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8 강(4:21-34)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305회 작성일 07-05-13 10:45

본문

2007년 봄 마가복음 제 8 강                                               
말씀 마가복음 4:21‐34
요절 마가복음 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우리는 지난 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좋은 밭에 심겨진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일백 배의 추수를 할 수 있다는 소망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바이블 아카데미를 통해서 이십 명 이상의 양들이 와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등불 비유,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밝히 드러나고, 스스로 자라며, 작게 시작하지만 가장 크게 자라나는 성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한 명과 일대일로 말씀을 공부해도 큰 소망 가운데 가르쳐야겠습니다. 

1. 말씀을 밝히 드러내고자 하는 등불 비유(21-25) :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말씀을 의도적으로 감추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1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집에서는 기름을 담은 접시에 심지를 세우고 불을 켜서 등불로 사용했습니다. 등불을 밝히기 위해서 방 안의 기둥이나 벽에 등경 곧 받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그 받침대 위에 등불을 올려놓고 온 방안을 비추게 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등을 말로 덮어두거나 평상 즉 침상 밑에 둡니다. 이렇게 말로 덮어두고 평상 밑에 내려놓는 것은 누가 발로 등을 차기라도 해서 등이 엎어지는 것을 막고, 밤에 그 등을 켜서 잘 비추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등불을 감추는 것은 빛을 더 잘 비추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 119: 105). 또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요, 참 빛이십니다(요 8:12).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그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 바이블 아카데미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또 알아도 희미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빛을 환하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인간을 동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자의 마음을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영원히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소풍을 가면 보물찾기를 할 것입니다. 보물은 찾으라고 감추는 것입니다. 보물은 풀 속에도 감추고, 나무껍질 속에도 감추고 돌 밑에도 감춥니다. 눈에 불을 켜고 보물을 찾다가 찾으면 그 기쁨이 매우 큽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보물을 찾는 자세로 말씀 속에 담긴 보화를 찾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 덧붙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귀가 있다고 다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듣는 말귀가 있을 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우리가 영어를 듣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자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런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잠언 2:4,5절에서는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24a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 말씀은 NIV에서는 “Consider carefully what you hear.”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양이 풀을 먹고 되새김질을 하듯이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양은 초식동물로서 위가 4개입니다. 그 위는 순서대로 혹 위, 벌집 위, 주름 위, 보통 위로 되어 있습니다. 제일 큰 첫 번째 혹 위는 처음 먹은 물질이 들어가는 곳으로 보통 12.3L 가량 들어 갈수 있습니다.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을 경계하며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먹기 위해서 풀이나 곡류 따위를 주면 제1위나 제2위에 저장합니다. 이렇게 저장된 물질은 약 2시간가량 머무르는 동안 물과 혼합하여 반죽이 되는 운동과 미생물의 작용 등으로 소화준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는 덩어리가 반죽된 것을 한가할 때 입으로 다시 옮겨 씹어서 되새김질을 하는데 2~3분간 평균 50~60번을 한다고 합니다. 이때 1위나 2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3위로 가서 4위를 거쳐 창자로 들어갑니다. 이런 되새김질은 억센 먹이에 하고, 물이나 기타 되새김질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은 1위나 2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3위로 들어갑니다. 먹은 물질은 되새김질이 완전히 끝날 때 까지 보통 24시간 정도 걸리나 어떤 것은 8일간 남아 있는 물질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말씀을 듣고 기초 공부는 1위, 양들과 공부하는 것은 2위, 메시지를 듣는 것은 3위, 소감을 쓰고 실천하는 것은 4위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는 일대일 공부에 해당하는 2위 운동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생각할 때 말씀의 뜻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말씀이 자신의 것으로 소화되고 그로 말미암아 자립 신앙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것으로 소화된 말씀이 있으면 자기 감정이나 세상 욕심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주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둘째, 말씀을 헤아려야 합니다. 24b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이 말씀에서 헤아린다는 말은 원래 ‘되로 된다(measure)’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얼마나 큰 그릇을 가지고 오느냐에 따라서 말씀을 받는 양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조그만 홉을 내밀면 홉만큼 받습니다. 우리가 됫박을 내밀면 됫박만큼 받습니다. 말을 내밀면 말만큼 받습니다. 딤후 2:15절에서는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33절에서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초보자든, 전문가든, 대학자이든 그에게 맞게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질과 양에서, 깊이와 높이에서 일생동안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다가갈 때 풍성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깊이 헤아릴 때 믿음도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 수로보니게 족의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7:24-26). 그런데 예수님은 전과 달리 아주 매몰차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그녀의 청을 거절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녀를 개 취급하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들었다면 딸이고 뭐고 너 죽고 나 죽자며 대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속 좁게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청을 거절하실 수 있는 크신 분이요, 자기는 개밖에 되지 않는 처지라는 점을 겸손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만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베풀어 달라 간구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만일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속 좁게 헤아렸다면 화풀이 한 번 하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의 말씀을 큰마음과 큰 생각으로 헤아렸을 때, 그녀는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 자기 딸을 온전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10:45). 그러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하게 여기소서!” 하고 소리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데 감히 어딜, 하면서 잠잠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듣고 그를 데려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맹인 거지가 뛰어 일어나 오자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맹인 거지는 동냥 그릇을 내밀며 “한 푼 줍쇼.”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동냥 깡통 같은 작은 그릇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눈을 떠서 새로운 인생, 쓸모 있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에게 부탁했고, 예수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되 겨우 자신의 축복이나 생각하고,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한다는 게 겨우 자기 양이나 요회만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릇이 작은 사람입니다. 나를 떠나 세계를 생각하고, 현재를 넘어 미래를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상황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말씀을 헤아릴 때, 그만큼 생각의 폭과 길이와 높이가 커질 때, 그만큼 말씀을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능력은 세계 최고인데 속이 좁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좁은 나라에서나 해외에서나 갈라서기를 잘하고 싸우기를 잘합니다. 우리가 큰 일을 하려면 마음을 넓히고 큰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상 큰 말씀을 받고 큰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릇이 큰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훈련으로 그릇이 커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더욱 큰그릇과 큰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헤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 : 26,27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씨가 사람의 마음에 뿌려짐으로 시작됩니다. 씨는 심어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자랍니다. 씨를 심을 때는 자식같이 정성들여 해야 하고, 그 뒤엔 버리듯이 놔둬야 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때를 따라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돌보면 됩니다. 사실 물도 하나님께서 때마다 비를 내려 주셔서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냥 놔둬도 잘 자랍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와 반대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무를 심어놓고 사랑이 너무 깊은 나머지 심하게 근심하고 아침에 보고 저녁에 와서 또 들여다보고, 잘 자라고 있는가 흔들어도 봅니다. 이것은 오히려 나무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관심도 이러하고 양에 대한 목자의 간섭 또한 이러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농부는 땅에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밤낮 자고 깨면서 자기의 일상생활을 합니다. 그러는 동안 씨에서 싹이 트고 자랍니다. 농부는 그 신묘막측한 과정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씨에는 생명력이 있어서 반드시 싹이 돋고 자란다는 믿음입니다. 농부는 씨가 자라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는가 염려하면서 밭을 파보지 않습니다. 씨가 자랄 것을 믿고 자기 할 일을 합니다. 농부가 뿌린 씨에 생명력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면 반드시 싹이 돋아납니다. 그리고 성장합니다. 싹에 따라 성장의 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장합니다. 목자를 이를 믿고 자고 깨고 해야 합니다. 시간이 있으면 운동도 하고 소풍도 가고 쉬어야 합니다. 목자가 말씀의 생명력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요동하지 않고 말씀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농부는 씨의 생명력을 믿기 때문에 병충해로 작년 소출이 적었어도 올해는 또 씨를 뿌립니다. 가뭄으로 몇 해 소출이 없었다고 해도 또 씨를 뿌립니다. 농부는 병충해나 가뭄이 문제이지 결코 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일이년 양들 역사가 없었다 해도 씨의 생명력을 믿고 또 다시 말씀의 씨를 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씨의 생명력이 있고 싹이 트고 자라지만 단번에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단계가 있습니다. 땅에 심겨진 씨는 처음에는 싹이 돋아납니다. 이 싹이 자라면 그 다음에는 꽃을 피우고 이삭이 패입니다. 이삭이 패인 다음에도 햇볕을 받아서 맛있게 여물어야 합니다. 그 때서야 농부는 낫을 대어 추수를 합니다. 훌륭한 농부는 이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급하게 열매를 맺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 자라는 단계 단계를 살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 줍니다. 해충을 잡아주고 비료를 줍니다. 그리고 곡식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우리는 말씀을 심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콩나물을 키우기 위해서 시루에 물을 주다보면 어느새 나물이 풍성하게 자라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서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씨와 땅에 대한 믿음이 다 있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전하는 말씀에 대한 믿음도 필요하고 사람에 대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진리의 세계를 알고자 합니다. 일꾼은 씨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면 됩니다. 그러면 말씀을 듣는 사람이 소원을 가지고 찾아 먹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나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서 자라고 자라지 않는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이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사를 보면 형편없는 인간들을 쓰셔서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키시고 발전시켜 오셨습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마음에 여유를 갖고 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배웁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어떻게 양들을 목동으로 키우고 목자로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문제 많은 양들과 어떻게 씨름한단 말인가? 일대일은 해 줄 수 있어도 훈련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훈련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어떻게 애를 낳아서 키우지. 너무 아프고 힘들 것 같아’ 하면서 아예 아이를 갖지 않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낳고 키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양들을 키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 같이 부족한 자를 만민구속역사에 써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이 역사를 충성스럽게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3. 겨자씨 비유(30-34) : 30-32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십니다. 겨자씨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세상에는 호박씨, 무씨, 복숭아씨, 고추씨, 해바라기씨 등 많은 씨들이 있습니다. 겨자씨는 그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그래서 겨자씨가 다른 씨에 섞이면 겨자씨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작은 겨자씨가 땅에 심겨 자라면 땅의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냅니다. 3~7m까지 자라고 줄기도 팔뚝 만하게 굵어집니다. 겨자씨는 일년생 풀인데 나무와 같이 자랍니다. 그러면 피곤하고 지친 공중의 새들이 찾아와 그 가지에 깃들이며 안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실 때 세상 나라를 지배하던 종교, 사상, 철학, 문명 등은 거대해 보였습니다. 유대교는 로마 제국 내에서도 인정받는 종교였습니다. 그리스 로마 문명은 당대를 주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작된 예수님의 말씀은 큰 씨에 섞여 있는 겨자씨와 같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전한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비전을 보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압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 와서 쉼을 얻게 될 것을 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 세상을 살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죄의 짐으로 고생하며 수고하는 25억 명의 사람들이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쉼을 누리며 승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모든 종교와 사상을 압도하고 세계에서 영향력이 가장 큽니다.

  미국의 한 병동에서 신생아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너무나 가난하였고 신생아는 병약해서 그냥 버렸습니다. 병원에서도 인공호흡기를 꽂아놓고 숨이 멎도록 신생아를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한 은퇴한 노간호사가 그 죽어가는 신생아를 품에 안고 키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찬송가를 불러주고 기도해 주고 목욕시켜 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의 입속에서 찬송가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간호사는 너무나 기뻐서 이 아이를 손녀처럼 키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소녀가 자라 설리번 선생이 되었습니다. 그 설리번 선생은 또 앞을 못보고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삼중고의 한 소녀를 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녀가 자라서 후에 세계적인 석학이 된 헬렌켈러입니다. 설리번이나 헬렌켈러나 다 겨자씨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한 노 간호사가 포기하지 않고 말씀과 사랑으로 키웠을 때에 나중에 역사 속에 우뚝 솟은 거목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실의에 빠져 있던 수많은 사람들과 장애인들이 헬렌켈러의 삶을 통해 은혜를 받고 위로와 소망을 갖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미미하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됩니다.

  UBF 사역 초기,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대에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작게 보였습니다. 우리는 외국의 원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일인당 국민 소득이 60달러였습니다. 이런 때에 성경을 공부해 보니 주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문둥이같이 오그라진 손을 펴서 주라고 외쳤습니다. 동남아를 넘어 세계를 먹이자고 외쳤습니다. 46년 전 광주 대인동 176-1번지 이층집에서 시작한 이 작은 역사가 자라서 지금은 전국 130개 대학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받아야만 했던 나라에서 이제는 세계 90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세계 대학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도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단체가 되었습니다. 우리 동교 센터도 19년 전 신촌에 개척을 나왔는데 홍익대를 비롯해서 서강대, 육사, 명지대를 개척하고 7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복음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믿고 믿음으로 전한다면 계속해서 성장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섬기는 종 예수님을 잘 배워서 한 명을 잘 섬기고, 캠퍼스를 섬기고 세계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비밀을 헤아리며 풍성한 말씀의 종들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성장한다는 확실한 믿음 가운데서 인내하며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66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48 마가복음 이엘리야 3283 08-05
347 마가복음 이엘리야 3149 07-29
346 수양회 정베드로 4122 07-25
345 수양회 이요한 4398 07-22
344 수양회 구마가 3857 07-22
343 마가복음 이엘리야 3159 07-22
342 마가복음 이엘리야 3149 07-08
341 마가복음 이엘리야 3190 07-01
340 마가복음 이엘리야 3165 06-24
339 마가복음 이엘리야 3163 06-17
338 마가복음 이엘리야 3006 06-10
337 마가복음 이엘리야 3010 06-03
336 마가복음 이엘리야 3177 05-27
335 마가복음 이엘리야 3141 05-20
열람중 마가복음 이엘리야 3306 05-13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