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11 강(6:1-29) 둘씩 둘씩 보내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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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11 강
말씀 마가복음 6:1 - 29
요절 마가복음 6:7
둘씩 둘씩 보내시며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 마을에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제자들이 자라자 그들을 전도자로 세워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전도는 천사도 동참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천사가 할 수 없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리더 미팅에서 관계전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전도는 순회 파송 전도입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앞두고 예수님의 소망과 믿음을 배우고 전도에 대해서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예수님(1-6) :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고향에 늙으신 부모님을 뵈러 가거나 명절 때 방문합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복을 고향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이 바쁜 일상을 멈추고 회당에 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에 가장 적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속으로 감탄사를 발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아! 아! 헉! 우리가 명강사들의 강의를 들어도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말씀을 전했을 때 그 감동이란 일어나 기립박수를 칠만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받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머리로 깨달은 말씀이 마음으로 내려와 행동으로 옮겨질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깨닫기는 했는데 마음으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길 가 밭과 같아서 받은 바 말씀을 사탄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또는 돌밭과 같았습니다.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서 곧 시들어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머리에서 가슴까지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깨달은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행동으로 옮길 때 그 지식은 열매를 맺습니다. 왜 배운 것을 써먹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달라지지 못할까요? 왜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할까요? 가르치시는 예수님이 권위가 없어서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신뢰하고 그가 하시는 말씀을 영접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면서 가르침을 받은 나사렛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가장 은혜롭고 복된 말씀을 듣고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그들은 사탄이 하와를 미혹했을 때, 그 전술에 말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 학교 출신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학벌이 없다고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지혜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수여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애써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분을 문제 삼았습니다. 목수가 이런 지혜를 가르친다고 그 가르침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깎아내리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형제와 자매들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게서 지혜와 권능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배척했다는 말은 원어로는 ‘에스칸달리존토’로서 걸려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베드로전서 2:6-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졌습니다.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은혜가 되지 않고 도리어 저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의 말씀과 그가 맺으신 열매로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눈이 감겨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인간적인 생각을 사탄이 얼마나 교묘하게 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배워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은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이라도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풍성한 축복과 생명의 열매를 맺는 지혜로운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대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인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시기심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하여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린 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에 빠지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싫어서라기보다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믿는 교만이거나, 빛보다 어두움을 좋아하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전했는데 배척을 받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주저앉아 시대와 사람들을 탓해야 할까요? 아니면 나는 복음을 전할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음 기회에 하자 생각하고 무작정 미루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6b절을 보십시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복음을 배척한다고 주저 않거나 포기하거나 힘들어 하지 않고 다른 마을에 가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이 있음을 믿고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스피릿이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히 여기시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배척한다고 뒤로 물러나지 말고 믿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전도가 습관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되기까지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더 많은 지역으로 보내십니다.
2.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심(7-13) : 7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복음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특권입니다.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서 함께 일하자고 불러도 특권인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멸망할 자들을 부르시고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 가운데 나아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기 문제에 매여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지 아니하고, 자기 유익만 열심히 구하는 사람이 되지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죄와 사탄의 세력 가운데 고통하며 신음하는 양들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주고, 양들을 섬기는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악령을 제압하고 양들을 구원하는 영적인 힘과 능력을 덧입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소망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어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으로 나아갈 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세상에 담대하게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은혜가 있는 어린 양들을 전도자로 키워야 합니다. 그들이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집니다.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을 혼자 보내지 않고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혼자 가는 것보다 둘씩 가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둘씩 가면 전도를 하다가 힘들 때 격려를 해 줄 수 있습니다. 배척을 받아도 지원자가 있기 때문에 문제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전도할 때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수 있습니다. 위험을 당할 때 보호자가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전도서 4:9-12절은 말씀 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들이 독일 공군 전투기에 의해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는데, 그 이유는 독일 전투기들이 항상 두 대씩 짝을 지어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략은 신명기 32:30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라는 말씀을 읽고 독일의 한 장교가 적용한 것입니다. 전투기 한 대가 기관총을 쏘면 2.4m 둘레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가 총탄에 맞아 추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대가 편대를 지어 기관총을 쏘면 2.4m의 두 배인 4.8m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만 추락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240m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가 모두 추락되더라는 것입니다. 2차 대전에서는 미 공군이 이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일본 전투기가 성능이나 양적인 면에서 훨씬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때마다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우리가 이 전략을 전도와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두 사람 이상이 마음을 합하여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놀라우리만큼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낼 때 그냥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복음 전도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사탄은 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마음을 안개가 낀 것같이 흐리게 만들어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이 비취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탄은 갖은 회의를 다 불러 일으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에베소서 6: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악한 영들은 조직적으로 복음 역사를 훼방합니다. 또 사탄은 우리보다 힘과 지혜가 뛰어납니다. 그들은 실망하거나 지치지도 않고 복음 역사를 훼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4-20).”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다. 귀신을 제어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권능을 덧입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여행을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지팡이는 방어와 공격을 위한 것입니다. 지팡이는 악한 짐승을 막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모세도 오직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복음 역사를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물질적인 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합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사람이 되려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의 근원이십니다.
제자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귀신이 나가고 병자들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런 능력의 역사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헤롯왕도 어린 제자들을 통해 일어나는 능력의 역사를 보고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14).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였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거지가 구걸을 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 하자 그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나면서 걷지도 못하던 그가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행3:3-9). 베드로와 요한이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이 양을 섬겼을 때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돈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대체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주변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지혜와 경험을 의지합니다. 아니면 동역자나 능력 있는 주위 사람을 의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이나 물질을 의지했던 것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능력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파송받은 제자들이 거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제자는 집의 사람이 아니라 길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전도하는 제자들이 한 집에 들어가거든 거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더 편안한 곳을 찾지 말 것과 불편한 자리라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집 저집으로 옮겨가면 거짓 선지자로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집에 온 목적은 전도하러 온 것이지 대접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숙소를 자주 옮기면 불신과 미움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한 집에서 떠나기까지 머물면서 관계성을 잘 맺고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그 집을 본부 삼아 지역을 전도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전도자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11). 전도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것을 믿고 담대하게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불평과 불신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은혜와 겸손과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힘 있게 쓰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심령이 새로워지면 전도를 해야 하고 전도를 하면서 자기가 죽고 예수님을 얻게 됩니다. 전도하고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빨리 예수님을 배우고 닮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가 있다는 것을 믿고 복음 전도에 힘써야겠습니다. 이제 생명의 말씀 잔치, 여름 수양회가 다가왔습니다. 전도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뜻과 마음을 잘 배워서 수양회에 양들을 열심히 초청해야겠습니다. 여름 수양회에 목자 한 사람이 한 명 이상의 양들을 데리고 참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첫째로, 제자들은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전파한 목적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성취하고자 한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생명을 얻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괴롭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성이 끊어지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 지독하고 끈질긴 죄 때문에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 회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입니까? 우리가 회개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가 회개하면 됩니다. 회개할 때 불안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사도행전 4: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회개는 영혼을 치료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매일 회개를 잘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었습니다. 귀신들은 더러운 영들을 가리킵니다(7). 제자들의 활동은 악한 세력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싸움이요 내면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제자들은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이는 육적인 회복입니다. 온전한 구원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을 때 시작됩니다.
전도는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전도할 때 우리는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덧입습니다. 기도할 때 능력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마가복음 6:1 - 29
요절 마가복음 6:7
둘씩 둘씩 보내시며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 마을에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제자들이 자라자 그들을 전도자로 세워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전도는 천사도 동참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천사가 할 수 없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리더 미팅에서 관계전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전도는 순회 파송 전도입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앞두고 예수님의 소망과 믿음을 배우고 전도에 대해서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예수님(1-6) :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고향에 늙으신 부모님을 뵈러 가거나 명절 때 방문합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복을 고향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이 바쁜 일상을 멈추고 회당에 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에 가장 적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속으로 감탄사를 발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아! 아! 헉! 우리가 명강사들의 강의를 들어도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말씀을 전했을 때 그 감동이란 일어나 기립박수를 칠만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받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머리로 깨달은 말씀이 마음으로 내려와 행동으로 옮겨질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깨닫기는 했는데 마음으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길 가 밭과 같아서 받은 바 말씀을 사탄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또는 돌밭과 같았습니다.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서 곧 시들어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머리에서 가슴까지입니다. 우리가 머리로 깨달은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행동으로 옮길 때 그 지식은 열매를 맺습니다. 왜 배운 것을 써먹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달라지지 못할까요? 왜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할까요? 가르치시는 예수님이 권위가 없어서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신뢰하고 그가 하시는 말씀을 영접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면서 가르침을 받은 나사렛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가장 은혜롭고 복된 말씀을 듣고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그들은 사탄이 하와를 미혹했을 때, 그 전술에 말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 학교 출신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학벌이 없다고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지혜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수여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를 애써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분을 문제 삼았습니다. 목수가 이런 지혜를 가르친다고 그 가르침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깎아내리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형제와 자매들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게서 지혜와 권능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배척했다는 말은 원어로는 ‘에스칸달리존토’로서 걸려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베드로전서 2:6-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졌습니다.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은혜가 되지 않고 도리어 저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의 말씀과 그가 맺으신 열매로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눈이 감겨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인간적인 생각을 사탄이 얼마나 교묘하게 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배워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은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이라도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풍성한 축복과 생명의 열매를 맺는 지혜로운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대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인에게만 안수하여 고치셨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시기심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하여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린 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에 빠지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싫어서라기보다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믿는 교만이거나, 빛보다 어두움을 좋아하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전했는데 배척을 받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주저앉아 시대와 사람들을 탓해야 할까요? 아니면 나는 복음을 전할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음 기회에 하자 생각하고 무작정 미루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6b절을 보십시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복음을 배척한다고 주저 않거나 포기하거나 힘들어 하지 않고 다른 마을에 가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이 있음을 믿고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스피릿이 대단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히 여기시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배척한다고 뒤로 물러나지 말고 믿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전도가 습관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되기까지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더 많은 지역으로 보내십니다.
2.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심(7-13) : 7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복음 전도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특권입니다.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서 함께 일하자고 불러도 특권인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멸망할 자들을 부르시고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 가운데 나아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자기 문제에 매여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지 아니하고, 자기 유익만 열심히 구하는 사람이 되지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죄와 사탄의 세력 가운데 고통하며 신음하는 양들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주고, 양들을 섬기는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악령을 제압하고 양들을 구원하는 영적인 힘과 능력을 덧입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소망 가운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어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리가 득실거리는 세상으로 나아갈 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세상에 담대하게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은혜가 있는 어린 양들을 전도자로 키워야 합니다. 그들이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집니다.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을 혼자 보내지 않고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혼자 가는 것보다 둘씩 가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둘씩 가면 전도를 하다가 힘들 때 격려를 해 줄 수 있습니다. 배척을 받아도 지원자가 있기 때문에 문제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 전도할 때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수 있습니다. 위험을 당할 때 보호자가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전도서 4:9-12절은 말씀 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들이 독일 공군 전투기에 의해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는데, 그 이유는 독일 전투기들이 항상 두 대씩 짝을 지어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략은 신명기 32:30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라는 말씀을 읽고 독일의 한 장교가 적용한 것입니다. 전투기 한 대가 기관총을 쏘면 2.4m 둘레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가 총탄에 맞아 추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대가 편대를 지어 기관총을 쏘면 2.4m의 두 배인 4.8m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만 추락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240m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가 모두 추락되더라는 것입니다. 2차 대전에서는 미 공군이 이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일본 전투기가 성능이나 양적인 면에서 훨씬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때마다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우리가 이 전략을 전도와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두 사람 이상이 마음을 합하여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놀라우리만큼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낼 때 그냥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복음 전도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사탄은 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마음을 안개가 낀 것같이 흐리게 만들어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이 비취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탄은 갖은 회의를 다 불러 일으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에베소서 6: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악한 영들은 조직적으로 복음 역사를 훼방합니다. 또 사탄은 우리보다 힘과 지혜가 뛰어납니다. 그들은 실망하거나 지치지도 않고 복음 역사를 훼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4-20).”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다. 귀신을 제어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권능을 덧입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여행을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지팡이는 방어와 공격을 위한 것입니다. 지팡이는 악한 짐승을 막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모세도 오직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복음 역사를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물질적인 것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합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사람이 되려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의 근원이십니다.
제자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귀신이 나가고 병자들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런 능력의 역사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헤롯왕도 어린 제자들을 통해 일어나는 능력의 역사를 보고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14).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였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거지가 구걸을 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 하자 그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나면서 걷지도 못하던 그가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행3:3-9). 베드로와 요한이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이 양을 섬겼을 때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돈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대체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주변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지혜와 경험을 의지합니다. 아니면 동역자나 능력 있는 주위 사람을 의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이나 물질을 의지했던 것을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능력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파송받은 제자들이 거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제자는 집의 사람이 아니라 길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전도하는 제자들이 한 집에 들어가거든 거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더 편안한 곳을 찾지 말 것과 불편한 자리라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집 저집으로 옮겨가면 거짓 선지자로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집에 온 목적은 전도하러 온 것이지 대접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숙소를 자주 옮기면 불신과 미움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한 집에서 떠나기까지 머물면서 관계성을 잘 맺고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그 집을 본부 삼아 지역을 전도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전도자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11). 전도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것을 믿고 담대하게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불평과 불신이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은혜와 겸손과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힘 있게 쓰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심령이 새로워지면 전도를 해야 하고 전도를 하면서 자기가 죽고 예수님을 얻게 됩니다. 전도하고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빨리 예수님을 배우고 닮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가 있다는 것을 믿고 복음 전도에 힘써야겠습니다. 이제 생명의 말씀 잔치, 여름 수양회가 다가왔습니다. 전도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뜻과 마음을 잘 배워서 수양회에 양들을 열심히 초청해야겠습니다. 여름 수양회에 목자 한 사람이 한 명 이상의 양들을 데리고 참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첫째로, 제자들은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전파한 목적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성취하고자 한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생명을 얻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괴롭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성이 끊어지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 지독하고 끈질긴 죄 때문에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 회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입니까? 우리가 회개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내가 회개하면 됩니다. 회개할 때 불안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사도행전 4: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회개는 영혼을 치료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매일 회개를 잘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었습니다. 귀신들은 더러운 영들을 가리킵니다(7). 제자들의 활동은 악한 세력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싸움이요 내면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제자들은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이는 육적인 회복입니다. 온전한 구원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을 때 시작됩니다.
전도는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전도할 때 우리는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덧입습니다. 기도할 때 능력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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