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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12 강(6:30-56) 너희가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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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006회 작성일 07-06-1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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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12 강                                                               
말씀 마가복음 6:30 - 56
요절 마가복음 6:37

너희가 주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오병이어 사건은 중요하기 때문에 사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 시대 양들의 목자요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진 것이 없지만 어떻게 먹일 수 있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과 비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30-33) :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통해서 제자들은 각자가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는 귀신을 쫓아낸 것을 이야기 했고, 안드레는 손을 얹고 기도한 즉 병자가 나음 받은 기적을 간증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긍휼을 전했을 때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변화된 사건을 간증했습니다. 제자들은 할 말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한 나절 이상 그들의 보고를 낱낱이 들었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며 방향을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쉬라는 말씀도 있어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쉼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쉬려면 일상적인 일들에서 떠나야 합니다. 직장 일을 집에 까지 끌고 들어오면 피곤합니다. 누구나 쉬는 곳에 까지 공부와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온다면 참 쉼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쉬는 것도 사역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면 기계라도 고장이 납니다. 하물며 연약한 인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는 쉬되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야 합니다. 사람이 북적대는 곳에서는 쉼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한적한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광야는 예레미야 31:2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즉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셨던 곳이 광야였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바로 이 약속을 성취했습니다. 왜냐하면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대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임재이며, 만나 대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떡, 곧 생명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예수님께 나아가 모든 염려와 근심의 짐, 죄의 짐을 내려놓고 쉼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는 쉬는데 잠깐 쉬어야 합니다. 푹 쉬면 영적인 흐름이 끊어지기 쉽습니다. 쉬고 나서 몸살이 나고 더욱 피곤해 진다면 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쉬는 것도 스피릿이 있어야 하고 믿음으로 쉬어야 합니다. 제한된 한도 내에서 쉬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깐 잠깐 쉬면서 하나님의 일을 줄기차게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갔습니다. 이때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습니다. 무리들의 주님을 향한 열정이 뜨겁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목자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영접하셨습니까?

  2.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34-46) :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이 보실 때 큰 무리들은 헤롯의 독재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목자가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해 불쌍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눈이 좋지 않아서 웅덩이에 고인 더러운 물과 독초를 먹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리와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을 받을 때 방어할 것도 없습니다. 마치 엄마 없는 갓난아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 시대의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애간장이 탄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양들을 섬기면서 정말 누가 불쌍한 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좋은 아파트, 고급 차, 풍부한 지원을 받으면서 공부하는 양들을 먹이다 보면 자신이 더 불쌍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경제규모는 세계 12위이지만 행복지수가 후진국 수준인 세계 102위입니다. 학생들 중에는 인생의 비전과 목표가 없기 때문에 방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자 제품으로 무장하고 인생을 즐기지만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해서 방황합니다. 사는 것이 지루하다고 느낍니다. 학생들 중에는 어려운 살림에 자식을 대학에 보내놓고 고생하시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과 그분들의 턱없는 기대 때문에 눌려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밤낮 도서관에서 죽치고 공부하지만 취직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에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또 요즘 학생들 중에는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훈련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어디를 가든지 음란한 문화로 인해서 시달리고, 늘 그 지긋지긋한 육신의 소욕에 몸살을 앓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장래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쓸 줄을 몰라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들을 돕다가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판단하고 완악하다고 하기보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깊이 이해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이 버려진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불쌍히 여기면 한없이 용서하고 감당해 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양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인생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주고, 삶의 방향과 비전을 제시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해가 저무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계속되었습니다.

  35,36절을 보십시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말씀 공부가 길어질수록 제자들의 배고픈 소리는 더욱 요란스럽게 들려왔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참다못한 제자들이  우르르 예수님께 나아와 여쭈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고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무엇을 사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목자 생활에 쉼은 무슨 쉼이냐고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이 자신들의 휴식도 빼앗고 식사할 시간도 빼앗고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들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7a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정말 설상가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무리들을 먹일 수 있습니까? 첫째,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책임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서 ‘너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먹이라. 예수님은 목자가 없어 방황하는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시대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제 무리들을 자신들이 먹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해야 합니다. 무리들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더 이상 무리들이 귀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책임감은 사람을 키웁니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훌륭하게 키웁니다. 책임감을 가진 목자는 자신의 형편을 뛰어넘어 양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우리 UBF는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마더 배리 선교사님의 대학생들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4.19 의거와 5.16 군사 혁명 가운데 비전이 없어 방황하는 대학생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가운데 그들이 믿음의 눈을 뜨고 세계적인 목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대학생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면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이런 섬김과 사랑, 목양을 받으시고 양들이 자라게 하심을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둘째,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제자들을 목자로 세우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운 지 2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배우고 자라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로 말하면 목동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그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까? 한 마디로 그래도 무리들을 먹일 사람이 제자들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배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목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 나가서 귀신도 쫓아내고 병든 자도 치료하고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세상에서 자기들의 위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목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며, 어찌하든지 먹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이 시대 대학생들의 목자요 영적인 지도자로 부르고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홍익대 일만 대학생들을 먹여야 할 목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직분이 많이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직분은 목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늘 잊지 말고 양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겠습니다. 제자들은 사실 자기들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픈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명령하고 계십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려면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먹이라고 하셨으면 먹일 것을 주실 것입니다. 먹일 것도 주지 않으면서 먹이라고 하면 무책임한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 명령을 믿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목자의 심정과 믿음입니다. 어떻게 먹일 것인가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모험을 하고 어려운 일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하기보다 먼저 돈 문제를 꺼냈습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백 데나리온은 시가로 이천만원에 해당 되는 거액입니다. 제자들의 말은 우리에게 이만 한 돈이 없으니 먹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나도 배가 고픈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먼저 포기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만 기다리면 아무 것도 못 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이 없어서 먹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백 데나리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기적을 체험했지만 문제 앞에서는 현실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문제 앞에서 합리적이고 계산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우십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처한 형편에서 한계를 짓고 이것 밖에 못한다고 주장할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분량에 이르도록 도전하십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도록 믿음을 심으시고 훈련하십니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믿음을 배우고 성장합니다. 우리는 양들을 훈련시킬 때 믿음으로 자기 한계를 극복하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시간의 한계, 능력의 한계, 물질의 한계,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큰 목표를 주고 이를 감당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의 10% 정도만 쓰고 있다고 합니다. 천재적인 사람들이 20% 정도를 쓰고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으시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셋째,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38).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찾아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없는 것부터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지금 여기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가서 찾아보라는 말씀은 소망을 줍니다. 가능성을 찾게 만듭니다. 이는 발상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긍정의 힘은 놀라운 결과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께로 시선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즉 문제의 해결자로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뢰를 하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예수님이 쓰시기만 하면 위대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작지만 그것을 가지고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알아보고 와서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양들을 먹이려면 일단 찾아보아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찾는 것도 훈련입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손발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찾아보면 있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만 생각하면 슬프고 부정적이 되고 피해의식에 빠집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굶지 말고 있는 것만 가지고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양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양들은 만 명이나 캠퍼스에 널려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올라가면 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좌절감, 실패감을 심어서 힘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계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을 주님께 가지고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주님은 너무도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진심을 원하십니다. 믿음을 원하십니다. 할 수 없다, 못 한다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으로 못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찾아보고 그것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 다음 방향을 주십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제자들은 주님께서 먹이실 것을 믿고 백 명씩, 오십 명씩 앉히는 일을 했습니다. 푸른 잔디 위에  오십 명씩, 백 명씩 떼를 지어 앉아 있는 모습은 평화롭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목자가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배불리 먹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해 줍니다. 요한은 이때를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고 했습니다(요 6:4). 그렇다면 이때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양으로 잡히시기 만 1년 전의 사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50명 또는 100명씩 무리를 지어 앉는 것은 식사와 교제를 위한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40,41). 이렇게 하여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오천 명이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만 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제자들이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매주 일대일 성경공부를 시켜줄 수 있는 주옥같은 말씀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만 명의 대학생들을 바로 곁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손만 내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한 명 이상의 학생 양들에게 내가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짧게 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이 양들을 먹이고자 하는 심정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작은 일대일 한 팀을 통해서 주님은 홍익대 일만 명을 먹이시고 세계를 먹이십니다. 주님께서 축복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전해줄 때 모두가 배부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배가 고팠지만 다른 사람들을 먹임으로 자기들의 배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열 두 광주리까지 남았습니다. 이를 볼 때 작은 것이라도 찾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풍성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씀 사역과 기도를 받으시고 매주 양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의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신 후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피곤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보내시고 자신이 무리를 보내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사람들의 요구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제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들과 작별하신 후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가 절정에 이른 때에 사람들의 요구로부터 떠나가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면서 쉼을 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일대일 말씀 공부로 매주 오백 명을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대일 역사를 통해 이 시대 젊은 지성인들이 변화되고 거룩한 영적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여름 수양회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오병이어를 찾아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풍성한 말씀 잔치를 벌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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