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07 추수감사특강(누가복음17:11-19) "감사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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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추수감사특강
말씀 누가복음 17:11-19
요절 누가복음 17:16
감사하는 믿음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평생을 바다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성실하게 일 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하던 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과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 중 한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면서 지금까지 목숨을 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 대답했습니다. “단 두 명뿐이라네.” 그 친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삼십 년도 넘게 일 한 자네가 단 두 명밖에 못 구했다고? 농담하지 말게나.” 인명구조원은 친구에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구해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지.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날 찾아온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네. 난 그 두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도 같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인생의 험난한 바다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움을 넘기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사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너무나 쉽게 망각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감사를 위해 돌아온 열 명 중 한 이방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오늘 저희가 이 추수감사예배를 통해서 주님에게로 돌아가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1~14)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지역으로 마치 우리나라의 삼팔선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곳 한 촌 어귀에는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유대인이요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서로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다 같이 불행한 병을 얻었고, 그래서 사회적 신분이니, 민족적인 감정이니, 지역적인 갈등이니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손발과 코가 썩어 문드러진 모습으로 모두 추하고 흉측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사회에서 버림받았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국경 지대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동굴 같은 곳에서 모여 살면서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얼마의 식량을 건네주면 그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만일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때를 지어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들은 마치 거리를 활보하는 좀비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는 희망이나 기쁨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봅시다. 그런 그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소식이었습니다. 특히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자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고 깨끗이 낫게 해 주신 소식을 들었을 때 열명의 나병환자는 그 분을 만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서 거룩하신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예수님은 늘 무리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운명적인 생각에 빠져 자포자기 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멀리 서서 함께 소리를 높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사실 문둥병이 악화되면 목소리가 쉬기 때문에 허스키 목소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들으시도록 허스키 보이스로 합창을 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의 외침은 그야말로 영혼의 절규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간구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간구하는 소리는 예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속히 경계지역을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멈추어 서서 그들의 문제와 씨름해줄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울부짖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엽기적인 그들을 보고 기겁을 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긍휼한 심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a) 이는 그들에게 임한 구원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들을 무서운 질병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해방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치료하시는데도 항상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5장에 보면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그 자리에서 즉시 깨끗케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경우에는 그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고사하고 “깨끗함을 받으라.”는 따뜻한 말씀 한 마디조차 없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짧은 방향을 주셨습니다.
사실 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병이 아직 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니, 이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병 고침을 위해 손을 얹지도, 하늘을 향해 기도하지도 않으셨고 다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조건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이 문드러진 몸으로 단체 스트립쇼를 한다면 하나님의 종들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나균이 몸뿐 아니라 뇌까지 썩게 했다고 큰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짧은 방향에 대해서 야속한 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문둥병자라고 자존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존심이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존심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순종하여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만 했을 뿐인데, 그 말씀을 믿고 그냥 갔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추한 병이 깨끗이 낫게 된 것입니다. 14b절을 봅시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살갗의 반점이 사라지고 움푹 파인 살이 돋아나서 피부가 새 하얗게 회복되었습니다. 터지고 상한 피부들이 아주 깨끗해졌습니다. 나병환자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자입니다. 그런 자가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요 구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더럽게 보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판단 받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됩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이요 힘이 넘친다는 것이요 누구 앞에서나 떳떳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제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의 삶이 그리 쉽지 않고 특히 끝임 없는 자기부인의 삶인 것을 발견합니다. 육체를 입서 저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 과거의 죄성이 남아 힘들게 하고 고민하게 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믿고 살지만 늘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과 헛될 것 같은 염려 때문에 갈등을 합니다. 특히 병들고 부패한 자아로 인해 두려움과 교만이 생겨서 예수님처럼 자기 없이 섬기고 희생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괴롭습니다. 그러나 문둥이와 같이 추한 자신으로 괴로울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본문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깨끗해진 자신을 보았을 때, 모두들 감격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모두들 깨끗해진 자기들 몸을 새삼 만져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도 만져보았습니다. 꿈이 아닌가 했지만, 현실이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어떤 몹쓸 불치병이라도 근본적으로 고치실 수 있는 말씀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특별히 그 누구든지 진실하고 절박하게 간구할 때, 그 간구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때로 차갑게 반응하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정금과 같이 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훈련입니다. 저희가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그 길에서 소망 없이 보이는 병든 모습에 대해 깨끗함을 주십니다.
제2장 감사하는 믿음(15~19)
본문의 나병환자들이 추한 병이 나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정말 이 은혜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였습니다. 모두들 너무 기뻐 제사장에게 자기들 몸을 보이기 위해서 더 힘껏 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뛰어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거꾸로 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5,16절을 봅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 중 한 명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는 순간,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들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더니 감사했습니다. “예수님, 이 추한 인생을 이렇게 회복해 주시다니요, 이 은혜를 어찌 갚겠습니까? 더러운 인생을 깨끗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려 구입한 박카스 한 박스를 주님의 발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도 아니고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17,18절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으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분명히 깨끗함을 받은 후 열 사람이 다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중에 한 사람만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경멸해 마지않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 아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하나님께는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성전에서 감사제를 드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이며, 생애 최고의 선물을 마련하여 예물로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왔고, 그는 예수님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기뻐하시고 돌아오지 않은 아홉과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으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물론 돌아오지 않은 아홉 나병환자는 여러 핑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홉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 아홉의 변명’ 이라고 하는 작자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의심이 많은 한 사람은 “내가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을까?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지.”하고 가버렸습니다. 신중한 사람은 “재발(再發)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러니 며칠 두고 봐야겠어.”하고 가버렸습니다. 회의론자는 “내 병은 본래 문둥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나 봐.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은 거야.”라며 자연설을 주장했습니다. 상대주의자는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하고 가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가졌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가버렸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예수 선생께서 특별히 해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그저 ‘가서 보여라.’ 한 말씀 공부 밖에 안했잖아. 뭐 별로 해준 것도 없네.”라며 가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밖에도 여러 핑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것은 핑계할 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을 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직접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에게도 감사해야 했지만, 하나님께 감사했으니, 다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해결되었으니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초기에 예수님께 나아와 기도는 열심히 했지만 나중에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할 줄은 알아도 그것에 대해서 사례할 줄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자가 불과 십분의 일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실로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 줍니다. 다시 예수님께 돌아오는 시간을 희생해야 하는 것, 그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감사하다.’는 네 글자를 써서 보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내지 못합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내 마음과 시간을 할애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못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르셔서 당신의 목숨을 죄인들의 대속제물로 희생하십니다. 당신의 소중한 생명을 아낌없이 희생해서 십자가에 내어 보내 주셨지만 나는 정작 10분의 시간도, 한 푼의 물질도 드리기를 아까워한다면 얼마나 우리 주님께서 서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하는 자세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감사란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란 끊임없는 은총아래 사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나의 공로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마음 밖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란 본문의 한 나병환자가 나음을 받고 주님께 돌아왔듯이 구체적인 삶의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물론 감사하지 않는다고 벌하는 형법은 이 세상 어디도 없습니다. 그러나 탈무드에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아니한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를 때 벌써 그는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우찌모라 간죠(內村鑑三)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저주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은혜를 많이 입었어도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있다면 그 마음 자체가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심령이 메마르게 되고 불평, 불만, 짜증, 신경질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인도 선교사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 1761-1834)는 강아지가 촛불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8년 동안 번역해 오던 성경원고를 한 순간에 소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당장에 그 강아지를 개 패듯이 패서 보신탕집으로 팔아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강아지를 끌어안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 번역이 부족한 줄을 아시고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전보다 더 훌륭한 인도어 성경번역본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 않고 주님 뜻대로 들어주셔서 감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면 나는 오히려 주님의 뜻과 반대쪽으로 갔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 주님의 뜻대로, 만족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어떤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는 젊은데 조금만 어려움을 만나도 어린아이같이 속이 오그라들거나 노인처럼 한숨을 푹푹 쉬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내게 주기 원하시는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만 고집하는 자아 중독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과정 속에 있는 현재를 가지고 불평하지 말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금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작품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부분만 보고 좋았다 나빴다 판단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어디까지나 베스트의 결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현재 내게 주시는 것들이 가장 좋은 것임을 확신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살전 5:18). 그리고 시편 기자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시50:23).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박태환처럼 금메달을 따는 무슨 업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가 엎드려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삶,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유대인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으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리고 돌아온 이방인에게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돌아온 이방인의 믿음을 크게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가진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습을 보실 때 매우 기쁘셨습니다. 반면에 돌아오지 않는 아홉의 모습에 섭섭해 하셨습니다.
아홉은 나음을 받자 예수님의 존재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기 길로 갔고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나름대로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이 낫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나음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잊었을 때 그들의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선민이라서, 자기들이 순종해서, 자기들이 믿어서, 문둥병이 나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병이 낫는 순간, 예수님을 잊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이방인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았을 때, 자기에게 말씀을 주신 예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축복의 순간 예수님을 기억했고 가장 먼저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더욱 그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더 은혜를 잊었고 더 감사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스스로 자기 영혼을 깨우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사람들은 열 가지 받은바 은혜가 있어도 한 가지 상처를 받으면 열 가지 받은바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그 한 가지 받은바 상처만 마음 깊이 새기고 쓴 뿌리를 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려서 세 발 자전거를 안 사줬는가? 왜 우리 엄마는 소풍갈 때 안 따라 왔는가? 왜 우리 목자님은 내 생일을 까먹었을까? 왜 나에게 그런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가? 그래서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겨서 영원히 기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는 자식들이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감사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명절 때 특별히 많은 선물을 안 사가도 한번 찾아가 웃는 모습으로 바라만 보아도 부모님은 몹시 기쁩니다.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들이 특별히 무슨 선물을 하지 않아도 목자의 섬김과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했습니다.’ 표현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문자 메시지 몇 줄이라도 감사하다고 보내오면 그 날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는 더 기도해 주고 싶고, 더 축복해 주고 싶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더 도와주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예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기억하고 돌아온 이방인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길 기뻐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문둥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문둥병까지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난 별로 감사할 것이 없어, 올해도 작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잖아, 월급이 많이 오른 것도 아니고, 요회가 부흥한 것도 아니고, 학점이 잘 나온 것도 아니고. 누구는 장학금도 타고, 진급도 하고, 아들도 낳고, 에이, 짜증나! 나는 뭐 특별히 감사할 게 있어야지.” 그러나 감사는 무슨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그 입에서 저절로 튀어 나오는 것입니까? 히브리어로 감사(感謝; thank)한다는 단어는 ‘기억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의 뜻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받은 은혜를 깊이 돌아보면 감사할 요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은혜(恩惠)의 반대말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원망불평이 많았던 것은 배은망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홍해 앞에 있을 때에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셔서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과 사흘 뒤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먹고 원망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광야 1세대는 원망불평이 습관이 되어 망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낼 때, 굶어죽은 사람도 없었고, 발이 부르튼 사람도 없었습니다. 옷이 낡아서 못 입었다거나 신발이 해어진 사람도 없었습니다(신 29:5).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셨고, 날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모세와 여호와를 원망했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감사를 모르는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 나균이 뇌까지 침투하여 기억세포가 다 손상된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영적인 문둥병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아홉 명의 유대인은 이 역사적 사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가장 기본적으로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고, 우리를 기르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시 100:3,4). 우리는 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시 100:3). 특히 죄사함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시 103:3). 우리는 죄의식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했으며, 죄사함의 은혜를 얼마나 수없이 받았습니까?(시 103:3) 죄사함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후회스런 과거와 그로인한 죄의식으로 정신병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고 부활하시므로 우리를 모든 정죄와 심판과 형벌과 부자유를 온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하루에 천번, 만번 감사해도 부족합니다. 또한 거짓과 불신과 속임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실된 마음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골 3:15). 우리가 감사치 않은 배은망덕한 아홉의 그룹에 들지 않고,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의 그룹에 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감사가 우리 생활에 차고 넘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누가복음 17:11-19
요절 누가복음 17:16
감사하는 믿음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평생을 바다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성실하게 일 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하던 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과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 중 한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면서 지금까지 목숨을 구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 대답했습니다. “단 두 명뿐이라네.” 그 친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삼십 년도 넘게 일 한 자네가 단 두 명밖에 못 구했다고? 농담하지 말게나.” 인명구조원은 친구에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구해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지.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날 찾아온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네. 난 그 두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도 같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인생의 험난한 바다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움을 넘기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사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너무나 쉽게 망각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감사를 위해 돌아온 열 명 중 한 이방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오늘 저희가 이 추수감사예배를 통해서 주님에게로 돌아가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1~14)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지역으로 마치 우리나라의 삼팔선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곳 한 촌 어귀에는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유대인이요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서로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다 같이 불행한 병을 얻었고, 그래서 사회적 신분이니, 민족적인 감정이니, 지역적인 갈등이니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손발과 코가 썩어 문드러진 모습으로 모두 추하고 흉측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사회에서 버림받았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국경 지대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동굴 같은 곳에서 모여 살면서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얼마의 식량을 건네주면 그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만일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때를 지어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들은 마치 거리를 활보하는 좀비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는 희망이나 기쁨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봅시다. 그런 그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소식이었습니다. 특히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 자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고 깨끗이 낫게 해 주신 소식을 들었을 때 열명의 나병환자는 그 분을 만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서 거룩하신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예수님은 늘 무리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운명적인 생각에 빠져 자포자기 하거나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멀리 서서 함께 소리를 높여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사실 문둥병이 악화되면 목소리가 쉬기 때문에 허스키 목소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들으시도록 허스키 보이스로 합창을 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의 외침은 그야말로 영혼의 절규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간구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간구하는 소리는 예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속히 경계지역을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멈추어 서서 그들의 문제와 씨름해줄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울부짖는 기도를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엽기적인 그들을 보고 기겁을 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긍휼한 심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a) 이는 그들에게 임한 구원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들을 무서운 질병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해방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치료하시는데도 항상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5장에 보면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그 자리에서 즉시 깨끗케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경우에는 그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고사하고 “깨끗함을 받으라.”는 따뜻한 말씀 한 마디조차 없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짧은 방향을 주셨습니다.
사실 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병이 아직 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니, 이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병 고침을 위해 손을 얹지도, 하늘을 향해 기도하지도 않으셨고 다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조건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이 문드러진 몸으로 단체 스트립쇼를 한다면 하나님의 종들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나균이 몸뿐 아니라 뇌까지 썩게 했다고 큰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짧은 방향에 대해서 야속한 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문둥병자라고 자존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존심이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존심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순종하여 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만 했을 뿐인데, 그 말씀을 믿고 그냥 갔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추한 병이 깨끗이 낫게 된 것입니다. 14b절을 봅시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살갗의 반점이 사라지고 움푹 파인 살이 돋아나서 피부가 새 하얗게 회복되었습니다. 터지고 상한 피부들이 아주 깨끗해졌습니다. 나병환자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자입니다. 그런 자가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요 구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더럽게 보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판단 받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됩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이요 힘이 넘친다는 것이요 누구 앞에서나 떳떳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제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의 삶이 그리 쉽지 않고 특히 끝임 없는 자기부인의 삶인 것을 발견합니다. 육체를 입서 저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 과거의 죄성이 남아 힘들게 하고 고민하게 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믿고 살지만 늘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과 헛될 것 같은 염려 때문에 갈등을 합니다. 특히 병들고 부패한 자아로 인해 두려움과 교만이 생겨서 예수님처럼 자기 없이 섬기고 희생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괴롭습니다. 그러나 문둥이와 같이 추한 자신으로 괴로울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본문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깨끗해진 자신을 보았을 때, 모두들 감격했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모두들 깨끗해진 자기들 몸을 새삼 만져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도 만져보았습니다. 꿈이 아닌가 했지만, 현실이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어떤 몹쓸 불치병이라도 근본적으로 고치실 수 있는 말씀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특별히 그 누구든지 진실하고 절박하게 간구할 때, 그 간구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때로 차갑게 반응하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정금과 같이 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훈련입니다. 저희가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그 길에서 소망 없이 보이는 병든 모습에 대해 깨끗함을 주십니다.
제2장 감사하는 믿음(15~19)
본문의 나병환자들이 추한 병이 나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정말 이 은혜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였습니다. 모두들 너무 기뻐 제사장에게 자기들 몸을 보이기 위해서 더 힘껏 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뛰어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거꾸로 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5,16절을 봅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 중 한 명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는 순간,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들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더니 감사했습니다. “예수님, 이 추한 인생을 이렇게 회복해 주시다니요, 이 은혜를 어찌 갚겠습니까? 더러운 인생을 깨끗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려 구입한 박카스 한 박스를 주님의 발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도 아니고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17,18절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으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분명히 깨끗함을 받은 후 열 사람이 다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중에 한 사람만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경멸해 마지않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 아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하나님께는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성전에서 감사제를 드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이며, 생애 최고의 선물을 마련하여 예물로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왔고, 그는 예수님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기뻐하시고 돌아오지 않은 아홉과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으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물론 돌아오지 않은 아홉 나병환자는 여러 핑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홉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 아홉의 변명’ 이라고 하는 작자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의심이 많은 한 사람은 “내가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을까?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지.”하고 가버렸습니다. 신중한 사람은 “재발(再發)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러니 며칠 두고 봐야겠어.”하고 가버렸습니다. 회의론자는 “내 병은 본래 문둥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나 봐.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은 거야.”라며 자연설을 주장했습니다. 상대주의자는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하고 가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가졌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서 가버렸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예수 선생께서 특별히 해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그저 ‘가서 보여라.’ 한 말씀 공부 밖에 안했잖아. 뭐 별로 해준 것도 없네.”라며 가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밖에도 여러 핑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것은 핑계할 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을 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직접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에게도 감사해야 했지만, 하나님께 감사했으니, 다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해결되었으니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초기에 예수님께 나아와 기도는 열심히 했지만 나중에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할 줄은 알아도 그것에 대해서 사례할 줄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자가 불과 십분의 일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실로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 줍니다. 다시 예수님께 돌아오는 시간을 희생해야 하는 것, 그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감사하다.’는 네 글자를 써서 보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내지 못합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내 마음과 시간을 할애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못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르셔서 당신의 목숨을 죄인들의 대속제물로 희생하십니다. 당신의 소중한 생명을 아낌없이 희생해서 십자가에 내어 보내 주셨지만 나는 정작 10분의 시간도, 한 푼의 물질도 드리기를 아까워한다면 얼마나 우리 주님께서 서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하는 자세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감사란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란 끊임없는 은총아래 사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나의 공로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마음 밖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란 본문의 한 나병환자가 나음을 받고 주님께 돌아왔듯이 구체적인 삶의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물론 감사하지 않는다고 벌하는 형법은 이 세상 어디도 없습니다. 그러나 탈무드에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아니한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를 때 벌써 그는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우찌모라 간죠(內村鑑三)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저주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은혜를 많이 입었어도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있다면 그 마음 자체가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심령이 메마르게 되고 불평, 불만, 짜증, 신경질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인도 선교사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 1761-1834)는 강아지가 촛불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8년 동안 번역해 오던 성경원고를 한 순간에 소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당장에 그 강아지를 개 패듯이 패서 보신탕집으로 팔아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강아지를 끌어안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제 번역이 부족한 줄을 아시고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전보다 더 훌륭한 인도어 성경번역본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다 들어주시지 않고 주님 뜻대로 들어주셔서 감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면 나는 오히려 주님의 뜻과 반대쪽으로 갔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 주님의 뜻대로, 만족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어떤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는 젊은데 조금만 어려움을 만나도 어린아이같이 속이 오그라들거나 노인처럼 한숨을 푹푹 쉬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내게 주기 원하시는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만 고집하는 자아 중독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과정 속에 있는 현재를 가지고 불평하지 말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금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작품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부분만 보고 좋았다 나빴다 판단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어디까지나 베스트의 결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현재 내게 주시는 것들이 가장 좋은 것임을 확신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살전 5:18). 그리고 시편 기자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시50:23).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박태환처럼 금메달을 따는 무슨 업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가 엎드려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삶,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예수님은 돌아온 유대인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으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리고 돌아온 이방인에게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돌아온 이방인의 믿음을 크게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가진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습을 보실 때 매우 기쁘셨습니다. 반면에 돌아오지 않는 아홉의 모습에 섭섭해 하셨습니다.
아홉은 나음을 받자 예수님의 존재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기 길로 갔고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나름대로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이 낫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나음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잊었을 때 그들의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선민이라서, 자기들이 순종해서, 자기들이 믿어서, 문둥병이 나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병이 낫는 순간, 예수님을 잊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이방인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았을 때, 자기에게 말씀을 주신 예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축복의 순간 예수님을 기억했고 가장 먼저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더욱 그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더 은혜를 잊었고 더 감사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스스로 자기 영혼을 깨우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사람들은 열 가지 받은바 은혜가 있어도 한 가지 상처를 받으면 열 가지 받은바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그 한 가지 받은바 상처만 마음 깊이 새기고 쓴 뿌리를 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려서 세 발 자전거를 안 사줬는가? 왜 우리 엄마는 소풍갈 때 안 따라 왔는가? 왜 우리 목자님은 내 생일을 까먹었을까? 왜 나에게 그런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가? 그래서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겨서 영원히 기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는 자식들이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감사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명절 때 특별히 많은 선물을 안 사가도 한번 찾아가 웃는 모습으로 바라만 보아도 부모님은 몹시 기쁩니다.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양들이 특별히 무슨 선물을 하지 않아도 목자의 섬김과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했습니다.’ 표현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문자 메시지 몇 줄이라도 감사하다고 보내오면 그 날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는 더 기도해 주고 싶고, 더 축복해 주고 싶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더 도와주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예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기억하고 돌아온 이방인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길 기뻐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문둥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문둥병까지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난 별로 감사할 것이 없어, 올해도 작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잖아, 월급이 많이 오른 것도 아니고, 요회가 부흥한 것도 아니고, 학점이 잘 나온 것도 아니고. 누구는 장학금도 타고, 진급도 하고, 아들도 낳고, 에이, 짜증나! 나는 뭐 특별히 감사할 게 있어야지.” 그러나 감사는 무슨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 그 입에서 저절로 튀어 나오는 것입니까? 히브리어로 감사(感謝; thank)한다는 단어는 ‘기억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의 뜻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받은 은혜를 깊이 돌아보면 감사할 요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은혜(恩惠)의 반대말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원망불평이 많았던 것은 배은망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홍해 앞에 있을 때에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셔서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과 사흘 뒤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먹고 원망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광야 1세대는 원망불평이 습관이 되어 망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낼 때, 굶어죽은 사람도 없었고, 발이 부르튼 사람도 없었습니다. 옷이 낡아서 못 입었다거나 신발이 해어진 사람도 없었습니다(신 29:5).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셨고, 날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모세와 여호와를 원망했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감사를 모르는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 나균이 뇌까지 침투하여 기억세포가 다 손상된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영적인 문둥병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아홉 명의 유대인은 이 역사적 사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가장 기본적으로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고, 우리를 기르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시 100:3,4). 우리는 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고 참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시 100:3). 특히 죄사함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시 103:3). 우리는 죄의식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했으며, 죄사함의 은혜를 얼마나 수없이 받았습니까?(시 103:3) 죄사함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후회스런 과거와 그로인한 죄의식으로 정신병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고 부활하시므로 우리를 모든 정죄와 심판과 형벌과 부자유를 온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하루에 천번, 만번 감사해도 부족합니다. 또한 거짓과 불신과 속임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실된 마음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골 3:15). 우리가 감사치 않은 배은망덕한 아홉의 그룹에 들지 않고, 감사하는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의 그룹에 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감사가 우리 생활에 차고 넘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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