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07 에스더 제2강 (5-10장) 한 여인의 결단이 이룬 민족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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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가을학기 특강 에스더 제2강
말씀 에스더 5장~10장
요절 에스더 7:3
한 여인의 결단이 이룬 민족 구원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지난 말씀에서 ‘한 미모씩’하던 페르시아 미인들 사이에서 약소국의 이름 없는 소녀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을 배웠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의 비밀이 어디 있었습니까? 순종과 희생의 내면성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왕을 움직이고 위기가운데 있던 자기 민족을 구합니다. 오늘 말씀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한 여인의 믿음의 결단이 어떤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내는가를 보여줍니다. 또한 실제적인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게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제1장 신중한 에스더(5장)
4:16에서 에스더는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에게 삼일 금식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금식기도하고 난 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4:17). ‘죽으면…죽으리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녀는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어전에서 왕좌에 앉아 있는데 저 건너편 안 뜰에 에스더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나타났으니 당장에 형벌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눈에 에스더는 어떻게 보였습니까? 2절을 봅시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에스더가 본래 ‘한 미모’하는 여인이지만 그날따라 그녀의 모습이 매우 사랑스러워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래간만에 봐서일까요? 정원을 배경으로 분위기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삼일 동안 금식하여 날씬해졌기 때문입니까? 에스더의 얼굴에는 영적인 스피릿이 충만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적극적이고도 비장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결코 모르드개에게 떠밀려서 왕 앞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전멸 당할지도 모르는 자기 민족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있었습니다. 동족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각오와 자신이 죽더라도 동족은 구해야 하겠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물론 죽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기로 결단하고 민족을 위해 나아간 그것이 위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왕은 묘한 힘에 이끌리듯 자신의 금 규를 그녀에게 내어 밀었습니다. 이것은 형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에스더가 금 규 끝을 만짐으로 목숨을 내건 긴장된 순간이 끝이 났습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물었습니다. 3절을 봅시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그러나 에스더는 나라의 절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의 구원을 서두르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먼저 왕을 잔치에 초청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에 소원을 말하지 않고 가장 좋은 기회가 오도록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하만을 동석시켜 때를 봐서 유다 민족의 참소자로 고발할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4) 이에 왕이 하만을 급히 불러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함께 참석했습니다. 왕은 이번에도 에스더의 소원이 무엇인지 물었지만 에스더는 입을 꼭 다물고 내일 잔치를 기약하며 소원을 감추었습니다. 이틀 동안의 잔치를 통해 왕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전달할 뿐 아니라 왕을 기쁘고 흡족하게 하여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렇듯 에스더는 비장한 믿음의 결단을 했지만, 그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녀는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의 마음을 얻고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한편 하만은 어떠했습니까? 9절을 봅시다. 단독으로 왕과 왕후의 초대를 연이어 받은 하만은 한없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는 높임 받는 것이 즐거웠고 인정받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모르드개 때문에 기분을 잡치고 말았습니다. 9절을 보니 하만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오는데 모르드개는 일어나지도 않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지나가는 하만을 개 무시했습니다. 이에 하만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그러나 꾹 참고 집에 돌아와서 그 친구들과 아내에게 입이 간질거려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다른 경쟁자들보다 높인 것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화자찬했습니다(11,12). 그리고 유다인 모르드개 때문에 기분 잡친 일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어떤 조언을 해주었습니까? 14절을 봅시다.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왕에게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모르드개를 처형시키자는 조언이었습니다. 모르드개를 무려 오십 규빗, 즉 23미터나 되는 높은 나무에 매달아 마음의 복수심과 미움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경각심을 심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하만은 그 말을 좋게 여겨 나무를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본문의 하만은 힘이 세고 거만하며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는 인간 군상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기 홍보(PR)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허탄한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데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은 외모, 능력, 재능, 자신의 배경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부모님들은 자기의 큰 집, 좋은 자동차, 통장에 든 돈, 성공한 자녀들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랑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은 인정받으려는 의도,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그 결과는 좋지 못합니다.
특히 자기 자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릇된 가치를 좇게 합니다. 그런 헛된 가치에 마음을 두게 되면 진정한 자기의 모습도, 진실한 인간관계도 포장하게 됩니다. 또한 자기 자랑은 우리 내면의 거룩한 은혜를 고갈시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랑을 한 후에 마음이 공허해지고 고갈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그 자랑 안에 ‘자기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자랑은 공동체를 오염시킵니다. 자기의 육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이 맞장구를 칠 때 공동체와 사회 안에 이상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안에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줍니다. 그런데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를 무시하고 대적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모양이든 형틀을 만들어 매달아 죽이기를 좋아합니다. 하만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자랑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하만은 바로 내일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려는 그 나무에 자기가 매달려 죽을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잠언 27:1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제2장 왕이 존귀하게 하기 원하는 자는 누구인가(6장)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기를 왕에게 구하려고 오는 동안 왕궁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6:1을 봅시다. 아하수에로 왕은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 역대 일기를 가져 오게 하여 자기 앞에서 읽혔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을 듣던 중에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음모를 밝혀내고 왕을 위기가운데서 구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2:19~23). 왕은 이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6:3절을 봅시다.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모르드개는 그때까지 아무 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마침 하만이 도착하여 왕궁 바깥뜰에 대기 중이었습니다. 하만이 들어오자 왕이 물었습니다. 6:6절을 봅시다.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이때 왕은 분명히 모르드개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만은 행복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그는 애써 미소를 감추며 평소 자신이 원했던 존귀를 구했습니다. 6:8,9절을 봅시다.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의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이에 왕이 하만에게 명했습니다. 6:10절입니다.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 하만은 갑자기 혈압이 올랐습니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들은 이상 어떻게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청했다가는 도리어 하만 자신이 죽게 될 뻔했습니다.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라고 청하는 대신 성주 거리를 다니며 모르드개 앞에서 이렇게 외쳐야 했습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11)
물론 본문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반역을 왕에게 알렸을 때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모르드개는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고자 왕께 구하려 들어간 바로 그 때에 왕은 모르드개에게 상을 내리고자 작정했고 하만에게 지시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치 누군가 각본을 짠 것처럼 정확하게 아귀가 맞추어졌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보이지 않는 손이 여러 일들을 짜 맞추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하만의 도모를 파하시고 모르드개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2절을 봅시다. 하만은 위의 일이 치욕스러워 머리를 쥐어뜯으며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아내와 친구들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말을 합니다. 13절을 봅시다.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사람의 후손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이 말은 바로 다음에 있을 하만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하만이 힘들어하고 있을 때 왕의 내시들이 하만을 에스더의 잔치로 불렀습니다(6:14). 왕은 잔치에서 술을 마시며 왕후의 소원을 세 번째로 물었습니다. 그제야 왕후 에스더가 입을 엽니다. 7:3b을 봅시다.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여기서 ‘주소서’란 말은 ‘살려 달라’는 뜻입니다. 즉 “내 생명을 살려주시고 내 민족을 살려주소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민족 유다백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무엇보다 유다민족의 멸절이 왕에게 큰 손해가 됨을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왕은 에스더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7:5) 에스더는 바로 옆에 있던 하만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7:6) 에스더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만을 고발했습니다. 에스더의 이 말 앞에 하만은 두려워했고 왕은 노하여 그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순간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 왕이 후원으로부터 돌아왔을때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린 것이 보였습니다. 물론 그 자세는 하만이 간청하기 위해서 엎드린 자세였는데, 그것이 왕의 눈에는 악한 자세로 보였습니다. 왕은 소리쳤습니다.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이제 하만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고자 했던 그 나무에 자기가 달리고 말았습니다(7:10).
우리는 여기서 모르드개와 하만의 엇갈린 운명을 보게 됩니다. 본래 하만은 왕이 자기를 존귀케 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존귀하게 되기는커녕 도리어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모르드개는 문지기라는 비천한 신분이었고, 비록 비천했지만 왕에게 충성했습니다. 왕에게 반역하는 자들을 고발했고 이로 인해 왕과 왕궁을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보상이 없었지만, 묵묵히 자기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었고 민족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하만이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그 앞에 비굴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한편 하만은 스스로 존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로 ‘나 외에 누구리요?’라는 생각을 하며 작기 자랑과 영광 속에 살았습니다. 특히 왕의 존귀와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사실 하만은 그런 생각을 할만도 했습니다. 그는 왕의 최측근이요, 왕의 신임을 받았고, 그의 청이라면 왕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르드개가 존귀함을 얻고 하만은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모르드개가 생명의 구원을 얻었고, 하만은 비참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기록이 이스라엘에 귀환해 살거나, 주변 강대국들 틈에서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인간적인 권모술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별로 의지할 것이 없이 사는 우리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스펄젼은 “하나님의 섭리보다 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로가 되는 하나님의 속성도 없다.”고 했습니다. 에스더서의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 같지만 이처럼 살아 역사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을 주장하고, 하나님이 어디 일하느냐고 조롱하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며 끝까지 충성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고 믿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면 왕이신 하나님께서 존귀를 얻게 하시고 그 분의 섭리가운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제3장 대적을 이기고 영광을 얻은 유다인들(8~10장)
8:1,2을 봅시다. 하만을 죽인 그 날에 왕은 하만의 집과 재산 모두를 왕후 에스더에게 주고, 에스더는 그 집을 모르드개에 양도했습니다. 이로써 모든 일이 다 처리된 듯 싶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을 멸하라는 왕의 명령은 아직 유효했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으면 왕의 조서로 인해 제국의 모든 유다인들이 진멸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또 다시 왕에게 울며 간청합니다. 8:5b,6절을 봅시다. “유다인을 진멸하려고 꾀하여 쓴 조서를 철회하소서. 내가 어찌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 그러나 이미 왕의 도장이 찍힌 조서는 변개되거나 취소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로 하여금 적절한 방어 조치를 취할 수 있게끔 다른 조서를 쓸 수 있는 권한을 모르드개에게 준 것입니다. 이에 유다인들에게 어떤 조서가 반포됩니까? 11절을 봅시다. 유다인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도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저희를 치려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일을 유다민족을 멸하려 했던 날, 곧 아달 월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하게 하여 대적에게 원수를 갚게 했습니다.
그 결과 위기에 처했던 유다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르드개는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인에게는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8:16,17절입니다.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9:1~16은 전국의 유다인들이 원수들에게 한 일입니다. 유다인들이 각 도, 각 읍에서 자기를 해하려고 하는 자들을 죽이려 하니 그 때 다른 민족이 저희를 두려워하여 능히 막지 못했습니다. 또한 제국의 관리들도 존귀하고 명성이 높아진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유다인들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아달월 13일에 유다인들은 칼로 공격해오는 대적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그들은 수산성에서 팔백 명을 죽였고, 하만의 열 아들을 죽여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달았으며, 전국적으로 칠만 오천 명을 죽였습니다.
유다인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성경은 그들이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났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대응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2절에서 ‘자기들을 해하려고 하는 자’란 문자적으로 ‘자신들의 멸망을 추구하는 자’란 뜻입니다. 즉, 유다인들을 멸망시키고 죽이려는 원수에 대해 자위권(自衛權) 차원에서 대응한 것으로 성경은 설명합니다. 또한 대적자들은 죽이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은 유다인의 대응이 재산 탈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방어적인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9:10,15,16).
9:17~32은 부림절이 제정된 과정입니다. 대적자들을 파한 후 모르드개는 유다인들이 해마다 아달 월 십사 일과 십오 일을 부림절로 지키도록 했습니다. 부림절의 어원은 하만이 ‘푸르’, 즉 주사위를 던져 유대인을 학살할 날짜를 정한데서 생겨났습니다. 9:22절을 봅시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에게 부림절은 가장 즐거운 축제일입니다. 사람들은 이 날 에스더서를 꼭 읽는데,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 네 곳은 큰 소리로 읽고, 하만의 열 아들의 이름이 나올 때는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기구를 돌려서 그 이름이 들리지 않게 합니다. 이 날에는 최소 두 사람 이상에게 음식을 만들어 보내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기도 합니다. 점심때부터 저녁까지 많은 음식을 먹고, 이때 반드시 삶은 콩과 완두콩을 먹습니다. ‘하만의 주머니’, ‘하만의 귀’라고 부르는 양귀비 씨나 과일을 넣어 만든 삼각형 과자를 후식으로 먹습니다. 부림절 며칠 전부터 에스더, 아하수에로, 모르드개의 얼굴 등을 마스크로 만듭니다. 이 날은 남녀가 옷을 바꿔 입을 수 있는 유일한 날로 각종 마스크와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카니발을 즐기다가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에스더서를 각본으로 연극을 합니다. 물론 부림절 전날에는 에스더의 금식을 기억하여 대대적인 금식을 한다고 합니다.
부림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슬픔을 기쁨으로, 애통을 축제로 바꾸시는 통쾌한 역전드라마의 연출가가 되심을 보여줍니다. 당시 막카비 시대, 유대인들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유대인으로 사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방의 대적들은 유대인이 유대인답게 사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초대 교회 때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 때 원수들이 많았습니다. 근래에 많은 사람들이 아프간 선교 팀을 향해 온갖 험담과 저주스런 말을 해대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납치범보다 오히려 납치당한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조작된 악성루머와 신자들에 대한 세상의 미움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성경대로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할 때 슬픈 일도 있고, 애통한 일도 있고, 모든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결국은 어떠합니까? 결국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축제가 된다는 희망을 봅니다.
성경적으로 이러한 역전드라마의 절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단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인류구원의 대 반전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이 반적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하는 그 때에 대적에게서 벗어나고 평안함을 얻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인생의 반전, 역사의 반전을 이루어주심을 영접하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10장을 봅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모르드개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3절을 봅시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성경은 모르드개를 유다민족 멸절이라는 위험을 초래한 인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했던 그는 결국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존경받고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유다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유다 종족이 안전하게 살도록 애쓴 사람으로 평가하며 끝을 맺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에스더서를 통해 거대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한 국가의 책임있는 시민으로서의 자세입니다. 에스더서는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 간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들에게 이방에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도록 권면했습니다. 붙잡혀 간 나라에서 집을 짓고, 정원과 과수원을 세우고 그 산물을 먹으며, 자녀들을 결혼시켜 번성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줄어들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한 머무는 국가와 도시의 발전에 기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주변에 적대적인 세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책임있는 시민으로 살도록 했습니다. 모르드개는 이러한 책임있는 시민이요, 왕의 충성된 신하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자리에 계신 학생들은 저마다 학교생활,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될수 없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 모르드개와 같이 책임성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적극적인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둘째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으로 살아야 합니다. 좋은 시민, 좋은 학생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더욱 충성해야 합니다.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왕후로서 왕과 국가에만 충성했습니까? 그랬다면 그녀는 유다 멸족을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개인의 유익이나 평안을 구하지 않고, 민족구원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연약한 여인이라도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도전했을 때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에스더의 결단은 어떤 결단입니까? 자기희생의 결단이요 개인의 안위보다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결단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팎에서 이런 결단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고자 결단했습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결단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고난을 결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얼마 전에 배운 예수님의 겟세마네 결단은 가장 위대한 결단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며 십자가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그 결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희망이 우리 각자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 중에는 바쁜 직장 업무 중에도 한 양을 섬기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 상사를 섭섭하게 하면서 센터 모임에 참석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캠퍼스 사명을 위해 홍익대 시험을 준비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한 장막생활을 결단하고 섬기는 종이 되고자 자기를 드린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죄문제를 소감에 들고 나와 투쟁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동역자들을 먹이기 위해 헌신을 다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삶을 결단하고 투쟁하는 당시에는 손해를 많이 보고 때로는 죽을 것 같지만 그 결과가 어떠할까요? 하나님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분들을 결국 축복하셔서 온 민족이 구원얻는 큰 기쁨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가을학기에 우리에게 어떤 결단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내 개인의 편함과 안정보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결단, 이런 분명한 원칙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에스더처럼 나의 아름다움과 영광의 자리를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자 결단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대적이 많은 세상에서 목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죄와 사단에게 굴복하지 않고자 결단할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처럼 나에게 보낸 에스더 한 사람에게 소망을 품고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바쁘고 힘든 대학생활과 직장생활 중에 우리는 깨어지지 않는 자기, 양보하기 싫은 자기로 힘이 듭니다. 또한 자신의 자유 시간을 희생하여 소감투쟁하고 한 생명을 섬긴다는 것은 참으로 자기 부인이 됩니다. 동시에 직장생활, 학업, 가사일, 장막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영혼을 섬기기 위해 기도하다 죽겠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말씀을 준비하다 죽겠다. 미움과 자존심을 부인하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겠다고 결단할 때 과연 우리에게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그러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섭리 가운데 우리 삶을 주관하시어 슬픔을 기쁨으로, 애통을 축제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가을학기 희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에스더 5장~10장
요절 에스더 7:3
한 여인의 결단이 이룬 민족 구원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지난 말씀에서 ‘한 미모씩’하던 페르시아 미인들 사이에서 약소국의 이름 없는 소녀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을 배웠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의 비밀이 어디 있었습니까? 순종과 희생의 내면성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왕을 움직이고 위기가운데 있던 자기 민족을 구합니다. 오늘 말씀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한 여인의 믿음의 결단이 어떤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내는가를 보여줍니다. 또한 실제적인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게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제1장 신중한 에스더(5장)
4:16에서 에스더는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에게 삼일 금식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금식기도하고 난 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 앞으로 나아갔습니다(4:17). ‘죽으면…죽으리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녀는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어전에서 왕좌에 앉아 있는데 저 건너편 안 뜰에 에스더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나타났으니 당장에 형벌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눈에 에스더는 어떻게 보였습니까? 2절을 봅시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에스더가 본래 ‘한 미모’하는 여인이지만 그날따라 그녀의 모습이 매우 사랑스러워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래간만에 봐서일까요? 정원을 배경으로 분위기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삼일 동안 금식하여 날씬해졌기 때문입니까? 에스더의 얼굴에는 영적인 스피릿이 충만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적극적이고도 비장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결코 모르드개에게 떠밀려서 왕 앞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전멸 당할지도 모르는 자기 민족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있었습니다. 동족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각오와 자신이 죽더라도 동족은 구해야 하겠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물론 죽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기로 결단하고 민족을 위해 나아간 그것이 위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왕은 묘한 힘에 이끌리듯 자신의 금 규를 그녀에게 내어 밀었습니다. 이것은 형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에스더가 금 규 끝을 만짐으로 목숨을 내건 긴장된 순간이 끝이 났습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물었습니다. 3절을 봅시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그러나 에스더는 나라의 절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의 구원을 서두르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먼저 왕을 잔치에 초청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에 소원을 말하지 않고 가장 좋은 기회가 오도록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하만을 동석시켜 때를 봐서 유다 민족의 참소자로 고발할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말했습니다.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4) 이에 왕이 하만을 급히 불러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함께 참석했습니다. 왕은 이번에도 에스더의 소원이 무엇인지 물었지만 에스더는 입을 꼭 다물고 내일 잔치를 기약하며 소원을 감추었습니다. 이틀 동안의 잔치를 통해 왕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전달할 뿐 아니라 왕을 기쁘고 흡족하게 하여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렇듯 에스더는 비장한 믿음의 결단을 했지만, 그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녀는 급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의 마음을 얻고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한편 하만은 어떠했습니까? 9절을 봅시다. 단독으로 왕과 왕후의 초대를 연이어 받은 하만은 한없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는 높임 받는 것이 즐거웠고 인정받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모르드개 때문에 기분을 잡치고 말았습니다. 9절을 보니 하만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오는데 모르드개는 일어나지도 않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지나가는 하만을 개 무시했습니다. 이에 하만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그러나 꾹 참고 집에 돌아와서 그 친구들과 아내에게 입이 간질거려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다른 경쟁자들보다 높인 것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화자찬했습니다(11,12). 그리고 유다인 모르드개 때문에 기분 잡친 일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어떤 조언을 해주었습니까? 14절을 봅시다.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왕에게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모르드개를 처형시키자는 조언이었습니다. 모르드개를 무려 오십 규빗, 즉 23미터나 되는 높은 나무에 매달아 마음의 복수심과 미움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경각심을 심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하만은 그 말을 좋게 여겨 나무를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본문의 하만은 힘이 세고 거만하며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는 인간 군상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기 홍보(PR)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허탄한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데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 대학생들은 외모, 능력, 재능, 자신의 배경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부모님들은 자기의 큰 집, 좋은 자동차, 통장에 든 돈, 성공한 자녀들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랑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은 인정받으려는 의도,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그 결과는 좋지 못합니다.
특히 자기 자랑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릇된 가치를 좇게 합니다. 그런 헛된 가치에 마음을 두게 되면 진정한 자기의 모습도, 진실한 인간관계도 포장하게 됩니다. 또한 자기 자랑은 우리 내면의 거룩한 은혜를 고갈시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랑을 한 후에 마음이 공허해지고 고갈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그 자랑 안에 ‘자기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자랑은 공동체를 오염시킵니다. 자기의 육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이 맞장구를 칠 때 공동체와 사회 안에 이상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안에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줍니다. 그런데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를 무시하고 대적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모양이든 형틀을 만들어 매달아 죽이기를 좋아합니다. 하만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 자랑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하만은 바로 내일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려는 그 나무에 자기가 매달려 죽을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잠언 27:1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제2장 왕이 존귀하게 하기 원하는 자는 누구인가(6장)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기를 왕에게 구하려고 오는 동안 왕궁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6:1을 봅시다. 아하수에로 왕은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 역대 일기를 가져 오게 하여 자기 앞에서 읽혔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을 듣던 중에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음모를 밝혀내고 왕을 위기가운데서 구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2:19~23). 왕은 이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6:3절을 봅시다.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모르드개는 그때까지 아무 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마침 하만이 도착하여 왕궁 바깥뜰에 대기 중이었습니다. 하만이 들어오자 왕이 물었습니다. 6:6절을 봅시다.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이때 왕은 분명히 모르드개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만은 행복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 그는 애써 미소를 감추며 평소 자신이 원했던 존귀를 구했습니다. 6:8,9절을 봅시다.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의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이에 왕이 하만에게 명했습니다. 6:10절입니다.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이 하라.” 하만은 갑자기 혈압이 올랐습니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들은 이상 어떻게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청했다가는 도리어 하만 자신이 죽게 될 뻔했습니다.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라고 청하는 대신 성주 거리를 다니며 모르드개 앞에서 이렇게 외쳐야 했습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11)
물론 본문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반역을 왕에게 알렸을 때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모르드개는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고자 왕께 구하려 들어간 바로 그 때에 왕은 모르드개에게 상을 내리고자 작정했고 하만에게 지시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치 누군가 각본을 짠 것처럼 정확하게 아귀가 맞추어졌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보이지 않는 손이 여러 일들을 짜 맞추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하만의 도모를 파하시고 모르드개를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2절을 봅시다. 하만은 위의 일이 치욕스러워 머리를 쥐어뜯으며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아내와 친구들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말을 합니다. 13절을 봅시다.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사람의 후손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이 말은 바로 다음에 있을 하만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하만이 힘들어하고 있을 때 왕의 내시들이 하만을 에스더의 잔치로 불렀습니다(6:14). 왕은 잔치에서 술을 마시며 왕후의 소원을 세 번째로 물었습니다. 그제야 왕후 에스더가 입을 엽니다. 7:3b을 봅시다.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여기서 ‘주소서’란 말은 ‘살려 달라’는 뜻입니다. 즉 “내 생명을 살려주시고 내 민족을 살려주소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민족 유다백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무엇보다 유다민족의 멸절이 왕에게 큰 손해가 됨을 논리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왕은 에스더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7:5) 에스더는 바로 옆에 있던 하만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7:6) 에스더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만을 고발했습니다. 에스더의 이 말 앞에 하만은 두려워했고 왕은 노하여 그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순간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 왕이 후원으로부터 돌아왔을때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린 것이 보였습니다. 물론 그 자세는 하만이 간청하기 위해서 엎드린 자세였는데, 그것이 왕의 눈에는 악한 자세로 보였습니다. 왕은 소리쳤습니다.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이제 하만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고자 했던 그 나무에 자기가 달리고 말았습니다(7:10).
우리는 여기서 모르드개와 하만의 엇갈린 운명을 보게 됩니다. 본래 하만은 왕이 자기를 존귀케 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존귀하게 되기는커녕 도리어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모르드개는 문지기라는 비천한 신분이었고, 비록 비천했지만 왕에게 충성했습니다. 왕에게 반역하는 자들을 고발했고 이로 인해 왕과 왕궁을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보상이 없었지만, 묵묵히 자기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었고 민족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하만이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그 앞에 비굴하게 굴지 않았습니다. 한편 하만은 스스로 존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로 ‘나 외에 누구리요?’라는 생각을 하며 작기 자랑과 영광 속에 살았습니다. 특히 왕의 존귀와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사실 하만은 그런 생각을 할만도 했습니다. 그는 왕의 최측근이요, 왕의 신임을 받았고, 그의 청이라면 왕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르드개가 존귀함을 얻고 하만은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모르드개가 생명의 구원을 얻었고, 하만은 비참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기록이 이스라엘에 귀환해 살거나, 주변 강대국들 틈에서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인간적인 권모술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별로 의지할 것이 없이 사는 우리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스펄젼은 “하나님의 섭리보다 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로가 되는 하나님의 속성도 없다.”고 했습니다. 에스더서의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 같지만 이처럼 살아 역사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을 주장하고, 하나님이 어디 일하느냐고 조롱하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며 끝까지 충성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고 믿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면 왕이신 하나님께서 존귀를 얻게 하시고 그 분의 섭리가운데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제3장 대적을 이기고 영광을 얻은 유다인들(8~10장)
8:1,2을 봅시다. 하만을 죽인 그 날에 왕은 하만의 집과 재산 모두를 왕후 에스더에게 주고, 에스더는 그 집을 모르드개에 양도했습니다. 이로써 모든 일이 다 처리된 듯 싶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인을 멸하라는 왕의 명령은 아직 유효했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으면 왕의 조서로 인해 제국의 모든 유다인들이 진멸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또 다시 왕에게 울며 간청합니다. 8:5b,6절을 봅시다. “유다인을 진멸하려고 꾀하여 쓴 조서를 철회하소서. 내가 어찌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 그러나 이미 왕의 도장이 찍힌 조서는 변개되거나 취소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로 하여금 적절한 방어 조치를 취할 수 있게끔 다른 조서를 쓸 수 있는 권한을 모르드개에게 준 것입니다. 이에 유다인들에게 어떤 조서가 반포됩니까? 11절을 봅시다. 유다인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도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저희를 치려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일을 유다민족을 멸하려 했던 날, 곧 아달 월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하게 하여 대적에게 원수를 갚게 했습니다.
그 결과 위기에 처했던 유다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르드개는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인에게는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8:16,17절입니다.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9:1~16은 전국의 유다인들이 원수들에게 한 일입니다. 유다인들이 각 도, 각 읍에서 자기를 해하려고 하는 자들을 죽이려 하니 그 때 다른 민족이 저희를 두려워하여 능히 막지 못했습니다. 또한 제국의 관리들도 존귀하고 명성이 높아진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유다인들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아달월 13일에 유다인들은 칼로 공격해오는 대적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그들은 수산성에서 팔백 명을 죽였고, 하만의 열 아들을 죽여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달았으며, 전국적으로 칠만 오천 명을 죽였습니다.
유다인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성경은 그들이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났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대응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2절에서 ‘자기들을 해하려고 하는 자’란 문자적으로 ‘자신들의 멸망을 추구하는 자’란 뜻입니다. 즉, 유다인들을 멸망시키고 죽이려는 원수에 대해 자위권(自衛權) 차원에서 대응한 것으로 성경은 설명합니다. 또한 대적자들은 죽이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은 유다인의 대응이 재산 탈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방어적인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9:10,15,16).
9:17~32은 부림절이 제정된 과정입니다. 대적자들을 파한 후 모르드개는 유다인들이 해마다 아달 월 십사 일과 십오 일을 부림절로 지키도록 했습니다. 부림절의 어원은 하만이 ‘푸르’, 즉 주사위를 던져 유대인을 학살할 날짜를 정한데서 생겨났습니다. 9:22절을 봅시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에게 부림절은 가장 즐거운 축제일입니다. 사람들은 이 날 에스더서를 꼭 읽는데,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 네 곳은 큰 소리로 읽고, 하만의 열 아들의 이름이 나올 때는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기구를 돌려서 그 이름이 들리지 않게 합니다. 이 날에는 최소 두 사람 이상에게 음식을 만들어 보내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기도 합니다. 점심때부터 저녁까지 많은 음식을 먹고, 이때 반드시 삶은 콩과 완두콩을 먹습니다. ‘하만의 주머니’, ‘하만의 귀’라고 부르는 양귀비 씨나 과일을 넣어 만든 삼각형 과자를 후식으로 먹습니다. 부림절 며칠 전부터 에스더, 아하수에로, 모르드개의 얼굴 등을 마스크로 만듭니다. 이 날은 남녀가 옷을 바꿔 입을 수 있는 유일한 날로 각종 마스크와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카니발을 즐기다가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에스더서를 각본으로 연극을 합니다. 물론 부림절 전날에는 에스더의 금식을 기억하여 대대적인 금식을 한다고 합니다.
부림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슬픔을 기쁨으로, 애통을 축제로 바꾸시는 통쾌한 역전드라마의 연출가가 되심을 보여줍니다. 당시 막카비 시대, 유대인들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유대인으로 사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방의 대적들은 유대인이 유대인답게 사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초대 교회 때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 때 원수들이 많았습니다. 근래에 많은 사람들이 아프간 선교 팀을 향해 온갖 험담과 저주스런 말을 해대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납치범보다 오히려 납치당한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조작된 악성루머와 신자들에 대한 세상의 미움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성경대로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할 때 슬픈 일도 있고, 애통한 일도 있고, 모든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결국은 어떠합니까? 결국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축제가 된다는 희망을 봅니다.
성경적으로 이러한 역전드라마의 절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단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인류구원의 대 반전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이 반적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하는 그 때에 대적에게서 벗어나고 평안함을 얻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믿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인생의 반전, 역사의 반전을 이루어주심을 영접하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10장을 봅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모르드개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3절을 봅시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성경은 모르드개를 유다민족 멸절이라는 위험을 초래한 인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했던 그는 결국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존경받고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유다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유다 종족이 안전하게 살도록 애쓴 사람으로 평가하며 끝을 맺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에스더서를 통해 거대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한 국가의 책임있는 시민으로서의 자세입니다. 에스더서는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 간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들에게 이방에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도록 권면했습니다. 붙잡혀 간 나라에서 집을 짓고, 정원과 과수원을 세우고 그 산물을 먹으며, 자녀들을 결혼시켜 번성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줄어들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한 머무는 국가와 도시의 발전에 기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주변에 적대적인 세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책임있는 시민으로 살도록 했습니다. 모르드개는 이러한 책임있는 시민이요, 왕의 충성된 신하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자리에 계신 학생들은 저마다 학교생활,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될수 없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 모르드개와 같이 책임성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적극적인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둘째로,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으로 살아야 합니다. 좋은 시민, 좋은 학생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더욱 충성해야 합니다.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왕후로서 왕과 국가에만 충성했습니까? 그랬다면 그녀는 유다 멸족을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개인의 유익이나 평안을 구하지 않고, 민족구원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연약한 여인이라도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도전했을 때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에스더의 결단은 어떤 결단입니까? 자기희생의 결단이요 개인의 안위보다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결단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팎에서 이런 결단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고자 결단했습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결단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고난을 결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얼마 전에 배운 예수님의 겟세마네 결단은 가장 위대한 결단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며 십자가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그 결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희망이 우리 각자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 중에는 바쁜 직장 업무 중에도 한 양을 섬기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 상사를 섭섭하게 하면서 센터 모임에 참석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캠퍼스 사명을 위해 홍익대 시험을 준비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한 장막생활을 결단하고 섬기는 종이 되고자 자기를 드린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죄문제를 소감에 들고 나와 투쟁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동역자들을 먹이기 위해 헌신을 다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삶을 결단하고 투쟁하는 당시에는 손해를 많이 보고 때로는 죽을 것 같지만 그 결과가 어떠할까요? 하나님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분들을 결국 축복하셔서 온 민족이 구원얻는 큰 기쁨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가을학기에 우리에게 어떤 결단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내 개인의 편함과 안정보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결단, 이런 분명한 원칙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에스더처럼 나의 아름다움과 영광의 자리를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자 결단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대적이 많은 세상에서 목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죄와 사단에게 굴복하지 않고자 결단할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처럼 나에게 보낸 에스더 한 사람에게 소망을 품고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바쁘고 힘든 대학생활과 직장생활 중에 우리는 깨어지지 않는 자기, 양보하기 싫은 자기로 힘이 듭니다. 또한 자신의 자유 시간을 희생하여 소감투쟁하고 한 생명을 섬긴다는 것은 참으로 자기 부인이 됩니다. 동시에 직장생활, 학업, 가사일, 장막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 영혼을 섬기기 위해 기도하다 죽겠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말씀을 준비하다 죽겠다. 미움과 자존심을 부인하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겠다고 결단할 때 과연 우리에게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그러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섭리 가운데 우리 삶을 주관하시어 슬픔을 기쁨으로, 애통을 축제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가을학기 희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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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회 다운로드 | DATE : 2007-10-07 1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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