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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07 사도행전 제2강(2:1-47) 성령의 강림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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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295회 작성일 07-10-21 14:33

본문

2007년 사도행전 제2강
말씀 사도행전 2:1-47
요절 마가복음 2:3
성령의 임하심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기상학자들에 의하면 초속 10km 태풍의 경우 우산을 제대로 가누기가 어렵고, 15km 태풍이 불면 허술한 간판이 떨어져 나가고, 20km 태풍이 불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몸을 30도정도 굽혀야 걸음을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 30km 태풍이 불면 목조건물이 날아가고, 40km가 되면 작은 돌멩이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60km 태풍이 불면 철탑이 무너지고 전봇대가 뽑힌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태풍이 터키의 헝키 태풍인데, 118km였습니다. 이 정도면 사람은 물론이요, 자동차가 날아가고, 집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무서운 위력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있어서 문화적, 사상적, 역사적으로 강력하고 위력적인 강풍이 불어 닥친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제자들은 강력한 권능(the power)을 얻었고, 그들의 증언이 세상을 뒤집어놓았습니다. 본래 제자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제1장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1~13)
  1절을 봅시다. 오순절 날이 이른 때였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이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리던 곳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2,3절을 봅시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집 안에서 문을 닫아두고 있으면 바람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온 집안에 갑자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임했습니다. ‘쉬~익’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바람처럼 강하고 빠른 어떤 신비한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역사를 설명할 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바람은 급하고 강한 태풍처럼 강력한 ‘성령의 바람’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바람들이 있습니다. 치맛바람, 춤바람, 투기바람, 게임바람 등. 이런 바람들은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파괴시키는 망국풍(亡國風)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은 각 사람과 가정과 사회를 살리는 생명의 바람입니다. 이 성령의 바람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걱정과 근심, 번민과 괴로움, 헛생각과 어두움의 먹구름들을 순식간에 몰아내는 강력한 위력이 있습니다. 또한 그 가정과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미신과 우상숭배를 뿌리 뽑고, 악습을 쓸어버리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성령의 바람은 민족과 세계를 살리는 역사창조의 바람입니다. 18․19C 조나단 에드워드나 찰스피니가 이끌었던 미국의 1,2차 대각성운동은 바로 성령의 바람이 강력하게 미국의 대륙을 강타했던 역사였습니다. 19C말, 20C초 25,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던 SVM운동도 D.L Moody를 중심으로 성령의 바람이 미국 캠퍼스에 몰아쳤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UBF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196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은 4.19, 5.16이후 가난하고 부패한 시대 속에서 패배의식과 운명주의에 사로잡혀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통한 성령의 급하고 강한 바람이 광주, 전주, 대전, 대구, 서울 등 전국각지로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독일과 미국, 캐나다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세계 80여 개국의 캠퍼스들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인위적인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바람의 진원지가 어디입니까? 초대교회 성령의 역사의 진원지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하늘로부터 강력한 성령의 바람이 임하고 능히 2041년까지 십만 선교사를 파송하는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음을 믿고 바라봅니다.
  또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활활 타오르는 불입니다. 성령의 불은 식어진 가슴에 뜨거운 열정이 불타오르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이 임하게 되면 게으르고 안일하던 사람이 부지런해집니다. 오전수업 빼먹고 점심까지 늘어지게 자던 사람이 새벽기도를 합니다. 불은 모든 더러운 것들을 태워 버립니다. 성령의 불은 마음의 정욕과 온갖 음란한 생각, 미움과 질투심, 그리고 불평과 불신 등 내면의 쓰레기들을 다 소멸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혀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두려움과 소심함 때문에 말을 잘 못하던 사도들이 불의 혀를 가지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절을 봅시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해하며 말했습니다. 7b~11절을 봅시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사도들이 언제 외국어를 배웠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갈릴리 사투리밖에 쓸 줄 모르던 촌놈들이었습니다. 갈릴리 촌구석에 ELS, YBM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우리만 보아도 10년 이상 영어를 배웠지만 제대로 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미국에서는 거지도 다 하는 영어를 우리나라에서는 석박사들조차 배우려고 안달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되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외국어로 유창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역사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입과 혀를 사용하시면 얼마든지 능력 있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최권능 목사님은 입만 열었다하면 “예수 천당, 불신지옥”을 위치는 복음전도자였습니다. 한번은 평양시내에서 말을 타고 가던 일본 순사에게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외쳤다가, 그만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순사가 떨어져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조차 기가 죽지 않고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순사들이 채찍으로 때리며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채찍에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 불신지옥,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며 더 크게 외쳤습니다. 지쳐버린 형사들이 “넌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에는 예수가 가득 차 있소. 성령이 가득차 있단 말이요. 그래서 누가 건들기만 해도 예수가 튀어나오고 복음이 튀어나오는 것이요.” 그는 평양신학교를 꼴찌로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무려 7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복음전파는 인간적인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내 안에 충만하신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귀신을 쫓아낸다든지, 아니면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시지 않고 제일 먼저 외국어 능력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1절을 봅시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성령은 다른 무슨 일보다 제자들이 땅 끝까지 나아가 각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고 듣는 사람들 속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임재하심이 마음에 새롭게 들어왔을 것입니다.
  과거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일은 없고 사람들만 보였을 때 그에게는 사람이 하는 말이나 사람의 행동들이 너무나 크게 보였습니다. 심지어 작은 계집종 하나도 마치 무서운 거인처럼 보였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삼키고 죽일 것 같아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사람에게 완전히 눌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보고 말하는 그의 모습 속에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아무리 큰 사람이라도 아주 작게 보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갈렙과 여호수아 장군은 그 땅을 주실 하나님의 큰 일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는 그 땅의 장대하고 강한 사람들이 마치 잘 차려진 밥상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도리어 자기들이 메뚜기처럼 보였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제 더 이상 사람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할 수 있는 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보면 주로 사람의 일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주로 무엇입니까? 사람의 일들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크게 보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게다가 주요 관심이 물건사고 파는 일들, 이성교제, 주식현황, 연예가소식입니다. 이런 일들 속에서 어느새 우리는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리고 소진됩니다. 세상 일과 사람의 일을 크게 보고 그 일에 눌려 스트레스를 받으며 삽니다. 세상에 주눅 들고 자기를 메뚜기와 같이 여기며 비참해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보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현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의 이루고 계신 큰 일을 보고 각 나라 언어로 대상이 누구든지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세상과 성경에 대한 통찰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보게 되었을 때 사람을 의식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자신과 캠퍼스와 이 민족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일을 볼 수 있도록 큰 사람으로 빚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소시민족인 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좁고 작은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큰 일을 보고 말하는 영적 지도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12~47)
  12,13절을 봅시다. 사도들이 다 자기들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자 사람들이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말했습니다. “이 어찌 된 일이냐?” “쟤들이 어떻게 저렇게 외국어를 잘하지. 신기한 일이네.” 어떤 이들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시면 말이 많아집니다. 혀도 꼬부라지고, 왠지 기분이 좋아서 뭔가를 열심히 말합니다. 즉 사도들이 혀 꼬부라진 말을 하고, 시끄럽게 증거하는 모습이 마치 술 취한 사람과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술은 술인데 술 냄새가 나지 않으니, “거 참 신기한 술이네. 새 술인가 봐.”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도들을 술꾼으로 오해하자 베드로는 일어나 소리 높여 말했습니다.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말대로 자기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15). 17~21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말세에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예언이 요엘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육에 속한 사람으로 육적인 일만 생각하고 말합니다. 육체는 미래가 없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힘이 빠지고 쇠하여 집니다. 육체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셀 푸코는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육체, 오직 육체뿐이다.” 그래서 인간이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죄를 짓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말세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여기서 “내 영”은 곧 성령입니다. 사람의 육체는 그 안에 무엇이 부어지는가에 따라서 생각하는 바가 달라지고, 행동하는 바가 달라지고, 꿈꾸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그 육체가 돈 욕심으로 가득 차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돈 버는 생각만 합니다. 연애감정으로 가득한 사람은 누구건 치마만 둘렀다 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음란한 영상을 입력하는 사람은 항상 지저분한 상상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오늘날 사단은 인터넷과 영상물을 통해 끊임없이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감각적인 내용들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영적인 소원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해지고 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부음바 된 사람은 어떠합니까? 17절을 봅시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예언이나 환상, 꿈은 모두 앞날의 일들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현재를 벗어나게 되고 ‘에고(ego; 자아)’를 벗어나게 됩니다. 성령이 부어지면 앞날의 일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이 앞날을 알면 현재를 다르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자녀들의 관심은 어디 있습니까? 온통 만화나 게임, 가수나 연예인, 운동선수에게 쏠려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아이들이 미래를 예언합니다. 또 젊은이들은 연애하는 재미나 부자 되는 정보, 아니면 현실의 어려움이나 장래 불안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그들은 환상, 즉 비전(Vision)을 봅니다. 또 늙은이들은 과거의 추억이나 회상하고, 자기를 어른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슬퍼하며 우울증에 빠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늙은이들도 미래에 관심을 갖고 꿈을 갖습니다. 비전과 꿈이 없는 사람은 비참합니다. 죽은 자와 같습니다. 육체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죽은 자들을 살릴 뿐만 아니라 예언과 비전과 꿈을 갖게 합니다.
  젊은이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환상을 보는 것입니다. 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비전은 야심과 같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것입니다. 타인 중심적이고, 범세계적인 것입니다. 비전은 겨우 나 한사람의 인생이 회복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이 회복되고 전 세계가 복음으로 회복되는 것을 꿈꾸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안락에 자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내고자 열정을 불태우며 숭고한 포부를 간직하며 사는 것입니다. 비전은 시대와 역사와 미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입니다. 비전은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황량해도 그 땅이 개척되고 옥토로 변하는 희망찬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전은 청년들을 살아있게 합니다. 젊은 피를 끓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뭔가를 향해 매달리게 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하게 만듭니다.
  다음은 UBF선배들의 1966년 소회일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UBF라는 모임에서 비전이라는 단어를 배웠고 늘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위에 이루어 기독교 문화를 쌓고 자주와 독립과 부강과 승리의 생활을 쟁취하여 후진성을 모면하고 정신문화의 수준을 높여 세계로 진출할 것을 바라보자. 동남아의 주역이 되자. 우리가 젊은 지성인으로서 비전을 갖는 것은 가장 귀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가?” 우리의 선배들은 소수였지만,  이처럼 큰 비전이 있었을 때 가난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세계로 진출할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자기의 안정을 넘어서서 국가와 민족과 세계복음화를 꿈꾸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복음화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비전은 이처럼 그 사람의 실제 삶을 위대하게 하고 역사적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결코 허황된 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저희들에게 말세에 때에 성령을 폭포수와 같이 부어주사 21세기 세계 캠퍼스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환상을 보고 역사창조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오늘날 젊은이의 개념을 넓혀야 하겠습니다. 요즘은 50대도 노약자석에 앉으면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평신도 목자님들은 아직도 젊습니다. 저희가 너나없이 환상을 보고 예수님처럼 열두제자를 양성하여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9,20절은 사도 베드로가 본 환상(Vision)의 내용입니다.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베드로는 미래의 일을 보았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말세의 징조였습니다. 세상에는 빛이 없어지고 어두워집니다. 어두움 속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으므로 결국 죽음뿐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가 세상에 가득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을 베드로후서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아무 탈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벧후3:9~14; 표준새번역개정)
  성령이 임했을 때 베드로는 말세의 징조를 보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장차 있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음을 알고 현재를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미래의 환상을 보고 요엘의 말을 빌려 구원의 소망을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1)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말세의 징조를 분별하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갈망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재림의 환상을 마음에 품고 세계 선교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체가 된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구약에 예언된 성령의 역사임을 증거한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자들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23절을 봅시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요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고의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대로 살고 싶지 않았고 자기를 고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며 그 주권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자는 죽어야 한다.”며 빌라도에게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무참히 죽였고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24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다윗은 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예언했습니까? 25절입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다윗에게 예수님은 죽어버린 분이 아니라, 항상 살아계시고 그리고 항상 ‘내 앞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는 날 동안 숱한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항상 살아계신 주님이 다윗을 요동치 않게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런 주님으로 인해 다윗은 어떻게 소감 발표했습니까?  26~28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그렇습니다. 다윗에게 예수님은 항상 살아계신 주님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로 이어졌습니다. 32,33절을 봅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사도들은 술 취한 것도 아니고 헛소리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21절을 다시 봅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님은 살아나셔서 항상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권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믿고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어두움에서 벗어나고 죄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육체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셔서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권능을 주셔서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이러한 설교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37절을 봅시다. 그들은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이 몹시 찔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지할꼬?”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음을 인정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38)
  성령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죄가 아무리 크고 추하다 할지라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죄를 토해내고 회개할 때 누구든지 성령을 선물로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숫자가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사에도 위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은 길선주장로가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숨은 죄를 고백하며 회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친구가 죽으면서 자기 재산을 잘 관리하여 홀로 남은 아내를 도와 달라 했는데 이익금 얼마를 빼돌렸습니다. 그는 부끄러운 죄를 눈물로 회개하며 다음날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주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숨은 죄를 고백하며 눈물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사이면서 몰래 아편을 피운 죄를 회개했고, 어떤 사람은 몰래 기생집에 간 죄, 남의 물건을 도적질한 죄, 교역자를 시기하고 미워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이처럼 회개의 봇물이 터지자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여 뜨거운 기도의 열기가 예배당 지붕을 날아가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저녁 일곱 시에 시작된 기도회가 새벽두시가 넘도록 끝나질 않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회개운동이 불길처럼 타올라서 금수강산을 불태웠습니다. 그 결과 1905년에 321개였던 교회가 2년 만에 642개로, 3만 명 교인수가 10만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생활을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평양에 있었던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41~47절은 초대교회 탄생의 역사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들이 도리어 교인이 되었고 역사상 최초의 ‘교회(敎會)’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42절을 봅시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특히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늘 기도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기도하기 힘들 때도 기도하느라고 힘을 썼을 것입니다. 또 힘을 써서 기도하다 보니 마음이 간절해지고, 옆에 사람 눈치도 없이 기도 소리가 커지고, 때로는 울부짖으면서 기도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기도하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는 모임을 크게 축복하십니다. 47절에서 그들은 또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성도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습니다. 그들에게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이기심이 없었습니다. ‘내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마음을 같이할 수 있었고 날마다 모일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해도 함께 모여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46). 그것은 세상 가운데 이루어진 작은 천국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이 아름다운 천국의 모습을 보고 칭송했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47). 초대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이처럼 말씀 충만, 사랑 충만, 기도 충만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부어주셨던 은혜를 동일하게 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임에도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 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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