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사도행전 2007 사도행전 제3강(3:1-26)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047회 작성일 07-10-28 14:12

본문

2007 사도행전 제3강
말씀 사도행전 3:1-26
요절 마가복음 3:16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지난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일어난 일들을 배웠습니다. 먼저 사도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보고 다른 언어로 말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된 자들이 주의 영이 임하자 앞날의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들이 이제 예수 믿는 신자가 되어 최초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권능의 역사는 오늘 말씀에서 예수 이름 권세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1~10)
  1절을 봅시다. 제 구 시, 즉 오전 9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과거 두 사람은 경쟁심과 인간적이 야심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나서기를 잘하는 베드로를 볼 때마다 요한은 속이 쓰렸고, 그가 은근히 힘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이 부어주시는 성령을 받자 그들은 영원한 동역자요 형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육신이 연약하여 기도하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난 후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날 마나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서 기도하는 기도의 동역자요 세계 선교를 위해 함께 하는 선교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미문(美門; beautiful gate)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즉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보았습니다. 그 앉은뱅이 거지의 자리는 아름다운 고린도산 놋쇠로 만들어진 미문(beautiful gate)앞이었습니다. 그것은 약 23미터 높이에 거대한 이중문이었는데, 그 멋진 문 발치에 이 앉은뱅이가 초라하게 구걸을 하면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그의 형편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다리가 있어도 걸을 수 없었습니다. 박지성이처럼 멋있게 축구도 하고 아름다운 여인과 믿음의 결혼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면서 앉은뱅이라 성장도 멈추어 신체가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불행의 원인이 자신 때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났고 똑바로 걸어 다니는 놈들이 괜 실이 미웠습니다. 낳은 엄마도 밉고,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도 싫었습니다. 동네 애들이 그의 머리를 툭 치고는 ‘나 잡아봐라’고 하며 장난칠 때 늘 당하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밤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도저히 가족들을 깨울 수가 없어서 속옷에 싸기도 많이 쌌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밥값이라도 벌어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날마다 그를 성전에까지 떠메어 오고는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성전 관리인들도 다른 거지는 다 내 쫓아도 그에게만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마당이라 구걸하는 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고, 수입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한푼 두푼 모으는 가운데 그의 나이 40이 넘었으니(행 4:22), 그는 반평생을 앉은뱅이 거지로 지내 온 셈입니다.
  3절을 봅시다. 그 날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앉은뱅이는 반사적으로 “앉은뱅이에게 자비를!” 하면서 깡통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데로 처량하고 불쌍하게 보이려고 평소 연습해 두었던 헐리우드액션을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주목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라.”(Look at us!)(4)
  베드로는 성령 충만했고 그의 말에 힘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 거지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웬 사람이 큰 돈을 주려는가 싶어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하고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과연 저 손에서 배추 잎사귀가 나올까? 수표가 나올까? 저들의 마음을 주장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는 그에게 베드로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6절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7). ‘우두둑’ 소리와 함께 빼빼 말랐던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태어나서부터 40년간 걸어본 적이 없는 그가 힘을 얻어 캥거루처럼 풀쩍 뛰어 올랐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걷기 시작하고 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자의식과 열등감으로 주변만 맴돌더니, 이제 성전을 자기 집처럼 활보하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평소 부러워하던 김연아선수처럼 그 자리에서 뛰어 공중 3회전도 해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할렐루야, Praise the Lord.” 모든 백성이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일로 인해 너무나 놀라워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에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가 부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이처럼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현재 예수님의 육신은 없어지고 그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죽은 이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지만 그 이름을 믿고 부르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앉은뱅이와 베드로가 대조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자요 돈을 얻고자 하는 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고 했을 때도 직관적으로 ‘무엇을 얻을까?’를 생각하고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40년 동안 앉은뱅이의 사고방식이 이제 아예 체질화되어 버렸습니다. 반면에 베드로와 요한은 주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사도들은 어느새 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전에 그들은 본문의 앉은뱅이와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무엇인가 받기를 바라고 예수님을 쫓던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영광을 얻기를 바랬습니다.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 더 나은 자리를 얻기를 바라고 예수님께 좌우편 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도들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세상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처럼 가진 것 없는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자신감이 넘쳐서 말했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그러면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것은 바로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알았고 그래서 앉은뱅이에게도 담대하게 명령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우리 가운데 본문의 앉은뱅이와 같은 외적인 장애를 가진 분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앉은뱅이들이 있습니다. 늘 받기만 바라고 주기는 싫어하는 극심한 이기심도 내적인 앉은뱅이의 특징입니다. 자기 두 발로 땅을 딛고 자립적으로 살지 못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고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사는 분이 있습니다. 끝임 없이 사랑깡통을 두드리며 목자님의 사랑받기를 바라느라 목자님의 눈치를 보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오랫동안 성장이 없이 정체되어 있는 분이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작년과 올해가 다르게, 믿음이 커지고 사랑이 커지고 분별력이 깊어져야 하는데, 1년이 되고, 10년이 지나도 성장이 없으면 그는 앉은뱅이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지만 생각만 하고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진취적으로 섬기고 싶지만 죄의 세력에 눌려 주저앉은 분도 있습니다. 앉아있으면서 은과 금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환경탓, 부모탓, 목자탓, 부족한 자신 탓을 하며 운명적으로 사는 분도 있습니다. 한창 열심히 공부하고, 비전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워야 할 나이에 음란 영상물과 게임에 사로잡혀 소중한 시간을 뭉개는 분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내적인 앉은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새롭게 일어나 걷고 뛸 수 있는 힘이 필요하고 손을 잡아 일으켜 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이 없어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가지면 새롭게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얻고자 하는 인생에서 일어나 주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누구라도 일어나 걷는 삶을 줄 수 있는 영적 권세자가 됩니다. 금과 은이 없어도 괜찮고, 좋은 머리가 없어도 괜찮고, 능력이 좀 부족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의 베드로는 외적으로 볼 때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능력이 나타남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런 그와 함께 살아계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불가능을 극복할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 구속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 대학생들을 돕는 길이 무엇일까요? 이 시대 대학생들은 돈에 소망을 두고 젊음과 정열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돈은 사람이 몇 끼 밥을 사먹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의 발목을 새 것으로 바꿔주고, 휠체어를 자동으로 교체해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돈이 있다고 해서 돈을 믿기 때문에 앉은뱅이가 되고, 또 돈이 없다고 해서 절망하여 앉은뱅이가 됩니다. 돈이 있든지 없든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과 금을 주지 않고 믿음을 심으려 하면, 그런 도움은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실제적인 사랑이 없으니 보이지도 않는 믿음이나 심으려든다고 목자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치면 “내가 걸을 수 있을까?”하고 의심하면서 그대로 주저앉아 있거나, 연약해서 못 일어나겠다고 엉엉 우는 분도 있습니다. 이럴 때 믿음을 심기 위해서 꾸짖기도 하고 싸워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어찌하든지 일어서도록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켜 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피차간의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때에라도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은과 금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어나 걷게 되고, 내면이 강건해 집니다. 자기 발로 뛰어다니는 기쁨과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목자님을 볼 때도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지 않고, “무엇을 도울까?” 하며 살피게 됩니다. 저희가 은과 금으로 사람을 돕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심고 이 시대 대학생들을 일으켜 세우길 기도합니다. 

  제2장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11~16)
  9,10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그 유명한 미문 앞 앉은뱅이 거지를 걷게 하자 사람들이 이를 알고 놀라서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과거 베드로 같았으면 'V'자를 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떠벌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보시오. 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켰소이다.” ‘불의 사자 베드로, 예루살렘에 나타나다.’ 이런 플래카드를 붙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2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람들이 볼 때 분명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를 주목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주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로 호들갑스럽게 놀라지도 말라 했습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자기를 주목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자신의 권능과 경건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까요?
  베드로는 스스로 그 능력이 절대 자기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임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며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주목해주면 어떠합니까? 정말 살맛이 나고 기분이 좋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힘이 납니다. 나의 작품이 교수님의 주목을 끌면 나 자신 장래의 미켈란젤로라도 될 것같아 하루를 행복하게 삽니다. 나의 리포트가 주목을 끌면 스스로 뭐라도 된 것 같아 자존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목해주지 않으면 존재의미를 잃어버리고 밥맛이 떨어지고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세상 자매님들이 주목을 받기 위해 나름대로 꽃단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지만 남성들이 본채 만채 하고 더 파시(foxy)한 자매에게 눈길을 주면 시기심에 분이 납니다. 교수님과 선배님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열심히 작품을 만들었는데 교수님이 내 친구의 작품을 주목하면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여 눈물이 날만큼 서글퍼집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 특별히 좋은 일로 주목을 받으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고 힘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이 나에게는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나를 주목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할까요?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나를 주목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주목받기 위해서 앉은뱅이를 고친 것도 아니었고 좋은 메시지를 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했고,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서 듣는 사람들 모두 앉은뱅이의 삶에서 일어나 걷게 되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것을 즐기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러면 베드로는 무엇을 주목하도록 돕습니까? 13~15절을 봅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베드로는 주목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며 책망합니다. 그들은 과거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으신 것을 알고 놓아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오히려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며 생명의 주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생명의 주는 사람들이 죽인다고 해서 죽음가운데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사도들이 목격자요 그 증인입니다(15).
  그리고 베드로는 무엇이 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낫게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16절을 봅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말을 살펴볼 때 무엇이 이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입니까?
  첫째, 그 이름의 능력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베드로는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믿었을 때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려서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는 과거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시고 걷게 하신 사건을 생각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걷게 한 사건을 생각했습니다. 중풍병자가 자기 상을 들고 일어난 사건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그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말했더니,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역사를 간증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님의 이름 그 자체가 사람을 성하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안에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람들의 이름과는 다릅니다. 예수 그 이름은 당시에 멸시받고 천대받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온 몸이 발가벗겨진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수치스런 이름이요,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9~11은 말씀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나 무비스타 톰 크루즈의 이름이 나오면 미친 듯이 열광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들은 우리의 인생에 어떤 변화도 힘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박지성선수가 아무리 축구를 잘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이름을 빌려 쓴다고 우리가 축구를 잘하게 됩니까? 그 이름을 아무리 빌려 써도 저의 발은 ‘개’발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돈을 잘 벌지만 우리가 그 이름을 빌려 쓴다고 우리가 돈을 잘 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김태희자매의 이름을 빌려 쓴다고 나에게서 김태희자매님의 미모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이름들은 우리를 죄와 그로인한 속박에서 구원할 수 없고 오히려 열등감을 줍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영생을 줄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상에 더 이상 형상으로 보이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성도들의 마음 안에 예수님의 이름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능력이 있습니다. 마가 16:17,1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둘째로,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16b절을 봅시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방금 전에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앉은뱅이를 완전히 낫게 했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이제도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나의 주요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즉 "through him" 그 믿음은 예수를 통해서 온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의지나 힘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그 믿음은 무슨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를 쓴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슬퍼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마가 16:14). 그때 예수님이 정말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가 믿음을 가지도록 지속적으로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했습니다. 그랬더니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믿음도 주십니다.
  셋째로, 그 믿음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 안에 예수님의 이름이 사람을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믿었을 때, 베드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의 심각한 문제에 도전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앉은뱅이를 완전히 낫게 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을 가지면 자신이 먼저 건강한 인생을 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가지면 그 양이 완전히 낫게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많은 사람을 건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함께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이 생생해야 합니다.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생기면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중세에 유명한 성경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중세교회는 이제 돈도 많고, 건물도 많고, 땅도 많고, 성직자들도 많다. 우리는 아예 성당바닥을 은과 금으로 깔아버렸다. 그러나 왜 초대교회 때만큼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경건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다른 외적인 것들이 아무리 화려해도 우리 내면에 예수가 없고 다시 사신 예수가 없으면 아무런 능력도, 아무런 은혜의 역사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다 부족해도 내 내면에 예수가 있으면 우리는 은혜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 예수가 생생하게 살아있고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우리를 통해서 놀랍게 역사할 것입니다. 

  제3장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요(17~26)
  앞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하기보다 예수님을 주목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들의 내면에 예수님을 심었고 예수님의 이름 능력이 역사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안에게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먼저,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입니다. 19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예수님의 이름 안에 죄사함이 있고 죄사함 뒤에는 ‘새롭게 되는 날’이 옵니다.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자가 새 부대가 되고, 죄가 굳어져 해결되지 않던 자가 죄가 없어지고 새로워지는 날이 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하는 자에게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임할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20절을 봅시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이 날은 예수 재림의 날이요 우리가 영원한 복락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 다음, 그 종을 세워 복을 주십니다. 26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항상 축복을 받고, 악함을 버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그 이름의 능력을 배웠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의 능력도 배웠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그 이름 안에는 구원이 있고, 건강이 있고, 더 나아가 완전히 낫는 일이 있습니다. 새롭게 되는 날이 있고, 악이 제하여 지고 결국 축복을 받습니다. 이 가을 축복을 바라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자신을 헌신해야 할까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을 얻기 위해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소감을 깊이 쓰며 오로지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때 비로소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통해 믿음이 생생해지면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에 예수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65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63 특강 문바울 2839 11-18
362 사도행전 문바울 3026 11-11
361 사도행전 문바울 3082 11-06
열람중 사도행전 문바울 3048 10-28
359 사도행전 문바울 3296 10-21
358 사도행전 임요한 3262 10-14
357 특강 문바울 2927 10-07
356 특강 문바울 2871 09-30
355 마가복음 문바울 3240 09-23
354 마가복음 문바울 3302 09-16
353 마가복음 문바울 3443 09-09
352 마가복음 문바울 3844 09-02
351 마가복음 문바울 4068 08-27
350 마가복음 이엘리야 3162 08-19
349 마가복음 이엘리야 3186 08-1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