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9 강(4:35-5:20) 그가 누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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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봄 마가복음 제 9 강
말씀 마가복음 4:35 - 5:20
요절 마가복음 4:41
그가 누구이기에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을 치유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광풍을 잠잠케 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영적인 권세자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4:35-41) : 예수님은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오랜만에 잠깐 쉼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배를 저어가는 제자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야호!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신 것을 볼 때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바다 저편 이방인의 땅으로 노를 저어갔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쉼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기분 좋게 배가 항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끼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집 채 만한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37). 갈릴리 바다는 헬몬 산에서 찬바람이 내려오고 지중해에서 뜨거운 바람이 올라가다가 만나서 광풍으로 변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런 광풍은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대비할 수 없습니다. 광풍은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광풍이 지닌 힘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광풍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데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데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파도를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나뒹굴며 광풍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광풍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코까지 골며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고물은 배 후미를 가리킵니다. 가운데보다 출렁거림이 심한 부분입니다. 몸의 중심을 가누기가 힘든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곳에서도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 종일 가르치시고 무리들 때문에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막간을 이용하여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파도가 치는 이때 고물에서 깊이 주무시는 예수님은 사명인으로서 얼마나 충성되게 섬기셨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b)” ‘우리’라는 말 속에 예수님을 포함시키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물에 빠져 죽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광풍 속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수없이 보았지만 광풍 속에서 불신에 빠졌습니다. 만약 ‘우리’라는 말 속에 예수님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우리를 이런 환란 속에 버려두시느냐는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광풍을 통해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를 갈라놓고자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까지 예수님의 돌보심 속에서 살았지만 광풍을 만나자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원망에 빠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주님은 위기의 때에 우리가 처한 형편을 알기나 하십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 때 도와주지 않으면 섭섭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 광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덮쳐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광풍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연단하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낮에는 말씀을 가르치시고 밤에는 말씀을 붙잡는 실습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저편으로 가자고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놓쳐버렸습니다. 광풍을 통해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교만과 불신, 원망 등 내면의 추한 모습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지만 인간적인 본성들이 다 튀어나왔습니다. 이런 광풍 속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깨어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바람을 인격체인양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한편으로 사탄도 제한적이지만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바람을 일으켜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사탄은 바람을 일으켜서 욥의 자녀들과 재산을 쓸어가 버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보이지 않는 세력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는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질풍노도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호수처럼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로 바람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내면에 불어닥친 광풍을 잠잠케 하려면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 사탄이 심는 두려움, 염려, 좁은 생각, 부정적인 생각, 패배적인 생각, 추한 생각, 절망감, 허무한 생각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주는 생각 대신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난 후 어떻게 하셨습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단 잠을 깨웠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광풍 하나 헤쳐 나가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이 없다고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 이렇게 겁이 많냐? 어찌 이렇게 두려워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기 보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마음의 평강을 유지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잠잠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을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마음에 믿음이 있었다면 광풍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광풍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잠이라도 잤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 왕이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무교절에 베드로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롯이 잡아 죽이려고 하는 전날 감옥에 있으면서 베드로는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그를 구해내고자 할 때에 베드로가 얼마나 깊이 잤는지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만큼 믿음이 생겨서 담대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자신을 돌보신다는 견고한 믿음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평안을 누렸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실라와 함께 갇혔을 때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한 밤 중에 찬송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그의 찬송과 기도 소리를 들었고 옥 터가 흔들리며 옥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매인 것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16:26). 광풍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우리 가운데 조웨슬레 목자님은 살아오면서 많은 광풍을 만났습니다. 폐결핵에도 걸리고 구안와사도 걸리고 가정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최근에는 직장에서도 작은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이런 광풍들을 통해서 이 분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도,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앞으로 더 큰일을 감당하도록 환란을 통해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항해에서 만나는 광풍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은 광풍으로 인해서 놀라고 이제는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더욱 크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항상 놀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게 된 것은 주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경제생활도 주장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시는 절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2. 네 이름이 무엇이냐(5:1-20) : 예수님 일행이 광풍을 뚫고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장 2절을 보십시오.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도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음란한 소욕, 미움의 세력, 부정적인 생각, 불신의 세력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귓속말을 주고받으려고 하다가 사람의 귀를 물어뜯었습니다. 엽기적인 행동으로 자기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모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의 마음에는 인간에 대한 미움과 증오,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더러운 세상을 욕하고 모욕의 쾌감을 맛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신을 모독하는 짓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자신을 돌아보면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고 미웠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앞날을 생각할 때 갑갑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질렀습니다. 한심한 자신을 생각하며 돌로 자기의 몸을 짓이겼습니다. 그는 자학적인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에서는 자존감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 싫고 못 마땅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에게 귀신이 들어갔을까요? 귀신은 반드시 죄가 있는 곳에 역사합니다. 귀신은 음란하고 우상 숭배가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곳에서 역사합니다. 폭력적이고 미움과 증오가 있는 곳에 역사합니다. 죄 문제가 깊은 그에게 귀신이 들어갔습니다. 마음이 약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귀신이 잘 들어갑니다. 귀신은 사람들에게 교만하고 악한 생각을 심으면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정체를 숨깁니다. 예수님은 이런 귀신을 어떻게 쫓아내셨습니까?
예수님은 멀리서 귀신의 정체를 알아보시고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멀리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귀신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더러운 귀신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여기서 군대는 6000명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을 뜻합니다. 귀신들은 군대와 같이 한 뜻으로 악한 일을 했습니다. 군대의 힘은 매우 강력합니다. 누가 군대 앞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귀신의 상대가 되지 않지만 주 안에서와 그 힘의 강력으로 귀신들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엡6:10).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심으로 이 사람과 귀신을 분리해서 보셨습니다. 귀신은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이 사람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므로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귀신은 정체를 밝혀야 쫓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숨은 것을 다 드러내십니다. 밝은 빛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듯이 빛 되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의 속에 있는 귀신을 내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로서 사람보다 더욱 지혜롭고 강합니다. 그러므로 귀신보다 더욱 강하신 예수님만이 내쫓을 수 있습니다. 귀신은 강해보이지만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시고 전도여행을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습니다(3:15; 6:7).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그 권세로 귀신을 쫓아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를 가지고 악한 귀신들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귀신들을 쫓아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권세와 그의 피를 믿음으로 회개할 때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악령들이 떠나갑니다.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긴 나와야 하는데 이 지방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갑자기 먹기를 중단하고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했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하며 영접해야 마땅했지만 자신들의 재산에 손해가 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가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의 물질주의 가치관에 대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물질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그들에게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돈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날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해서라도 한 사람의 정신이 온전해지를 원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청년이 온전해져서 그 지방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살 수 있다면 어떤 희생도 가치가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이 온전해진 청년이 함께 있기를 간구했지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19). 예수님은 그의 능력보다 사랑에 대해서 말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는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7장에 가면 이 사람이 데가볼리 지방에서 사역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의 사역으로 인해 데가볼리 지방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귀신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버지니아 텍에서 총기사고를 일으킨 조승희 씨의 경우도 그 어머니가 사탄의 역사인줄은 알았지만 귀신을 쫓아내지를 못했습니다. 사탄의 이런 역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청소년들이 주로 인터넷으로 게임만 하고 폭력적인 문화를 탐닉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귀신이 많이 나오는 일본 만화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영향으로 무신론적인 사상들도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이런 악령이 다스리는 문화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에 미움과 증오, 살인과 저주의 더러운 영이 들어와서 지배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까? 귀신보다 더 강하신 예수님만이 도우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 시대 청년 대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거짓된 사탄의 정체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멸하시며 죄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놓아 주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입니다(요일3:8). 예수님은 더러운 마귀의 세력으로 부터 우리를 풀어 자유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고 힘써 전해야겠습니다.
말씀 마가복음 4:35 - 5:20
요절 마가복음 4:41
그가 누구이기에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을 치유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광풍을 잠잠케 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영적인 권세자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4:35-41) : 예수님은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오랜만에 잠깐 쉼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배를 저어가는 제자들의 입에서는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야호!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신 것을 볼 때 하루 종일 말씀을 가르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바다 저편 이방인의 땅으로 노를 저어갔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쉼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기분 좋게 배가 항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끼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집 채 만한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37). 갈릴리 바다는 헬몬 산에서 찬바람이 내려오고 지중해에서 뜨거운 바람이 올라가다가 만나서 광풍으로 변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런 광풍은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대비할 수 없습니다. 광풍은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광풍이 지닌 힘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광풍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데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데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파도를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나뒹굴며 광풍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광풍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코까지 골며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고물은 배 후미를 가리킵니다. 가운데보다 출렁거림이 심한 부분입니다. 몸의 중심을 가누기가 힘든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곳에서도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 종일 가르치시고 무리들 때문에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막간을 이용하여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파도가 치는 이때 고물에서 깊이 주무시는 예수님은 사명인으로서 얼마나 충성되게 섬기셨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b)” ‘우리’라는 말 속에 예수님을 포함시키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물에 빠져 죽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광풍 속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수없이 보았지만 광풍 속에서 불신에 빠졌습니다. 만약 ‘우리’라는 말 속에 예수님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우리를 이런 환란 속에 버려두시느냐는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광풍을 통해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를 갈라놓고자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까지 예수님의 돌보심 속에서 살았지만 광풍을 만나자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원망에 빠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주님은 위기의 때에 우리가 처한 형편을 알기나 하십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 때 도와주지 않으면 섭섭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 광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덮쳐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광풍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연단하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은 낮에는 말씀을 가르치시고 밤에는 말씀을 붙잡는 실습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저편으로 가자고 하면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놓쳐버렸습니다. 광풍을 통해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교만과 불신, 원망 등 내면의 추한 모습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지만 인간적인 본성들이 다 튀어나왔습니다. 이런 광풍 속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깨어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바람을 인격체인양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한편으로 사탄도 제한적이지만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바람을 일으켜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사탄은 바람을 일으켜서 욥의 자녀들과 재산을 쓸어가 버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보이지 않는 세력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는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질풍노도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호수처럼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로 바람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내면에 불어닥친 광풍을 잠잠케 하려면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 사탄이 심는 두려움, 염려, 좁은 생각, 부정적인 생각, 패배적인 생각, 추한 생각, 절망감, 허무한 생각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주는 생각 대신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난 후 어떻게 하셨습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단 잠을 깨웠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광풍 하나 헤쳐 나가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이 없다고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 이렇게 겁이 많냐? 어찌 이렇게 두려워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기 보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마음의 평강을 유지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잠잠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을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마음에 믿음이 있었다면 광풍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광풍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잠이라도 잤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 왕이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무교절에 베드로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헤롯이 잡아 죽이려고 하는 전날 감옥에 있으면서 베드로는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그를 구해내고자 할 때에 베드로가 얼마나 깊이 잤는지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만큼 믿음이 생겨서 담대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자신을 돌보신다는 견고한 믿음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평안을 누렸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실라와 함께 갇혔을 때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한 밤 중에 찬송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그의 찬송과 기도 소리를 들었고 옥 터가 흔들리며 옥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매인 것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행16:26). 광풍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놀랍습니다.
우리 가운데 조웨슬레 목자님은 살아오면서 많은 광풍을 만났습니다. 폐결핵에도 걸리고 구안와사도 걸리고 가정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최근에는 직장에서도 작은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이런 광풍들을 통해서 이 분의 믿음이 견고해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도,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앞으로 더 큰일을 감당하도록 환란을 통해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항해에서 만나는 광풍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은 광풍으로 인해서 놀라고 이제는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더욱 크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항상 놀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게 된 것은 주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경제생활도 주장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시는 절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2. 네 이름이 무엇이냐(5:1-20) : 예수님 일행이 광풍을 뚫고 거라사인의 지방에 도착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장 2절을 보십시오.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도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음란한 소욕, 미움의 세력, 부정적인 생각, 불신의 세력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귓속말을 주고받으려고 하다가 사람의 귀를 물어뜯었습니다. 엽기적인 행동으로 자기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모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의 마음에는 인간에 대한 미움과 증오,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더러운 세상을 욕하고 모욕의 쾌감을 맛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신을 모독하는 짓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 자신을 돌아보면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고 미웠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앞날을 생각할 때 갑갑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질렀습니다. 한심한 자신을 생각하며 돌로 자기의 몸을 짓이겼습니다. 그는 자학적인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에서는 자존감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 싫고 못 마땅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에게 귀신이 들어갔을까요? 귀신은 반드시 죄가 있는 곳에 역사합니다. 귀신은 음란하고 우상 숭배가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곳에서 역사합니다. 폭력적이고 미움과 증오가 있는 곳에 역사합니다. 죄 문제가 깊은 그에게 귀신이 들어갔습니다. 마음이 약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귀신이 잘 들어갑니다. 귀신은 사람들에게 교만하고 악한 생각을 심으면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정체를 숨깁니다. 예수님은 이런 귀신을 어떻게 쫓아내셨습니까?
예수님은 멀리서 귀신의 정체를 알아보시고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멀리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귀신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더러운 귀신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여기서 군대는 6000명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을 뜻합니다. 귀신들은 군대와 같이 한 뜻으로 악한 일을 했습니다. 군대의 힘은 매우 강력합니다. 누가 군대 앞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귀신의 상대가 되지 않지만 주 안에서와 그 힘의 강력으로 귀신들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엡6:10).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심으로 이 사람과 귀신을 분리해서 보셨습니다. 귀신은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이 사람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므로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귀신은 정체를 밝혀야 쫓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숨은 것을 다 드러내십니다. 밝은 빛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듯이 빛 되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의 속에 있는 귀신을 내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로서 사람보다 더욱 지혜롭고 강합니다. 그러므로 귀신보다 더욱 강하신 예수님만이 내쫓을 수 있습니다. 귀신은 강해보이지만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시고 전도여행을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습니다(3:15; 6:7).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그 권세로 귀신을 쫓아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를 가지고 악한 귀신들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귀신들을 쫓아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권세와 그의 피를 믿음으로 회개할 때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악령들이 떠나갑니다.
귀신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긴 나와야 하는데 이 지방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갑자기 먹기를 중단하고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했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하며 영접해야 마땅했지만 자신들의 재산에 손해가 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가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의 물질주의 가치관에 대한 경고를 주셨습니다. 물질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그들에게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돈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날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돼지 이천 마리를 희생해서라도 한 사람의 정신이 온전해지를 원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청년이 온전해져서 그 지방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살 수 있다면 어떤 희생도 가치가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이 온전해진 청년이 함께 있기를 간구했지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19). 예수님은 그의 능력보다 사랑에 대해서 말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는 가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겼습니다. 7장에 가면 이 사람이 데가볼리 지방에서 사역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의 사역으로 인해 데가볼리 지방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귀신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버지니아 텍에서 총기사고를 일으킨 조승희 씨의 경우도 그 어머니가 사탄의 역사인줄은 알았지만 귀신을 쫓아내지를 못했습니다. 사탄의 이런 역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청소년들이 주로 인터넷으로 게임만 하고 폭력적인 문화를 탐닉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귀신이 많이 나오는 일본 만화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영향으로 무신론적인 사상들도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습니다. 이런 악령이 다스리는 문화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에 미움과 증오, 살인과 저주의 더러운 영이 들어와서 지배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까? 귀신보다 더 강하신 예수님만이 도우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 시대 청년 대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거짓된 사탄의 정체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멸하시며 죄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놓아 주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입니다(요일3:8). 예수님은 더러운 마귀의 세력으로 부터 우리를 풀어 자유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고 힘써 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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