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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07 사도행전 제4강(사도행전 4:1-31) "다른 이로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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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081회 작성일 07-11-06 15:25

본문

2007 사도행전 제4강
말씀 사도행전 4:1-31
요절 마가복음 4:12
다른 이로써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복음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은 제자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최초로 만났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였습니다. 우리의 말로 하면 매우 상태가 좋지 못한 양이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무엇을 얻을까”하고 바로보았지만 사도생활을 시작한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과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그 이름’과 ‘그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에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랬더니 그 운명적인 인생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었고 개인의 권능과 경건도 부족했지만, 앉은뱅이를 건강하게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이러한 구원의 이유가 무엇인지 증거합니다.

  제1장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1~12)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걷게 한 사건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교회를 통해 일어난 최초의 믿음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파문은 매우 컸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5천명이나 되었으니 종교지도자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절을 봅시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이튿날 공회(公會; Sanhedrine; 이스라엘 최고 의결기관이자 종교재판소)를 소집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사형 판결을 받으셨던 바로 그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등 역대의 대제사장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워놓고 심문했습니다. 7절을 봅시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여기서 ‘이 일’이란 구체적으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된 사건을 일컫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들은 엄청난 권세 앞에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금이 떨리고 사지가 마비되어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과거 이들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멀찍이 좇았습니다(마태 26:58). 또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이들이 두려워서 문을 잠그고 떨고 있었습니다(요한 20:19). 그러나 지금 그는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말했습니다. 8b~12절을 봅시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법정에 선 사람은 사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과거 성전 미문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도움이나 구걸했던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생기가 넘치는 얼굴로 공회원들 앞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면서 서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 “How he was healed.”
  이 병자의 치유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면서 앉은뱅이였고 나이도 마흔 살이 넘어 생각이 굳어졌고, 장애가 너무나 심해서 어디에 가든 사람들에게 매여서 다녀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그의 증세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어떤 의사도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자가 어떤 의료적인 수단도 사용하지 않고 나았습니다. 그의 치유는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뛰어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의 치유는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나아서 성한 몸으로 공회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성안에서 잘 알려진 자였고 그가 일어난 일은 이제 ‘유명한 표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알고 싶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했고 무엇으로 그 사람이 건강해졌는지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또 ‘무엇으로’ 라는 의문을 가지고 여러 말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심한 병이 들어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가를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무리 힘든 문제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안다면 그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알고 보면 끝임 없이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김태희처럼 이뻐질 수 있을까? 어떻게 재태크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일까?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왜냐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안다면 모르는 사람보다 더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정말 병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몸이 병든 사람 뿐 아니라 마음이 병든 사람도 많습니다. 요즘 크리스천, 넌크리스천 예외 없이 성 중독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전체 7999명 중 36.8%인 2946명이 자신이 ‘성(性) 중독’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들은 자위, 성인동영상, 성인개임 등을 예로 들며 ‘성(性)중독이 가장 끊기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분 중에도 건강하게 살지 못하고 깊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뭔가 정리가 제대로 안된 상태로 삽니다. 그 결과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비정상적으로 삽니다. 그래서 본문의 앉은뱅이처럼 내적으로 일어서지 못하고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과 이해를 구걸하면서 삽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고 그냥 앉아 있는 모습은 정말 비참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건강하게 될 수 있을까요?
  마음이 병들어서 마땅히 자기 할 일도 못하는 사람, 가족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는 사람,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지만 정작 이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눌려버리거나 아예 타협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했습니다. 9,10절을 봅시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우리 중에도 건강하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앉은뱅이였다가 건강하게 되어 일어나 열심히 뛰어다니며 열매 맺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건강하게 되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저번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했고 그랬을 때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그만한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을 보면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 젊은이들을 주저앉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홍익대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깊은 좌절감에 휩싸여 주저앉아 있습니다. 미대생들도 꿈과 비전을 잃어버린 채 술과 쾌락에 소중한 젊음을 내맞기며 소망 없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실제로 사람을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듭니다. 멀쩡한 사람도 구걸하게 만듭니다.
  또한 제자양성의 실패감과 시대의 문제가 어느새 우리 목자들을 주저앉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자양성은 몇몇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역사 환경이나 만들며 살고자 작정하고 앉아있는 분도 있었습니다. 평신도 생활을 하며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 기가 눌리고 힘을 잃어버린 분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고 건강한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람에게서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일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 이는 당시 예수님을 비하(卑下)해서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살리셔서 구원의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이 이름을 대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에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전할 때,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 힘은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중풍병자와 같이 쓸모없는 자를 일으킵니다. 정욕 때문에 부패해진 자를 신선하게 하고, 운명 때문에 무기력하게 된 자를 활기 있게 하고, 이기적이고 미움이 가득한 자를 사랑이 풍성하게 하고, 죄의식과 자의식에 시달리는 사람을 유쾌하게 합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할 때 살아나지 못하고 일어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 이름’과 ‘그 이름을 믿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을 가지게 하십니다. 새롭게 일어나게 하십니다. 불가능에 도전하게 하십니다. 저희가 앉은뱅이와 같이 주저앉아 있던 인생을 청산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은 계속됩니다. 11절을 봅시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너희 건축자들’이란 바로 앞에 둘러싸고 있던 유대인들이요 유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왜 버렸습니까? 건축자들은 나름대로 집을 지을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설계에 따라 돌을 쌓고자 했습니다. 돌을 쌓고자 하면 우선 돌을 다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들 생각대로 다듬어지질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중심으로 집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집을 지으려면 자기 계획을 버려야 했지만 버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 집이 무너진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계획을 위협한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맞추어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보면 예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매스컴과 문화를 지배하고 사람들의 생각마저 지배하면서 절대 진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상대주의의 절대화로 인해 진리를 가르치면 꽉 막힌 사람 취급을 받고 왕따를 당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무어라 하셨습니까?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진리에 맞추어 살기 싫어합니다. 자신의 죄악된 욕망을 만족시키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버리기로 작정했고 죄의 소원대로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죄의식을 느끼며 살고 싶지 않아 마음속에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버리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베드로는 이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집’이란 하나님이 지으시는 ‘신령한 집’을 의미합니다. 신자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기준석입니다. 기준석에 맞추어 다음 돌을 쌓아갑니다. 그 돌에 맞추어 다른 돌을 깎고 다듬습니다. 좋은 건축자는 수시로 항상 그 머릿돌을 응시하며 줄이 어긋나지 않도록 벽돌을 맞추어 쌓아갑니다. 예수님은 그런 기준석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중심으로 신령한 집을 지어가길 원하십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집을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 속에서도 예수님을 머릿돌로 삼고 신령한 집을 지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고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신뢰하며 진리를 쫓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찾아 제자 양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베드로도 과거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신자의 생활을 넘어 제자의 생활을 시작했지만 예수님께 대한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언제든지 예수님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허물이 계집종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서까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다시 찾아오사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목이 매여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까스로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은 그를 인간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회복하사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에게는 현실적으로 은과 금은 없었지만 그의 가슴 안에 ‘그 이름’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의지하여 앉은뱅이를 향해 말했습니다. “일어나 걸어라.” 놀랍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가 힘을 얻더니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는 이제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확신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봅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다른 이름을’ 하며 다른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았고, 또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고쳤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구원한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나사렛 예수를 천하게 생각했고, 그런 천한 이름에 구원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힘, 다른 이름을 고집했습니다. 사도들을 겁주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여러 구원 중에 하나라고 말하기를 좋아하고 아예 다른 곳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의지하는 ‘다른 구원’이 얼마나 많습니까? 존 힉(John Hick)이라는 영국의 종교학자는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각 지역에서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에, 그 시대, 그 지역에 맞는 신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그럴싸합니까? 이런 학자들이 영국의 캠브리지,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대학들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자들조차 돈을 자신의 구원처럼 여기고 주식에 목을 매고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결혼하기보다는 신랑의 경제력을 보고 결혼합니다. 예수 그 이름을 의지하여 살기보다 온갖 처세와 인간적인 능력을 앞세우며 문제를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라도 모든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 베드로와 우리의 확신은 동일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제2장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13~22)
  13절을 봅시다. 공회원들은 베드로가 무식한 갈릴리 촌놈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거침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게다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두 발로 곧게 서서 그들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 거짓말하지 말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었습니다. 16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구원의 역사가 실제로 일어났고, 그들은 이를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사도들이 하는 일을 막고자 했습니다. 17절을 봅시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동시에 사도들을 불러 경고했습니다. 18절입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이것이 산헤드린 공회의 최종 판결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고 퍼지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자 하는 사단의 전략이었습니다. 사단은 ‘그 이름’을 매우 싫어하고 ‘그 이름’을 세상에서 없애버리고자 합니다. ‘그 이름’을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버리고자 합니다. 이에 사도들이 타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핍박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석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19,20절을 봅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의 판결을 무시할 때 어떤 위험과 처벌이 행해질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이 고생스럽지 않고 편한가?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자신에게 편한 쪽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분명히 하나님 편에서 옳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무서운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지라도 진리를 지키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결단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20절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그 일은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 외 예수님의 행적이나 가르침 또한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있는 새교훈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광풍을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시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사셔서 직접 구운 생선을 드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40일 동안 함께 있으면서 확실히 사심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바람과 같고 불의 혀같은 성령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의 힘으로 40년 동안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나서 걷고 뛰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요, 실체였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본 것도 아니고, 5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일시에 보았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간질거리는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때 종교지도자들은 한사코 예수님의 능력을 부인하도록 협박했습니다. 부모까지도 피해를 보지 않고자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어떻게 말했습니까?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한 9:25) 그는 지금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자신이 체험한 그것, 자신이 한 가지 아는 것, 자신이 과거 맹인이었지만, ‘지금은 보게 된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서머나 교회 초대감독이었던 폴리갑이 복음을 전하다가 86세의 나이에 로마 군병들에게 잡혔습니다. 그는 매우 늙은 노인이었지만 굳건하고 장엄한 인품이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훌륭한 인품을 가진 그를 채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총독은 그의 나이 많음을 생각하여 마음을 바꾸고 고통과 죽음을 면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이때 폴리갑이 대답한 말은 기독교 순교역사에 길이 남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는 내게 은혜만 베푸셨을 뿐, 한 번도 나를 저버리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총독이 진노하여 산 채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폴리갑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잠시 붙었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 된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시행하십시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떤 핍박가운데서도 믿음의 중심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보고들은 예수님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장에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그 이름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과거 얼마나 정욕적이고 교만했는데 예수님이 나 대신 비참하게 되시사 죄를 씻어 주시고 새사람 만들어 주셨는가, 내가 과거 얼마나 사람들 사이에서 열등감에 시달리고, 죄의 노예 되어 비참했는데 주님이 한량없는 은혜를 주사 이제 힘 있고, 자유로운 인생을 살게 하셨는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직접 체험한 이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보고 들은 예수가 있기 때문이고 그 예수는 십자가에 나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시고 나에게 새 인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사도들이 증언했던 내용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요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증인들이었습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의 증거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놓아주었습니다.

  제3장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23~31)
  사도들이 놓이고 그들은 성도들에게 돌아와서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우리 다음부터는 조심합시다. 복음을 전하더라도 지혜롭게 전하고, 특히 종교지도자들이 많은 예루살렘에는 얼씬도 하지 맙시다.”고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말했습니다. 24~28절을 봅시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시편 2:1,2에 기초해서 세상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이미 예정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권력자들의 훼방이 허사(虛事)로 끝날 것임을 알았습니다. 세상 권력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 사도들이 하는 일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29,30절을 봅시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난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의 이름인 것을 세상이 알기를 바랐습니다. 사도들의 시대에 권력자들의 위협이 심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적했고 그 역사를 훼방했습니다. 그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목표도 사도들의 목표와 동일합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기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저희가 예수의 이름을 믿고 주저앉아 있는 우리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예수님을 대신하여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말씀의 손, 기도의 손으로 병든 미대․공대생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모든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교회 성도들의 기도가 마치자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31절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어떤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서 제2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의 이름이 만유에 높임을 받도록 기도하고 일할 때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우리가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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