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07 사도행전 제5강(4:32-5:16)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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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사도행전 제5강
말씀 사도행전 4:32-5:16
요절 마가복음 5:11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경포대 해수욕장 입구에는 교통사고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사진에 보면 음주운전 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차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지고 선혈이 낭자합니다. 이 사진들이 음주운전 예방에 그렇게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외국 금연광고 중에 담배 피우는 남자의 다리가 타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는 광고가 있습니다. 너무나 끔찍해서 TV 광고를 내느냐, 마느냐 논란이 될 정도입니다. 술, 담배가 아무리 해롭다고 말해도 꿈쩍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강력하게 자극을 줍니다.
오늘 말씀에는 초대 교회에 큰 위기를 가져올 뻔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화가 있는데, 이 역사도 모든 시대 성도들에게 큰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사건은 사탄과 죄에 대한 무감각, 불감증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성령님을 의식하고 성령을 경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활발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성결한 교회, 성결한 내면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37)
4:32~37에서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가치관이 어떠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32절을 봅시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무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믿는 무리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했습니다. 우리는 장막에서 물건은 고사하고 양발 한짝 통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특히 무좀이 있는 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람들은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재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네 것, 내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집이나 밭도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무도 그런 삶을 그들에게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초대교회는 그럴 수 있었을까요?
먼저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이처럼 달라졌습니다. 마가 12장에 나오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보면, 주인은 농부들에게 세를 받기 위해서 종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려서, 또는 큰 부상을 입혀서 돌려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농부들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며 그 아들은 공경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아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마가 12:7) 그리고는 아들을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그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들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도원 소출뿐만 아니라 포도원까지도 자기들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그 상속자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인정했고,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포도원이 더 이상 자기들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는 것이 됩니다. 포도원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 자기 시간,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것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 달라진 것이 많이 있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특히 소유에 대한 의식이 달라진 것이 두드러집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움켜쥐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꾸리지도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놓습니다. 그들이 주되신 예수님을 믿었을 때 자기가 가진 것이 본래 하나님의 것이요, 그 아들 예수님의 것임을 깨닫고, 다만 그 동안 그것을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놓음으로 인해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도움을 얻었습니다.
고든 맥드날드가 쓴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라는 책에서 인간 유형을 두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과 ‘청지기적인 사람’입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재물, 지위를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지키는데 마음을 쓰고 아무도 자신의 소유를 손대지 못하도록 방어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소유물을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기고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감정은 항상 쫓기는 마음이요 불안감이요 두려움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소유물에 소유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청지기적인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빌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재물도 빌린 것이기 때문에 지키기 위해 집착하지 않고 남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뺏기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빌린 것을 잘 관리하고 남들을 위해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주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청지기’의 삶을 살게 되고 쫓겨 다니는 인생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됩니다. 나를 그토록 고통케 하는 모든 에고(ego)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또한 사도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되 특히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끝임 없이 증거했습니다. 33절을 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 말씀이 영어에는 “With great power the apostles continued to testify to the resurrection of the Lord Jesus”(NIV)라고 기록했습니다. 즉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힘 있게, 또 계속해서 증언했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영생의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계속적으로 보게 되었고 땅의 것, 자기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에 세상적인 욕심이나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에서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34,35절을 봅시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본문에서 ‘가난한 사람’은 ‘needy persons’로서 물질적으로 기본생활이 되지 않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모든 형제자매들을 자기 형제자매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물질을 나눠줌으로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가난한 것보다도 더 힘든 것이 바로 소득격차, 계층 간의 위화감, 박탈감 등의 상대적 빈곤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역자들은 보면 참으로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늘 베푸는 모습에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한 사모님은 새벽잠을 주장하지 않고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여 합심기도에 자신을 헌신합니다. 한 형제님은 자기 재물과 인생을 드려 캠퍼스 영혼을 위해 살고자 입시에 도전했습니다. 한 자매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소감을 쓰고자 결단했습니다. 한 자매 목자님은 이제 자기를 희생하며 섬기신 예수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개척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그라진 문둥이 같은 손을 펴서 장차 세계 캠퍼스를 향해 주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자기 것을 꾸리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인생에서 변화되어 주는 백성이 되도록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4:36~5:11)
4:36,37을 봅시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대교회의 역사에 본이 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구브로(Cyprus) 태생의 레위족인 요셉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레위족으로 유대 사회에서는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의 공직에 진출할 수 있고 사두개파에 속해서 재물과 권세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자신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인식하고 회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레위족으로서 평생의 짐이 되었던 율법과 외식의 멍에를 벗고 참 자유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은혜와 감격이 너무 커서 불철주야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인간적으로 갈릴리 어부 출신인 사도들보다 훨씬 잘난 사람이지만 영적인 질서를 존중하고 세웠습니다. 사도들은 그의 헌신을 아름답게 여겨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권면과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비해 자신의 헌신이 부족하다 여기고,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문전옥답(門前沃畓)을 팔아 주와 복음을 위해서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이렇게 착하고 성령이 충만한 그는 구브로의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었고 좋은 영향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대비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5:1,2을 봅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의미요 삽비라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아나니아는 그의 이름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삽비라 사모님은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여인으로 사랑과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문제없이 은혜를 누리며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성도들이 밭을 팔고, 팔찌를 팔고, 아기 돌 반지까지 팔아서 주와 복음에 드리는 것을 보며 도전을 받았습니다. 특히, 만나는 사람마다 바나바 목자님을 칭찬하고, 대표 소감에 은혜를 끼치며 두각을 나타나자 아나니아의 마음에 약간 서운한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도 믿음이 좋다고 인정받고 싶었고, 그래서 ‘아나니아’라는 흔하디흔한 이름도 이제 좀 멋있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도 땅을 팔아서 헌신하면 교회 내에서 VIP 대접을 받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부부가 서로 상의해서 소유를 팔기로 작정했습니다. 은근히 이웃에게 땅을 팔아 헌금하기로 했다는 소문도 흘렸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땅을 팔아서 현금으로 받고 보니 어마어마한 액수였습니다. 마침 예루살렘 부동산 경기가 좋아서 큰 수익이 있었습니다. 그는 좀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상 다 바치려고 하니 아무래도 허전했습니다. 오직 믿음과 소망만을 가지고 살기에는 어딘지 불안했습니다. 남보다 많은 재산을 내놓으려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교인들 앞에 체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이런 속사정을 털어놓자 그녀도 이해해 주었습니다. 이들은 전부 다 드리는 것은 너무 오버라고 생각하여 일부는 장래를 위해서 몰래 남겨두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드로 목자님이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겠어.’, ‘또 한 푼도 안 내는 사람들도 수두룩한데 이 정도면 양반이지.’하며 안도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정과 칭찬을 상상했습니다. “땅을 다 팔아서 주님께 헌신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가정을 보십시오. 이 분들의 헌신과 믿음이 얼마나 훌륭합니까?”라고 말하는 성도들의 칭찬을 상상하며 소감발표를 준비했습니다. 아나니아는 다음 날 땅 판 돈의 일부를 장롱 밑에 감추고 나머지를 가지고 사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마치 땅 값 전부를 드리는 양 의기양양하게 그 발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까지만 해도 사도들이 그 일을 알지 못하리라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상대로 아나니아의 이 모습을 보고 제2의 바나바가 나타났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목자님은 이상하게 별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차갑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을 봅시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분명히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더냐?” 아나니아는 땅에 대해서 자기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땅을 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판 값을 다 드리자니 아까워서, 일부는 숨기고 일부만 드리면서 그 일부를 마치 땅 값 전부인양 속이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왜 성령을 속이면서까지 땅 값 전부를 드린 것처럼 가장 했을까요?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3a절을 다시 봅시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헌금을 보지 않고 아나니아의 마음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도가 보기에 아나니아의 마음은 성령이 충만하지 않았고 사탄이 충만했습니다.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니 그가 하는 행동은 사탄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사탄의 행위였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사도들을 속이므로 성령님을 속였습니다. 사탄은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신 사람들만 의식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사람들에게 칭찬들을 일만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속까지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도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이는 사람을 의식하고 속이고 있었지만 동시에 성령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런 무지가 비극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 알고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것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베드로의 책망을 듣자 아나니아는 심장이 멈추고 혼이 떠나 그 자리에서 엎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존재를 의식하고 진실 되게 살아야함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의식하여 사람의 칭찬을 들으려고 자신을 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하면 약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진실하게 살면 됩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만큼 드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됩니다. 남보다 못 드리고 못 했다면 조금 부끄럽고 미안해하면 되고, 받은 은혜를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를 망하게 한 사탄은 늘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속이게 만듭니다. 안일하게 뒹굴다가 와서는 몹시 바빴던 것처럼 거짓말을 하게 만듭니다. 체면 때문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과장되게 만듭니다. 사람을 속이고 숨어서 죄악을 즐기게 만듭니다. 이러한 거짓에 빠지면 잔머리를 굴려 잠깐 거짓말을 하면 되기 때문에 힘들게 영적인 투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는 소감을 잘 쓰지만 피상적이고 고상한 죄만 회개하고 은밀하고 반복적인 죄는 절대로 회개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갈수록 부패해집니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이중적인 생활도 나중에는 감당할 힘이 없어 못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지루해 지고 세상 쾌락이 더 좋아지면서 급격히 영적 소원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불신자보다 못한 상태로 미끄러지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추한 행한 일을 하고 다닙니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은 아나니아의 속마음을 다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들의 속마음도 때가 되면 반드시 드러내십니다. 역대상 28:9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은밀한 중에 우리의 하는 것을 성령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신다고 하였습니다(1:14, 2:18, 19:12).
거짓이 있는 헌신에는 결코 기쁨이 없고 성장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을 두려워할 때만이 진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거짓되거나 과장이 없는 편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을 의식하고 사는 것은 거북하고 껄끄러운 것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6에서 말씀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간 큰 생각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투쟁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사단은 아나니아 부부에게 율법적인 생각을 심었습니다. 사도들이 행하는 역사는 은혜의 역사요 자원하는 역사였습니다. 33~35절에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때 모두가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에 기초해서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헌신했습니다. 아무도 요구하지도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다 파니 자기도 팔아야 할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이 다 내놓으니 자기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판 것을 다 내놓으려니 너무 아까웠습니다. 정작 가진 것을 다 드릴 만큼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안 드려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 드리는 척 하고서는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억지로가 아니라 은혜로,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헌신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진진하게 아나니아에게 말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땅을 팔지 않아도 되고, 내놓지 않는다고 누구도 그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그 마음에 가득해서 율법적인 생각, 강요한다는 생각, 정죄 받는다는 생각을 심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눈치가 보여 억지로 하고서는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성령을 속이는 데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거짓말 할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분량대로 하면 되었습니다. 헌금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각자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원하는 사람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모든 헌신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response)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절대 나의 공로가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공로가 개입될 때, 헌신한 다음에는 자기 의에 빠지고 헌신하지 못하면 정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우리가 사단이 심는 율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일방적인 은혜를 기억할 때 억지와 강요는 사라지고 자원하는 심정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기초해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주님께 반응할 때 주님께서도 기뻐 받으십니다.
7절을 봅시다. 청년들이 아나니아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간 후 세 시간쯤 지났습니다. 삽비라 사모님은 남편에게 일어난 일은 까맣게 모른 채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그녀에게 “그 땅 값 판 것이 이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예, 그것뿐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또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 베드로는 특히 “어찌 함께 꾀하였는가?”를 문제 삼았습니다. 동역의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남편이 딴 마음을 품을 때 “여보,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세요?” 하고 바가지를 긁든지, “그러다가 벼락을 맞아요. 우리 가족 다 망하는 꼴 보고 싶으세요?” 하고 경고하든지 해서 마음을 돌이키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남편과 마음이 맞아서 주의 영을 시험하는 일에 공모했습니다. 남편이 교회에서 높은 지위를 얻고 인정을 받으면 사모로서 떵떵거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아주 인간적인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동역을 하려면 부부라 할지라도 그 사이에 하나님을 두어야 마땅합니다. 신앙적으로 바르지 못한 언행을 할 때 맞장구를 쳐 주면 함께 죄짓는 길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고, 교만해지면 책망해 줄 수 있어야 진정한 동역이 아니겠습니까? 성령님은 회개의 기회마저도 저버리고 주의 영을 경홀히 여긴 삽비라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세 시간 만에 부부가 줄초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러한 문제를 덮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른 성도들도 그들의 겉으로 보이는 열심과 헌신만을 보고 직분과 더 많은 일을 맡겼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성령님이 기뻐하실까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살지 않고 사람 앞에서 특히 사도들 앞에서 살므로 성령 중심이 사라지고 인본주의가 팽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정욕을 품고 열심히 섬기는 자들, 많은 능력을 가지고 이중생활 하는 자들, 안일을 속이고 성장이 없는 자들, 교회 출석으로 경건을 가장하는 자들이 버젓이 제자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가장 진실 되고 성결해야할 교회 내에 거짓과 위선의 누룩이 퍼지면서 초대교회는 얼마가지 못해 문을 닫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공동체가 인간적인 모임이 되어 조금씩 혼탁해지고 균열이 생기더니, 마침내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러했고, 중세시대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때문에 이는 초대교회가 부딪히기 시작한 심각한 영적 위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눈에 보이는 형벌을 통해서 성령을 속이는 죄악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밝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이 문제를 드러내고 맞서 싸웠을 때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11절을 봅시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아나니아 부부의 일을 듣고 사람들은 다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NIV 성경은 “큰 두려움이 온 교회를 사로잡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를 친목 클럽 정도로 생각했던 ‘little 아나니아’와 ‘little 삽비라’들이 깜짝 놀라서 모두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함부로 살아온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숨은 행동을 드러내는 주님의 종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외식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전 안에는 도리어 편의주의와 물질주의가 가득했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구제가 외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전을 버리셨습니다. 결국 성전은 40년 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새로 태어난 초대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일을 통해 당시 유대교의 부패를 경고하시고 하나님 돌아오도록 재촉하셨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있을 때, 이를 드러내고 분명하게 해결할 때 역사는 더욱 크게 일어납니다. 12절을 보면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솔로몬 행각에 모였고, 백성들이 그들을 칭송했습니다.
15,16절을 봅시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 말씀에서 베드로만 빼면 꼭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읽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났던 일들이 사도들을 통해서도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을 통해서도 그런 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가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의식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교회와 자신의 성결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께서 교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성령은 바나바가 위로의 아들임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아나니아가 거짓의 아들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성령을 속일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야 말로 성령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비전의 교회였습니다. 이 비전은 우리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성령을 의식하고 성령 안에서 사랑과 평화와 자유를 누리길 기도합니다. 온갖 사탄의 간계로부터 교회 가운데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사도행전 4:32-5:16
요절 마가복음 5:11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경포대 해수욕장 입구에는 교통사고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사진에 보면 음주운전 하다가 사고가 났는데, 차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지고 선혈이 낭자합니다. 이 사진들이 음주운전 예방에 그렇게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외국 금연광고 중에 담배 피우는 남자의 다리가 타들어가는 장면이 나오는 광고가 있습니다. 너무나 끔찍해서 TV 광고를 내느냐, 마느냐 논란이 될 정도입니다. 술, 담배가 아무리 해롭다고 말해도 꿈쩍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강력하게 자극을 줍니다.
오늘 말씀에는 초대 교회에 큰 위기를 가져올 뻔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화가 있는데, 이 역사도 모든 시대 성도들에게 큰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사건은 사탄과 죄에 대한 무감각, 불감증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성령님을 의식하고 성령을 경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활발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성결한 교회, 성결한 내면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37)
4:32~37에서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가치관이 어떠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32절을 봅시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무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믿는 무리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했습니다. 우리는 장막에서 물건은 고사하고 양발 한짝 통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특히 무좀이 있는 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람들은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재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네 것, 내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집이나 밭도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무도 그런 삶을 그들에게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초대교회는 그럴 수 있었을까요?
먼저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이처럼 달라졌습니다. 마가 12장에 나오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보면, 주인은 농부들에게 세를 받기 위해서 종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려서, 또는 큰 부상을 입혀서 돌려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농부들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며 그 아들은 공경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아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마가 12:7) 그리고는 아들을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그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들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도원 소출뿐만 아니라 포도원까지도 자기들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그 상속자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인정했고,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포도원이 더 이상 자기들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는 것이 됩니다. 포도원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 자기 시간,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것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 달라진 것이 많이 있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특히 소유에 대한 의식이 달라진 것이 두드러집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움켜쥐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꾸리지도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내놓습니다. 그들이 주되신 예수님을 믿었을 때 자기가 가진 것이 본래 하나님의 것이요, 그 아들 예수님의 것임을 깨닫고, 다만 그 동안 그것을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놓음으로 인해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도움을 얻었습니다.
고든 맥드날드가 쓴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라는 책에서 인간 유형을 두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과 ‘청지기적인 사람’입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재물, 지위를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지키는데 마음을 쓰고 아무도 자신의 소유를 손대지 못하도록 방어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소유물을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기고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감정은 항상 쫓기는 마음이요 불안감이요 두려움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소유물에 소유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청지기적인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빌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재물도 빌린 것이기 때문에 지키기 위해 집착하지 않고 남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뺏기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빌린 것을 잘 관리하고 남들을 위해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주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청지기’의 삶을 살게 되고 쫓겨 다니는 인생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됩니다. 나를 그토록 고통케 하는 모든 에고(ego)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또한 사도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되 특히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끝임 없이 증거했습니다. 33절을 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 말씀이 영어에는 “With great power the apostles continued to testify to the resurrection of the Lord Jesus”(NIV)라고 기록했습니다. 즉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힘 있게, 또 계속해서 증언했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영생의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계속적으로 보게 되었고 땅의 것, 자기 것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사라졌습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에 세상적인 욕심이나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에서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34,35절을 봅시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본문에서 ‘가난한 사람’은 ‘needy persons’로서 물질적으로 기본생활이 되지 않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모든 형제자매들을 자기 형제자매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물질을 나눠줌으로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가난한 것보다도 더 힘든 것이 바로 소득격차, 계층 간의 위화감, 박탈감 등의 상대적 빈곤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동역자들은 보면 참으로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늘 베푸는 모습에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한 사모님은 새벽잠을 주장하지 않고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여 합심기도에 자신을 헌신합니다. 한 형제님은 자기 재물과 인생을 드려 캠퍼스 영혼을 위해 살고자 입시에 도전했습니다. 한 자매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소감을 쓰고자 결단했습니다. 한 자매 목자님은 이제 자기를 희생하며 섬기신 예수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개척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그라진 문둥이 같은 손을 펴서 장차 세계 캠퍼스를 향해 주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자기 것을 꾸리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인생에서 변화되어 주는 백성이 되도록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4:36~5:11)
4:36,37을 봅시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초대교회의 역사에 본이 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구브로(Cyprus) 태생의 레위족인 요셉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레위족으로 유대 사회에서는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의 공직에 진출할 수 있고 사두개파에 속해서 재물과 권세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자신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인식하고 회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레위족으로서 평생의 짐이 되었던 율법과 외식의 멍에를 벗고 참 자유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은혜와 감격이 너무 커서 불철주야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인간적으로 갈릴리 어부 출신인 사도들보다 훨씬 잘난 사람이지만 영적인 질서를 존중하고 세웠습니다. 사도들은 그의 헌신을 아름답게 여겨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권면과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비해 자신의 헌신이 부족하다 여기고,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문전옥답(門前沃畓)을 팔아 주와 복음을 위해서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이렇게 착하고 성령이 충만한 그는 구브로의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었고 좋은 영향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대비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5:1,2을 봅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의미요 삽비라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아나니아는 그의 이름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삽비라 사모님은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여인으로 사랑과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문제없이 은혜를 누리며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성도들이 밭을 팔고, 팔찌를 팔고, 아기 돌 반지까지 팔아서 주와 복음에 드리는 것을 보며 도전을 받았습니다. 특히, 만나는 사람마다 바나바 목자님을 칭찬하고, 대표 소감에 은혜를 끼치며 두각을 나타나자 아나니아의 마음에 약간 서운한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도 믿음이 좋다고 인정받고 싶었고, 그래서 ‘아나니아’라는 흔하디흔한 이름도 이제 좀 멋있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도 땅을 팔아서 헌신하면 교회 내에서 VIP 대접을 받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부부가 서로 상의해서 소유를 팔기로 작정했습니다. 은근히 이웃에게 땅을 팔아 헌금하기로 했다는 소문도 흘렸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땅을 팔아서 현금으로 받고 보니 어마어마한 액수였습니다. 마침 예루살렘 부동산 경기가 좋아서 큰 수익이 있었습니다. 그는 좀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상 다 바치려고 하니 아무래도 허전했습니다. 오직 믿음과 소망만을 가지고 살기에는 어딘지 불안했습니다. 남보다 많은 재산을 내놓으려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교인들 앞에 체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이런 속사정을 털어놓자 그녀도 이해해 주었습니다. 이들은 전부 다 드리는 것은 너무 오버라고 생각하여 일부는 장래를 위해서 몰래 남겨두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드로 목자님이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겠어.’, ‘또 한 푼도 안 내는 사람들도 수두룩한데 이 정도면 양반이지.’하며 안도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인정과 칭찬을 상상했습니다. “땅을 다 팔아서 주님께 헌신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가정을 보십시오. 이 분들의 헌신과 믿음이 얼마나 훌륭합니까?”라고 말하는 성도들의 칭찬을 상상하며 소감발표를 준비했습니다. 아나니아는 다음 날 땅 판 돈의 일부를 장롱 밑에 감추고 나머지를 가지고 사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마치 땅 값 전부를 드리는 양 의기양양하게 그 발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까지만 해도 사도들이 그 일을 알지 못하리라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상대로 아나니아의 이 모습을 보고 제2의 바나바가 나타났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목자님은 이상하게 별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차갑게 말씀하셨습니다. 3,4절을 봅시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분명히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더냐?” 아나니아는 땅에 대해서 자기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땅을 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판 값을 다 드리자니 아까워서, 일부는 숨기고 일부만 드리면서 그 일부를 마치 땅 값 전부인양 속이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왜 성령을 속이면서까지 땅 값 전부를 드린 것처럼 가장 했을까요?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3a절을 다시 봅시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헌금을 보지 않고 아나니아의 마음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도가 보기에 아나니아의 마음은 성령이 충만하지 않았고 사탄이 충만했습니다.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니 그가 하는 행동은 사탄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사탄의 행위였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사도들을 속이므로 성령님을 속였습니다. 사탄은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신 사람들만 의식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사람들에게 칭찬들을 일만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속까지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도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이는 사람을 의식하고 속이고 있었지만 동시에 성령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런 무지가 비극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 알고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것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베드로의 책망을 듣자 아나니아는 심장이 멈추고 혼이 떠나 그 자리에서 엎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존재를 의식하고 진실 되게 살아야함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의식하여 사람의 칭찬을 들으려고 자신을 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하면 약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진실하게 살면 됩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만큼 드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됩니다. 남보다 못 드리고 못 했다면 조금 부끄럽고 미안해하면 되고, 받은 은혜를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를 망하게 한 사탄은 늘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속이게 만듭니다. 안일하게 뒹굴다가 와서는 몹시 바빴던 것처럼 거짓말을 하게 만듭니다. 체면 때문에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과장되게 만듭니다. 사람을 속이고 숨어서 죄악을 즐기게 만듭니다. 이러한 거짓에 빠지면 잔머리를 굴려 잠깐 거짓말을 하면 되기 때문에 힘들게 영적인 투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는 소감을 잘 쓰지만 피상적이고 고상한 죄만 회개하고 은밀하고 반복적인 죄는 절대로 회개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갈수록 부패해집니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이중적인 생활도 나중에는 감당할 힘이 없어 못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지루해 지고 세상 쾌락이 더 좋아지면서 급격히 영적 소원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불신자보다 못한 상태로 미끄러지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추한 행한 일을 하고 다닙니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은 아나니아의 속마음을 다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들의 속마음도 때가 되면 반드시 드러내십니다. 역대상 28:9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은밀한 중에 우리의 하는 것을 성령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신다고 하였습니다(1:14, 2:18, 19:12).
거짓이 있는 헌신에는 결코 기쁨이 없고 성장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을 두려워할 때만이 진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거짓되거나 과장이 없는 편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을 의식하고 사는 것은 거북하고 껄끄러운 것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6에서 말씀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는 간 큰 생각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진실하게 살고자 투쟁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사단은 아나니아 부부에게 율법적인 생각을 심었습니다. 사도들이 행하는 역사는 은혜의 역사요 자원하는 역사였습니다. 33~35절에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때 모두가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에 기초해서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헌신했습니다. 아무도 요구하지도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다 파니 자기도 팔아야 할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이 다 내놓으니 자기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판 것을 다 내놓으려니 너무 아까웠습니다. 정작 가진 것을 다 드릴 만큼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안 드려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 드리는 척 하고서는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억지로가 아니라 은혜로,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헌신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진진하게 아나니아에게 말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땅을 팔지 않아도 되고, 내놓지 않는다고 누구도 그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그 마음에 가득해서 율법적인 생각, 강요한다는 생각, 정죄 받는다는 생각을 심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눈치가 보여 억지로 하고서는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성령을 속이는 데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거짓말 할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분량대로 하면 되었습니다. 헌금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각자의 믿음의 분량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원하는 사람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모든 헌신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response)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절대 나의 공로가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공로가 개입될 때, 헌신한 다음에는 자기 의에 빠지고 헌신하지 못하면 정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우리가 사단이 심는 율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일방적인 은혜를 기억할 때 억지와 강요는 사라지고 자원하는 심정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기초해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주님께 반응할 때 주님께서도 기뻐 받으십니다.
7절을 봅시다. 청년들이 아나니아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간 후 세 시간쯤 지났습니다. 삽비라 사모님은 남편에게 일어난 일은 까맣게 모른 채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그녀에게 “그 땅 값 판 것이 이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예, 그것뿐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또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 베드로는 특히 “어찌 함께 꾀하였는가?”를 문제 삼았습니다. 동역의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남편이 딴 마음을 품을 때 “여보,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세요?” 하고 바가지를 긁든지, “그러다가 벼락을 맞아요. 우리 가족 다 망하는 꼴 보고 싶으세요?” 하고 경고하든지 해서 마음을 돌이키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남편과 마음이 맞아서 주의 영을 시험하는 일에 공모했습니다. 남편이 교회에서 높은 지위를 얻고 인정을 받으면 사모로서 떵떵거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아주 인간적인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동역을 하려면 부부라 할지라도 그 사이에 하나님을 두어야 마땅합니다. 신앙적으로 바르지 못한 언행을 할 때 맞장구를 쳐 주면 함께 죄짓는 길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고, 교만해지면 책망해 줄 수 있어야 진정한 동역이 아니겠습니까? 성령님은 회개의 기회마저도 저버리고 주의 영을 경홀히 여긴 삽비라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세 시간 만에 부부가 줄초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러한 문제를 덮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른 성도들도 그들의 겉으로 보이는 열심과 헌신만을 보고 직분과 더 많은 일을 맡겼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성령님이 기뻐하실까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살지 않고 사람 앞에서 특히 사도들 앞에서 살므로 성령 중심이 사라지고 인본주의가 팽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정욕을 품고 열심히 섬기는 자들, 많은 능력을 가지고 이중생활 하는 자들, 안일을 속이고 성장이 없는 자들, 교회 출석으로 경건을 가장하는 자들이 버젓이 제자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가장 진실 되고 성결해야할 교회 내에 거짓과 위선의 누룩이 퍼지면서 초대교회는 얼마가지 못해 문을 닫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공동체가 인간적인 모임이 되어 조금씩 혼탁해지고 균열이 생기더니, 마침내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러했고, 중세시대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때문에 이는 초대교회가 부딪히기 시작한 심각한 영적 위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눈에 보이는 형벌을 통해서 성령을 속이는 죄악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밝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이 문제를 드러내고 맞서 싸웠을 때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11절을 봅시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아나니아 부부의 일을 듣고 사람들은 다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NIV 성경은 “큰 두려움이 온 교회를 사로잡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를 친목 클럽 정도로 생각했던 ‘little 아나니아’와 ‘little 삽비라’들이 깜짝 놀라서 모두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함부로 살아온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숨은 행동을 드러내는 주님의 종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외식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전 안에는 도리어 편의주의와 물질주의가 가득했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구제가 외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전을 버리셨습니다. 결국 성전은 40년 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새로 태어난 초대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일을 통해 당시 유대교의 부패를 경고하시고 하나님 돌아오도록 재촉하셨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있을 때, 이를 드러내고 분명하게 해결할 때 역사는 더욱 크게 일어납니다. 12절을 보면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솔로몬 행각에 모였고, 백성들이 그들을 칭송했습니다.
15,16절을 봅시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 말씀에서 베드로만 빼면 꼭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읽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났던 일들이 사도들을 통해서도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을 통해서도 그런 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가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의식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교회와 자신의 성결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께서 교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성령은 바나바가 위로의 아들임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아나니아가 거짓의 아들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성령을 속일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야 말로 성령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비전의 교회였습니다. 이 비전은 우리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성령을 의식하고 성령 안에서 사랑과 평화와 자유를 누리길 기도합니다. 온갖 사탄의 간계로부터 교회 가운데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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