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07년 마가복음 제27강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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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마가복음 제27강
말씀 마가복음 14:26-72
요절 마가복음 14:36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충돌을 경험합니다. 대학 오기 전 전공과 학교를 결정할 때 부모님과 마찰을 경험하는 분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할 때도 우리는 여러 충돌을 경험합니다. 목자님과의 충돌, 불신세상과의 충돌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과의 충돌, 전통과의 충돌, 율법과의 충돌, 제자들과의 충돌, 하나님 아버지와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극심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과 그 아들 예수님의 소원이 맞부딪혔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배우며 ‘하나님의 원(願)’을 받아들이고 내면의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7-42)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제자들은 이제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예수님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과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27,28을 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베드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29) 그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앞으로의 모습을 더 자세히 말씀해주셨습니다. 30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나 베드로는 더욱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1) 옆에 있던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너무나 잘 아셨고 제자들은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 입에 거품을 물고 맹세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럽고 부패합니까? 실제로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했고, 또 떠나갔습니다. 그러면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제자들을 붙들고 서운한 소리를 하셨습니까? “너희들이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아니면 제자들과 함께 닥쳐올 위험에 대비해서 작전을 짜셨습니까? “베드로! 너는 우측 통로를 막고, 야고보! 너는 옥상을 책임져라.” 아니었습니다.
3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기도하도록 하신 권면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니,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더욱 깊은 기도의 장소로 나아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며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셨습니다. 34절을 봅시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여기사 ‘고민’이란 말은 "sorrow"라는 뜻으로 슬픔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슬픔이 지나쳐 죽을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힘들어질까봐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애써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연약한 모습을 나타낸 적도 없으셨습니다. 광풍이 휘몰아치는 위기의 때에나, 예수님을 잡으려고 오는 원수들 앞에서도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영적 위엄이 충만하셨습니다. 게다가 기회만 있으면 인자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의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심히 놀라고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슬픔은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생각하실 때 예수님은 죽게 될 정도로 슬프셨습니다. 슬픔의 감정이 예수님의 이성을 압도했습니다. 그러면 이때 감정적이 되어 히스테리를 부리셨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정말 마음이 슬프고 아프고 괴로울 때, 죽을 정도로 슬펐을 때 예수님은 그저 울고만 계시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슬픔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상처를 받거나 거절을 당하거나 헤어지는 일이 생기면 너무나 슬픕니다. 양들이 떠나거나 부모님을 떠나보내게 되면 너무나 슬픕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에게 심한 거절을 당하거나 가까운 사람에게 인신공격을 당할 때도 참을 수 없이 슬픕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지면 슬픈 감정이 올라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생각이 되면 자신의 처지에 슬픈 마음이 듭니다. 이 슬픔이 지나치면 슬픔에 눌려버립니다. 슬픔에 한 번 눌려버리면 아무 일도 못하고 그냥 울기만 합니다. 어떤 분은 이 마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아 도피해버립니다. 의미 없는 술문화와 대화문화에 자신을 내던집니다. 그 누군가에게 관심을 끌려고 마음에도 없는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밤새도록 게임방이나 찜질방으로 잠수해버립니다. 슬픈 노래를 부르며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돈이 조금 있으면 고급음식점을 찾아 실컷 먹는 즐거움으로 슬픔을 달랩니다. 비를 맞으며 홍대 앞 번화한 거리를 홀로 걸어보기도 합니다. 이도저도 안되면 흐르는 한강물이나 높은 고층건물에서 한번 뛰어 내려 볼까하는 충동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에게도 심히 슬퍼 죽게 되었을 때가 있었고 이때 무엇을 하셨습니까? 자신의 일생 중 가장 큰 슬픔의 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셨습니다(35). 보통 유대인들은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땅에 엎드리셨습니다. 너무나 절박하고 슬프셨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지나가기를 바라셨는데,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에 죽는 것은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런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36a절을 봅시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여’라고 외치셨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고민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다 털어 놓으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잔’은 무엇일까요? 십자가 죽음의 잔입니다. 온갖 저주가 담긴 쓰디쓴 고난의 잔입니다. 아버지의 진노가 담긴 그야 말로 독배(毒杯)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잔이 그리스도로서 마땅히 마셔야 할 잔임을 아셨습니다. 저번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감사기도하시고 잔을 제자들에게 마시게 하신 후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시며 자신의 희생을 예언하셨습니다(23,24). 그러나 막상 그 잔을 마시고자 할 때 심히 고민이 되고 슬프셨습니다. 독배를 마신다는 것이 너무나 힘드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버림받아 죽으신다는 것이 슬프고 아픈 일이었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기도는 독배를 마시지 않고도 가능한, 다른 방법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저주를 받으시고 버림받지 않고서도 인간 세상에 저주를 없애시고 축복하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십사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니 죽는 길이 아니 고서라도 얼마든지 방법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민과 슬픔이 있습니까? 구태여 내가 죽지 않고서도, 내가 버림받거나 욕을 당하지 않고서도, 자아를 부인하지 않고도, 십자기를 지지 않고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세워서라도 하실 수 있지 않은가? “왜 하필 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간적인 소원이요 우리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막연하게 생각할 때는 용감하게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든지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만 있으면 선교사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믿음으로 어떤 사람이든 감사하고 믿음의 결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전공과 사명을 능히 감당하며 제자양성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쩔쩔 매는 선배들을 보면 속으로 무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십자가가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오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전혀 새로운 고민과 슬픔에 사로잡힙니다. 며칠 밤을 눈물로 투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의 소원을 진실하게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신의 소원을 말한 후 어떻게 방향을 바꾸셨습니까? 36b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러나’는 위대한 전환입니다. 자기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의 전환입니다. 자기 원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원을 따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원(願)’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했지만, 오직 예수님이 죽으시는 그 일을 통해서 구속역사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 일을 위해 유일한 분으로 선택하셨고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뜻을 깊이 영접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바람과 바다야 잔잔하라.” “나사로야 나오라.” 이러한 예수님의 음성도 위대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위대하고도 영광스런 승리의 음성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난 후에 남긴 결단에서 나타났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가 기꺼이 이 독배를 마시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생각과 뜻을 더 앞세웁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처럼 기도했다가는 하나님만 좋고, 복음역사에는 유익이 되지만, 내 인생은 아무렇게나 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하나님의 소원보다 자기 소원에 더 집착합니다. 특히 장래 방향을 정하는 문제나 결혼 문제에 부딪히면 결국 자기 원대로 합니다.
밥 쇼그렌(Bob Sjogren) 목자가 ‘개와 고양이의 신학’을 말했습니다. “개는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예뻐하고 먹여 주며 보금자리를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니, 당신은 신이시군요.’ 반면 고양이는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예뻐하고 먹여주며 보금자리를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니, 내가 신인 게 분명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개는 ‘당신이 나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니 당신은 신이 분명해요’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고양이는 ‘나는 신인 게 분명해.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하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개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요.’ 그러나 고양이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신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사셔,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길 원하셔.’ 그런데 세상을 보면 이런 ‘고양이과’ 신자가 더 많습니다. ‘고양이과’ 신자는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대신 “하나님이 저의 원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사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모든 것의 중심은 우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말씀과 매우 상반된 가치관입니다. 이런 신앙은 결코 사람을 복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원대로 하고자 하는 것은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위대한 소망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멋으로 아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 삶이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충돌할 때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고집을 피웁니다. 그러나 나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크고 높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8,9은 말씀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 생각에는 내 생각이 가장 좋은 것 같지만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습니다. 자기 길이 최고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길은 내 길보다 높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뜻은 분명하게 알겠는데 아버지의 뜻은 잘 모르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해야 될 것 같은데 하기 싫은 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면에 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자기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면서, 혹은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듣고자 하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뜻을 부인하려는 자세만 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의 결론이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바라고 그것이 선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선한 역사를 위해 나를 그 자리에 두셨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면 아버지의 원대로 갈 수 있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37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37,38절을 봅시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제자들은 육신이 약했습니다. 특별히 눈이 피곤했습니다. 쏟아지는 잠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압니다. 그러나 잘 알지만 실제 생활에서 하기 힘든 것이 또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투쟁 없이 영적 승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우리 죄악된 본성이 어찌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깨어 기도할 때 우리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간적인 생각과 불신과 슬픔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39절과 41절을 볼 때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독배를 마실 힘이 생길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 기도하신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41,42절을 봅시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 독배를 마심으로서 생명 구속 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일어나셨습니다. 내적 싸움에서 승리하셨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으셨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원수를 맞이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확신과 각오가 설 때 이미 그 싸움은 승리한 것입니다. 저희가 독배를 마실 힘을 얻고자 기도에 힘쓰신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내가 그니라(43~72)
독배를 마시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곧 열 둘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공회에서 파송된 무장한 군인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했습니다. 유다는 이미 약속한 신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 “랍비여!”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을 맞추는 것은 사랑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경우는 배반의 키스였습니다. 이때 곁에 섰던 자 중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요18:10).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충성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충성은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베드로는 감정과 혈기로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강도와 같이 잡히시고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51,52절에 나오는 한 청년은 저자 마가입니다. 그는 자고 있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신 것을 본 목격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 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일어나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때 베드로도 도망가다가 자신이 큰 소리 친 것이 생각나서 되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멀찍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54).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멀찍이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께 헌신하면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따르는 것도 아니고 안 따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따라 갑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체면치레하는 정도로 신앙 생활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되고 자신에게 손해가 생기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게 됩니다.
53절을 봅시다. 군대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해 놓고서 예수님을 잡아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죽일 증거를 찾았습니다(56). 그러나 증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거짓 증언을 했으나 그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님을 쳐서 거짓 증언하여 말했습니다. 58절을 봅시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죽일 증거, 아주 구체적인 죄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순간 심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기로 미리 다 정해 놓았을까요? 마가14:1에 보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였다고 했습니다. 12:12에 보면, 예수님이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사장 그룹에 속한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득권자들을 향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이 싫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상황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60)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사53:7). 주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변호하여 죽음을 피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로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답답해진 대제사장이 결정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던졌습니다. 61절을 봅시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찬송 받을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2)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63,64절을 봅시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의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들이 다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으며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하라.”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 현장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인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에 맞추어 자신을 깎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니라.”고 하신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도전이요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쳤으며, 그의 능력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비천해지셨습니다. 피조물들에게 매질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인정할 수 없었고 예수님을 아예 세상에서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장차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분으로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현재는 비천하지만 장차 영광스런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66절을 봅시다. 한편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온갖 참소를 당하고 사형이 확정되는 것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쳐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베드로에게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한 계집종이 떨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말했습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7) 베드로는 군병들과 칼싸움은 잘했습니다. 하지만 비천한 하녀의 고소에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68절을 봅시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그리고는 슬그머니 일어나 앞문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69) 그러자 베드로가 또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그의 억센 갈릴리 사투리를 듣고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눈을 치켜뜨고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니까.”(71) 베드로는 자기도 예수님처럼 붙잡혀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를 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에게 철저히 버림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살아야 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예수님의 주되심과 그의 제자 됨을 부인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닭이 기가 막혀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꼬꼬댁, 꼬꼬. 모르긴 뭘 몰라. 내가 다 봤네.”(72)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인간 베드로를 생각하며 비참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자기 죄를 참회하며 울었습니다. 자기의 인간성과 자기 성실을 믿고 기도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했습니다. 자기가 한 말도 책임질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아시고도 자신의 살과 피를 먹여 주셨던 예수님의 사랑에 목이 매여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반드시 겪어야 할 신앙성장의 과정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실패를 통해서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이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나의 원과 하나님의 원이 충돌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 모든 갈등상황들은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이 베스트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을 이루기 위해 택함 받은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앞에 어떤 잔이 있습니까? 자비량의 잔, 학업의 잔, 자기 부인의 잔, 제자양성의 잔, 그보다 더 독한 여러 잔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을 따라 주님 주신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말씀 마가복음 14:26-72
요절 마가복음 14:36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충돌을 경험합니다. 대학 오기 전 전공과 학교를 결정할 때 부모님과 마찰을 경험하는 분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할 때도 우리는 여러 충돌을 경험합니다. 목자님과의 충돌, 불신세상과의 충돌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과의 충돌, 전통과의 충돌, 율법과의 충돌, 제자들과의 충돌, 하나님 아버지와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극심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과 그 아들 예수님의 소원이 맞부딪혔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배우며 ‘하나님의 원(願)’을 받아들이고 내면의 평화와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7-42)
유월절 만찬을 마친 후 제자들은 이제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예수님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과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27,28을 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베드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29) 그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앞으로의 모습을 더 자세히 말씀해주셨습니다. 30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나 베드로는 더욱 힘을 주어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1) 옆에 있던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너무나 잘 아셨고 제자들은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 입에 거품을 물고 맹세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럽고 부패합니까? 실제로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했고, 또 떠나갔습니다. 그러면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제자들을 붙들고 서운한 소리를 하셨습니까? “너희들이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아니면 제자들과 함께 닥쳐올 위험에 대비해서 작전을 짜셨습니까? “베드로! 너는 우측 통로를 막고, 야고보! 너는 옥상을 책임져라.” 아니었습니다.
3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기도하도록 하신 권면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33절을 보니,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더욱 깊은 기도의 장소로 나아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며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셨습니다. 34절을 봅시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여기사 ‘고민’이란 말은 "sorrow"라는 뜻으로 슬픔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슬픔이 지나쳐 죽을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힘들어질까봐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애써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연약한 모습을 나타낸 적도 없으셨습니다. 광풍이 휘몰아치는 위기의 때에나, 예수님을 잡으려고 오는 원수들 앞에서도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영적 위엄이 충만하셨습니다. 게다가 기회만 있으면 인자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의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심히 놀라고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슬픔은 하나님께 버림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생각하실 때 예수님은 죽게 될 정도로 슬프셨습니다. 슬픔의 감정이 예수님의 이성을 압도했습니다. 그러면 이때 감정적이 되어 히스테리를 부리셨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정말 마음이 슬프고 아프고 괴로울 때, 죽을 정도로 슬펐을 때 예수님은 그저 울고만 계시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슬픔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상처를 받거나 거절을 당하거나 헤어지는 일이 생기면 너무나 슬픕니다. 양들이 떠나거나 부모님을 떠나보내게 되면 너무나 슬픕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에게 심한 거절을 당하거나 가까운 사람에게 인신공격을 당할 때도 참을 수 없이 슬픕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지면 슬픈 감정이 올라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생각이 되면 자신의 처지에 슬픈 마음이 듭니다. 이 슬픔이 지나치면 슬픔에 눌려버립니다. 슬픔에 한 번 눌려버리면 아무 일도 못하고 그냥 울기만 합니다. 어떤 분은 이 마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즐거움을 찾아 도피해버립니다. 의미 없는 술문화와 대화문화에 자신을 내던집니다. 그 누군가에게 관심을 끌려고 마음에도 없는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밤새도록 게임방이나 찜질방으로 잠수해버립니다. 슬픈 노래를 부르며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돈이 조금 있으면 고급음식점을 찾아 실컷 먹는 즐거움으로 슬픔을 달랩니다. 비를 맞으며 홍대 앞 번화한 거리를 홀로 걸어보기도 합니다. 이도저도 안되면 흐르는 한강물이나 높은 고층건물에서 한번 뛰어 내려 볼까하는 충동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에게도 심히 슬퍼 죽게 되었을 때가 있었고 이때 무엇을 하셨습니까? 자신의 일생 중 가장 큰 슬픔의 순간에 예수님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셨습니다(35). 보통 유대인들은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땅에 엎드리셨습니다. 너무나 절박하고 슬프셨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지나가기를 바라셨는데,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에 죽는 것은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런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36a절을 봅시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여’라고 외치셨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고민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다 털어 놓으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잔’은 무엇일까요? 십자가 죽음의 잔입니다. 온갖 저주가 담긴 쓰디쓴 고난의 잔입니다. 아버지의 진노가 담긴 그야 말로 독배(毒杯)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잔이 그리스도로서 마땅히 마셔야 할 잔임을 아셨습니다. 저번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감사기도하시고 잔을 제자들에게 마시게 하신 후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시며 자신의 희생을 예언하셨습니다(23,24). 그러나 막상 그 잔을 마시고자 할 때 심히 고민이 되고 슬프셨습니다. 독배를 마신다는 것이 너무나 힘드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버림받아 죽으신다는 것이 슬프고 아픈 일이었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기도는 독배를 마시지 않고도 가능한, 다른 방법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저주를 받으시고 버림받지 않고서도 인간 세상에 저주를 없애시고 축복하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십사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니 죽는 길이 아니 고서라도 얼마든지 방법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민과 슬픔이 있습니까? 구태여 내가 죽지 않고서도, 내가 버림받거나 욕을 당하지 않고서도, 자아를 부인하지 않고도, 십자기를 지지 않고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세워서라도 하실 수 있지 않은가? “왜 하필 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간적인 소원이요 우리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막연하게 생각할 때는 용감하게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든지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만 있으면 선교사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믿음으로 어떤 사람이든 감사하고 믿음의 결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전공과 사명을 능히 감당하며 제자양성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쩔쩔 매는 선배들을 보면 속으로 무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십자가가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오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전혀 새로운 고민과 슬픔에 사로잡힙니다. 며칠 밤을 눈물로 투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의 소원을 진실하게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신의 소원을 말한 후 어떻게 방향을 바꾸셨습니까? 36b절을 봅시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러나’는 위대한 전환입니다. 자기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의 전환입니다. 자기 원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원을 따르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원(願)’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했지만, 오직 예수님이 죽으시는 그 일을 통해서 구속역사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 일을 위해 유일한 분으로 선택하셨고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뜻을 깊이 영접하시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바람과 바다야 잔잔하라.” “나사로야 나오라.” 이러한 예수님의 음성도 위대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위대하고도 영광스런 승리의 음성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난 후에 남긴 결단에서 나타났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가 기꺼이 이 독배를 마시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생각과 뜻을 더 앞세웁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처럼 기도했다가는 하나님만 좋고, 복음역사에는 유익이 되지만, 내 인생은 아무렇게나 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하나님의 소원보다 자기 소원에 더 집착합니다. 특히 장래 방향을 정하는 문제나 결혼 문제에 부딪히면 결국 자기 원대로 합니다.
밥 쇼그렌(Bob Sjogren) 목자가 ‘개와 고양이의 신학’을 말했습니다. “개는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예뻐하고 먹여 주며 보금자리를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니, 당신은 신이시군요.’ 반면 고양이는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예뻐하고 먹여주며 보금자리를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니, 내가 신인 게 분명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개는 ‘당신이 나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니 당신은 신이 분명해요’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고양이는 ‘나는 신인 게 분명해.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하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개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요.’ 그러나 고양이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신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사셔,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길 원하셔.’ 그런데 세상을 보면 이런 ‘고양이과’ 신자가 더 많습니다. ‘고양이과’ 신자는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대신 “하나님이 저의 원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시고, 우리를 위해 사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모든 것의 중심은 우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말씀과 매우 상반된 가치관입니다. 이런 신앙은 결코 사람을 복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원대로 하고자 하는 것은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위대한 소망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을 멋으로 아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 삶이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충돌할 때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고집을 피웁니다. 그러나 나의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크고 높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8,9은 말씀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 생각에는 내 생각이 가장 좋은 것 같지만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습니다. 자기 길이 최고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길은 내 길보다 높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뜻은 분명하게 알겠는데 아버지의 뜻은 잘 모르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해야 될 것 같은데 하기 싫은 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면에 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자기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면서, 혹은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듣고자 하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뜻을 부인하려는 자세만 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의 결론이 아버지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바라고 그것이 선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선한 역사를 위해 나를 그 자리에 두셨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면 아버지의 원대로 갈 수 있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37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37,38절을 봅시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제자들은 육신이 약했습니다. 특별히 눈이 피곤했습니다. 쏟아지는 잠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압니다. 그러나 잘 알지만 실제 생활에서 하기 힘든 것이 또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투쟁 없이 영적 승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우리 죄악된 본성이 어찌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깨어 기도할 때 우리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간적인 생각과 불신과 슬픔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39절과 41절을 볼 때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독배를 마실 힘이 생길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 기도하신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41,42절을 봅시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 독배를 마심으로서 생명 구속 역사를 이루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일어나셨습니다. 내적 싸움에서 승리하셨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으셨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원수를 맞이할 준비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확신과 각오가 설 때 이미 그 싸움은 승리한 것입니다. 저희가 독배를 마실 힘을 얻고자 기도에 힘쓰신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내가 그니라(43~72)
독배를 마시기로 작정하신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곧 열 둘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공회에서 파송된 무장한 군인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했습니다. 유다는 이미 약속한 신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 “랍비여!”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을 맞추는 것은 사랑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경우는 배반의 키스였습니다. 이때 곁에 섰던 자 중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요18:10).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충성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충성은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베드로는 감정과 혈기로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강도와 같이 잡히시고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51,52절에 나오는 한 청년은 저자 마가입니다. 그는 자고 있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신 것을 본 목격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 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일어나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때 베드로도 도망가다가 자신이 큰 소리 친 것이 생각나서 되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멀찍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54).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멀찍이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께 헌신하면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따르는 것도 아니고 안 따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따라 갑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체면치레하는 정도로 신앙 생활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되고 자신에게 손해가 생기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게 됩니다.
53절을 봅시다. 군대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해 놓고서 예수님을 잡아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죽일 증거를 찾았습니다(56). 그러나 증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거짓 증언을 했으나 그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님을 쳐서 거짓 증언하여 말했습니다. 58절을 봅시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죽일 증거, 아주 구체적인 죄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순간 심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기로 미리 다 정해 놓았을까요? 마가14:1에 보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였다고 했습니다. 12:12에 보면, 예수님이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사장 그룹에 속한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득권자들을 향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이 싫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상황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60)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시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사53:7). 주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변호하여 죽음을 피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로 이미 작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답답해진 대제사장이 결정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던졌습니다. 61절을 봅시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찬송 받을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2)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63,64절을 봅시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의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들이 다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으며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하라.”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 현장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인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에 맞추어 자신을 깎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니라.”고 하신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도전이요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쳤으며, 그의 능력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비천해지셨습니다. 피조물들에게 매질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인정할 수 없었고 예수님을 아예 세상에서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장차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분으로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현재는 비천하지만 장차 영광스런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66절을 봅시다. 한편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온갖 참소를 당하고 사형이 확정되는 것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쳐 생각지도 않은 사이에 베드로에게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한 계집종이 떨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말했습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7) 베드로는 군병들과 칼싸움은 잘했습니다. 하지만 비천한 하녀의 고소에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68절을 봅시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그리고는 슬그머니 일어나 앞문으로 빠져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69) 그러자 베드로가 또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그의 억센 갈릴리 사투리를 듣고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눈을 치켜뜨고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니까.”(71) 베드로는 자기도 예수님처럼 붙잡혀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를 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에게 철저히 버림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살아야 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예수님의 주되심과 그의 제자 됨을 부인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닭이 기가 막혀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꼬꼬댁, 꼬꼬. 모르긴 뭘 몰라. 내가 다 봤네.”(72)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인간 베드로를 생각하며 비참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자기 죄를 참회하며 울었습니다. 자기의 인간성과 자기 성실을 믿고 기도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했습니다. 자기가 한 말도 책임질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아시고도 자신의 살과 피를 먹여 주셨던 예수님의 사랑에 목이 매여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반드시 겪어야 할 신앙성장의 과정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실패를 통해서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이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나의 원과 하나님의 원이 충돌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 모든 갈등상황들은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이 베스트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을 이루기 위해 택함 받은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앞에 어떤 잔이 있습니까? 자비량의 잔, 학업의 잔, 자기 부인의 잔, 제자양성의 잔, 그보다 더 독한 여러 잔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을 따라 주님 주신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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