로 여기던 사람이 온유하고 덕을 세우는 삶, 정말 멋있고 깨끗한 삶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의롭다 여기고, 손 씻었으니까 깨끗하다고 주장하며 자기를 속이면, 절대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위선과 거짓이 생겨 더욱 더욱 더러워질 뿐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공동체가 건강해지고 이 사회를 밝히는데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07mk13.hwp (0byte)
71회 다운로드 | DATE : 2007-06-17 13:32: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