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마가복음 2007년 마가복음 제26강(14:1-25) "언약의 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301회 작성일 07-09-16 12:59

본문

2007년 마가복음 제26강
말씀 마가복음 14:1-26
요절 마가복음 14:24
언약의 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우리는 이때까지 선생이요, 선지자요, 주로서의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14장부터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까지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간절히 기도하신 후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세 가지 사건이 나오고 있는데, 먼저 한 여인이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합니다. 그리고 한 제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계획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여인과 예수님의 헌신의 의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11)
  때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력으로 1월 14일, 무교절은 1월 15~21일까지 일주일간 지켰습니다. 두 절기를 합하여 8일간의 기간을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출애굽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로마 식민통치에 억눌려 지내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로마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제2의 유월절을 갈망했을 것입니다. 이때 종교지도자들은 마땅히 이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심어줄 유월절 메시지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도리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1b절을 봅시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사랑 대신 시기심과 미움과 살의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기 때문에 자칫 민요(民擾)가 날까 두려워 명절에는 피하고자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음흉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가운데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는 한 가지 신기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예수님이 식사를 하고 계시는 도중에 갑자기 한 여인이 들이닥치더니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통째로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중동지방에서는 날씨가 덥고 땀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에 향유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식사 후 손바닥에 향유 한 두 방울을 떨어뜨려 줍니다.  향유를 손과 얼굴에 찍어 바르면 음식냄새가 가시고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향유를 한두 방울도 아니고 아예 옥합을 가지고 와사 깨뜨리고 예수님의 손바닥도 아니고 아예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숟가락을 들고 계신 채로 온 몸이 향유기름으로 범벅이 되셨습니다. 향유는 어느덧 바닥으로 흘러 온 방안에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여인이 부은 이 향유를 돈으로 환산하면 300데나리온 곧 당시 노동자 1년 연봉에 해당되었습니다. 향유는 당시 여인들의 결혼 지참금이기도 했습니다. 이 향유에는 여인의 진심과 애정과 꿈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도 아낌없이 예수님께 온통 쏟아드렸습니다. 이 향유를 드리고 나면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으로 결혼 지참금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돌아오는 추석에는 예쁜 원피스라도 하나 사 입어야 할텐데… 이런 것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자의식도 없이 주님께 열정적으로 옥합을 깨뜨려 부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4,5절을 봅시다. “이 여자가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그러면서 여자를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여자가 향유를 예수님께 다 부은 것을 허비(waste)로 보았습니다. 쓸데없는 낭비로 보았습니다. 너무 생각 없이 감정적으로 행동했다고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특별히 돈궤를 맡은 유다는 땅을 치며 아쉬워했습니다. “저런 저런 저런,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저렇게 무모한 짓을…쯔쯧!”
  이들의 표현대로 실용적인 면에서 여인은 향유를 완전히 허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깨 위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주일날 예배드리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면 낭비라고 말합니다. 아무 소득도 없이 전도하는 것이나 훌타임으로 역사에 헌신하는 것은 낭비의 극치라고 봅니다. 더 나아가 그런 헌신을 보고 화를 냅니다. 반면에 세상일을 추구하는데 모든 것을 투자하면 결코 비난하지 않습니다. 구제 사업에 투자하면 선한 일을 했다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리스도를 위해 시간과 물질과 애정과 정열과 모든 진심을 드리면 제 정신이 아니다, 광신자다, 헛짓한다, 쓸 만한 젊은이 하나 버렸다, 세상 물정 모르는 놈들 등 여러 가지로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섬기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고귀한 분이신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H2O로 분석할 수 없는 것처럼, 주와 복음을 위해 드리는 우리의 헌신을 돈으로 감히 계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인의 헌신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6절을 봅시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여인의 헌신 밑에 ‘낭비’라는 악풀을 달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이 ‘좋은 일’을 했다고 착풀을 다셨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어떤 점에서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한 것입니까? 7~9절을 봅시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네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첫째로, 그 여자는 힘을 다하여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She did what she could.”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 혹은 가진 것으로 했다는 뜻입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었습니다. 옥합은 그 여자에게 있는 것이요, 옥합을 깨서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은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었고, 예수님은 그 좋은 일을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특히 드릴 수 있는 것을 다 부어드릴 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의 경우에 있어서 자기에게 있는 향유를 다 부어드리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향유를 그렇게 다 부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 경우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좀더 생각하면 여자는 향유를 몇 방울만 떨어뜨려서 예수님께 드리고 그 다음에는 음식을 풍성히 해드린다든지 아니면 좋은 말로 위로를 해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자는 다른 것은 잘 하지 못했는지 자기에게 있는 향유를 그냥 다 부어드리는 것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없는 것을 받지 않으시고 있는 것을 받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내게 있는 것을 다 드릴 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주님께 드린 시간과 물질과 진심과 정열이 눈에 보이는 열매로 나타나지 않을 때 실망하고 후회합니다.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헌금도 드리고 모임이란 모임은 다 참석했건만 누구 한 사람 알아주는 이가 없을 때 ‘내가 속은 것은 아닌가?’ ‘내가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바보처럼 여깁니다. 더구나 학창시절 자기만을 위해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미래를 준비했다가 이런 저런 시험에 합격하고 지금은 잘 나가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 나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무모했다고 보고 억울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드린 시간과 물질과 진심의 향유를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다 받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저는 동역자가 손님들을 위해 써빙을 준비하며 정성과 시간을 다 드리는 모습을 보면 아픈 다리가 더 어긋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을 보며 집안에 진동하는 반찬냄새가 어느 샌가 향기로운 향유내음으로 느껴졌습니다. 또한 우리 동역자들이 정성을 다하여 발표하는 소감에서 진한 향유내음이 저의 마음을 저며 왔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드린 우리의 모든 수고와 진심을 주님은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다 받으시고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시며 칭찬해 주십니다.
  둘째로, 그 여인은 때를 잘 맞추었습니다. 7절을 봅시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제 며칠 후면 죽으십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땅에서 영원히 떠나실 것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 무얼 해드리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가장 적절할 때에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때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경쟁만 하며 오로지 자기가 크고자 하는데 관심이 가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일만 기대하며 자기 출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앞두고도 차지하게 될 앞으로의 영광에 관심이 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크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기회가 와도 예수님은 외면하고 유익을 주는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기회가 와도 예수님을 외면하고 자기 일로 향합니다. 그러나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왔을 때 예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셋째로, 그 여자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8절을 봅시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본래 장례에서 향유는 시체에다 붓는 것이었으나, 여자는 예수님이 죽으시기도 전에 미리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그 때에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미래만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고자 했고, 다른 제자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 중 하나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실망스런 상황에서 본문의 오직 이 여인만이 향유를 준비했고 예수님께 온 마음으로 헌신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오직 그 여자만이 예수님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 여자에게 이해되셨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을 칭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9절을 봅시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복음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역사화 시키셨습니다. 기념이란 그 정신을 배우고 본받는 것입니다. 온 천하의 모든 사람이 여인의 주님께 대한 사랑과 희생을 본받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을 섬기는 우리의 자세도 이 여인과 같아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이 애써 간직해 온 옥합이 있습니다. 그 옥합은 자신이 갈고 닦아온 실력과 숨은 재능이 될 수도 있고,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간직해 온 아름답고 순수한 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입고 싶은 것 안 입고, 아끼고 아껴서 모은 소중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황금 같은 시간과 피 끓는 정열이 옥합이 됩니다. 이러한 옥합은 아름답습니다. 순수합니다. 값집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진심과 사랑과 꿈과 미래가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옥합은 향기롭습니다. 그런데 이런 옥합을 누구를 위해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옥합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옥합을 받을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고결한 옥합을 잘못 깨뜨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괴로워합니다. 어떤 분은 세상 명예와 권세를 위해, 어떤 분은 학문과 예술을 위해 옥합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옥합을 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옥합을 깨뜨린 후에 깊은 허무만 남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옥합을 깨뜨려 드리기에 합당하신 분이 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옥합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왕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귀한 육체를 송두리째 깨뜨려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이런 행동과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는 무엇을 했습니까? 10,11절을 봅시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그는 예수님을 팔고자 적의 소굴에 들어가 흥정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그의 눈을 멀게 하고 양심을 마비시켰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친히 택하신 사도요 메시야 사역의 목격자요 많은 사랑과 훈련을 받은 자였지만 그 은혜를 감당치 못하고 저주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고약한 물질주의의 냄새, 고약한 욕심의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누구나 유다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것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와 같은 마음이 들 때 속히 회개하고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제2장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12~21)
  이틀이 지나 무교절 첫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양 잡는 날로서 흠 없고 점 없는 1년 된 어린 양을 잡아 희생제물로 드리고 유월절 식사를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준비된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같이 하셨습니다.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님은 가슴 아픈 말씀을 하셨습니다. 18절을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역사상 가장 나쁜 놈 'Top Two'가 있는데, 첫째는 친구를 배신한 놈이고, 둘째는 함께 밥을 먹고 나서 배신한 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둘을 합쳐놓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나는 아니지요?”(19)하며 근심하며 물었습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을 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20).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1)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를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잘 아셨습니다. 그러면 당장 제거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배반자를 유월절 식사에 초대하시고 자신이 배반당하실 것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예수님은 꼭 제자에게 팔려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대로 죽으심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죽음이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에게 팔리시긴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자신을 배반하려는 가룟 유다가 마음을 돌이키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직접 이름을 대지도 않으시고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그가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안타까워하시고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배반을 많이 당합니다. 배반당할 때 우리는 존재의미를 상실합니다. 견디기 힘듭니다. 화가 나고 미움이 솟구쳐 잠이 오지 않습니다. 복수하고 싶은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요셉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 일로 시작하여 그야말로 꼬인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에게 팔렸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고초를 겪으시고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요셉이 형들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자기를 판 자를 생각했다면 화가 나서 그들을 증오하고 저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그랬듯이 우리의 인생에 이루어진 많은 아픔들도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사람의 일로 보지 않으시고 자신의 인생에 이루어지는 말씀을 기억하셨고 그로인해 자유 하셨으며 존재의미를 찾으셨습니다. 그랬을 때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고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유다를 불쌍히 여기시고 회개할 기회를 마련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며 여러 인간갈등 속에서 감정적인 어려움을 안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작은 트러블로 인해 생긴 미움의 감정, 복수의 감정, 증오심, 배신감을 해결할 길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늘 사람을 바라보며 피해의식을 가지므로 신앙 안에서도 기쁨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결국 특정한 사람을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요셉도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생각하셨고 그랬을 때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말씀의 종으로 부르셨으니 또한 말씀대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저희가 기록된 대로 사셨던 예수님을 배워 제자양성역사에서 부딪히는 감정적인 문제에서 자유하고 끝까지 한 사람을 감당하는 십자가를 능히 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3장 언약의 피(22-26)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개치 않고 떡조각을 받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나간 후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계속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봅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은 떡을 일일이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여기서 떡을 ‘떼다’라는 동사와 마리아가 옥합을 ‘깨다’라는 동사는 똑같이 ‘break’라는 단어입니다. 즉 마리아가 예수님께 진심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옥합을 깨는 희생을 실천한 것처럼 예수님도 자신의 몸을 부수어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예수님의 희생은 더욱더 값지고 고귀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틀 후면 무서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셔야 합니다. 단지 세 개의 못에 몸이 매달려서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서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고통을 당하십니다. 군병들이 내리치는 무서운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부에 골이 패이며, 여기저기 갈라지고 터지는 처절한 아픔을 겪으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고난과 아픔을 당하셔야 할까요?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의 몸을 떼어서 우리에게 나눠주기 원하십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새 생명을 덧입고, 영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 6:50,51은 말씀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마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절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이 방금 전에 마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피를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 뿐 아니라 피까지도 다 쏟으시고 온전히 내어 주셨습니다. 피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모든 영양분과 병균을 막는 방어기재가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피는 모두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핏속에는 온갖 지저분하고 더러운 죄의 병균들이 대책 없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원치 않게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정욕적인 생각에 시달리고 자학하고 무기력해집니다. 우리의 더러운 피는 보약을 복용하거나,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입산수도(入山修道)를 하거나, 혈서를 쓰며 강하게 결심을 해도 정결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점 없고 흠 없는 어린양의 피와 같은 예수님의 순결한 피가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피를 먹고 마실 때 비로소 우리 내면에 오염되고 더러워진 피가 깨끗하여지고 맑고 정결해 집니다.
  그런데 24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이 피를 가리켜서 특별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언약의 피란 무엇일까요? 언약의 피는 언약을 확증하는 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언약의 관계를 맺으셨고 그것은 피로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 예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이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자기 일생을 맡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습니다(창12:1,2).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자신의 일생을 맡겼고 그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후에 하나님은 늙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사이에 언약의 자손을 주시고 결국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도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핵심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믿고 피를 바른 사람들은 죽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피를 바르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신약에서도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언약에 일생을 맡겼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의 일생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언약에 일생을 맡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배울 것입니다.
  마가 16:16,17에는 예수님의 유언적인 언약이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세운 언약을 반드시 지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과연 그 언약이 이루어질 것인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무엇으로 보상을 받는가? 바로 이것인 신앙생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언약을 믿고 언약을 따라 왔는데 그 언약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수고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언약을 위해서 자기 피를 주셨습니다. 곧 자기 피로써 그 언약을 보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써 언약을 보증하셨으므로 그 언약은 확실히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그 언약을 믿을 수 있고, 그 언약에 우리 일생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인생의 구원과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고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믿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약속대로 우리는 모든 죽음과 죽음으로 인한 질병들, 예를 들어 정죄, 불안, 원망과 열등감과 어두움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사명인의 삶을 살며 반드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족한 자라도 부르셔서 사람 낚는 어부로 승리케 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뭇별과 같은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주시고 열왕을 낳는 자로 자신이 변화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갈등이 될 때에도 승리를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흘리사 우리에게 주신 언약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언약의 보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언약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를 보증으로 삼고 이제부터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언약을 온전히 믿는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사는 사명인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고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구원에 실패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변화도 확실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 주시는 언약의 피를 받아 마시므로 확신 있게 사명인의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후에 부활 승천 하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유월절 잔치를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끝내고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인의 헌신도, 예수님의 헌신도 결코 헛되지 않음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흘리신 언약의 피는 우리가 일생 의지해야 할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죄사함의 보증이요 구원의 보증이요 그리고 승리의 보증입니다. 저희가 본문의 여인과 예수님처럼 힘 있게 헌신하고 사명인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65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363 특강 문바울 2838 11-18
362 사도행전 문바울 3025 11-11
361 사도행전 문바울 3081 11-06
360 사도행전 문바울 3047 10-28
359 사도행전 문바울 3295 10-21
358 사도행전 임요한 3261 10-14
357 특강 문바울 2926 10-07
356 특강 문바울 2870 09-30
355 마가복음 문바울 3239 09-23
열람중 마가복음 문바울 3302 09-16
353 마가복음 문바울 3443 09-09
352 마가복음 문바울 3843 09-02
351 마가복음 문바울 4067 08-27
350 마가복음 이엘리야 3161 08-19
349 마가복음 이엘리야 3185 08-1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