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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7 마가 제 25 강(13:14-37)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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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바울
댓글 0건 조회 3,442회 작성일 07-09-09 13:25

본문

2007년 마가복음 제25강
말씀 마가복음 13:14-37
요절 마가복음 13:26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로 시작하여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로 끝맺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시작이 있었고 그리고 마침내 끝이 옵니다.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된 후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역사가 완성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역사관(historical view)입니다. 지난 말씀에서 제자들은 세상의 좋은 것에 마음이 현혹되었고 세상 권세와 영광에 중심이 흔들렸습니다. 방향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세상의 역사를 보는 영적 눈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땅에 있는 거짓 희망들에 속지 않고 참된 희망을 붙들기를 원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르치십니다. 저희가 오늘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세상의 끝에 서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예수님을 통해 새 소망과 힘을 얻고 세계구속역사를 흔들림 없이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멸망의 징조(14-23)
  예수님은 성전의 멸망에 이어서 세상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봅시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여기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The abomination that causes desolation"(흠정역) 즉 멸망을 초래하는 가증한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로마가 멸망하기를 원했겠지만, 유대가 멸망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자기 나라가 멸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자기 나라, 자기 민족, 자기 가정만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망하지 않기 위해 애를 씁니다.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예수님은 앞으로 유대에는 반드시 멸망이 있고 그런 멸망을 초래하는 것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대는 멸망했습니다. 곧이어 유대를 멸망시켰던 막강한 로마도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모든 국가, 모든 나라는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다가 결국 멸망했습니다. 모든 것에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너무나 잘나가고 있어서 결코 망할 것 같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멸망이 옵니다. 너무나 건강해서 결코 아플 것 같지 않던 사람도 불치병에 걸려 망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생각했듯이 기독교인들도 이 땅에 교회가 영원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교회들이 망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대치하기 시작했고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부담 없이 판매하더니 결국 망하는 길을 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세상에는 분명히 멸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멸망을 초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했는데, 그런 멸망을 가져온 것은 성적인 문란이었습니다. 그 성에는 특히 동성애가 만연했습니다. 그 성안에는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불문하고 음욕이 불 일 듯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마저 범하려고 들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도 망했는데, 그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 유다에게서 분리될 때 선지자 아히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로보암에게 전했습니다.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열왕11:37,38) 그러나 여로보암은 성전을 찾아 남 유다로 향하는 백성들을 보며 자신의 왕권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는 금송아지 둘을 만들고 산당을 짓고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외면하고 금송아지를 향하여 절하고 빈 것이 멸망의 원인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 이어 남 유다도 망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이사야 1:3,4) 남 유다는 말기로 갈수록 영적지도자들이 영적 불감증에 빠졌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가 죄 때문에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을 말했습니다. 심판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으니 평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이 잘못되었다 여기고 그를 구덩이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유다에 있어서 멸망의 가증한 것은 바로 영적인 불감증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사도바울도 멸망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무감각해져 영적 안일에 빠져 살았던 것이 멸망을 불러왔습니다. 또한 정욕과 돈에 대한 사랑이 멸망을 초래했습니다. 
  요사이 사람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보여도 이것을 악이라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문제가 있는데도 그것에 대해서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남을 헤치고도 전혀 아파하지 않습니다. 아픔을 모르면 점점더 나빠지고 병들게 됩니다. 이 시대의 문화가 죄로 인한 아픔을 못 느끼게 해버리고 있으니 불감증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악이 아니라고, 죄가 아니라고 말해도 그것은 악이요 죄이므로 그 때문에 사람은 망하게 되는 대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게 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14b). ‘서지 못할 곳’이란 어디일까요? 그곳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돈벌이의 수단, 성공의 지름길로 사용하는 자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하나님의 교회에 섰을 때 이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보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몸도 하나님의 집이라 했습니다(고전 6:19). 그런데 그 사람 안에 각종 우상이 서 있다면 이것도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우상이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자매 우상, 결혼 우상, 돈의 우상, 자기 우상 등이 서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모임에도 펀드와 주식의 붐이 불어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섰다고 보아야 할까요? 은혜롭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빨리 산으로 도망가야 합니다.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내려오지 말아야 합니다.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은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아서지 말아야 합니다. 재난이 닥쳤는데도 세상에 미련을 두고 집착한다면 살지 못할 것입니다.(14b~16)
  창세기에 롯의 아내가 있습니다. 롯이 소알 땅에 들어서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을 비처럼 내리사 그곳을 심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19:17) 그러나 롯의 아내는 천사의 말에 불순종하여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Green House, 장롱 깊이 감추어 둔 물방울다이어가 생각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습니다. 성경은 그녀의 인생을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19:26)고 한 문장으로 끝냈습니다. 
  17,18절을 봅시다. 또한 그 날에는 아이 밴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이 불행합니다. 특히 이런 환란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유대의 겨울은 비가 많이 오는 계절입니다. 강물이 불어나서 도망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로마가 예루살렘에 쳐들어 왔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안전하다고 여기고 성안으로 도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110만 명이 기근과 칼날에 죽임을 당했고, 97,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로마군은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르고 뱃속의 태아를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그 십자가를 만드느라 언덕에 나무가 남아나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기억하고 산으로 도망했던 사람들은 살았다고 합니다. 환난이 닥치면 성안에 재물이나 사람에게 소망을 두지 말고 산으로 도망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산이신 하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성을 의지하거나 사람들을 따라가기보다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를 의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성전 안에 불어 닥친 환난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환난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앞으로 닥칠 환난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래로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장차 닥칠 환난의 강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19절을 봅시다. “이는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자기들의 세대에는 이러한 대환난이 없기를 바랬습니다. 다만 평안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시대에 전무후무한 환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역사에 멸망과 환란이 있어 왔습니다. 택하신 자라도 환난이 옵니다. 물질의 환난, 질병의 환난, 제자양성의 환난이 있습니다. 때로 그런 환난이 도무지 그치지 않을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는 자들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봅시다.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주님은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택하신 자들에게 닥친 환난의 날들을 감하십니다. 그들의 환난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위해 환난의 날들을 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이 환난의 날에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21~23절을 봅시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우리에게 환난이 있게 되면 미혹의 세력도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를 보아도 수많은 이단들이 일어나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70년대 가장 큰 거짓 그리스도는 천부교의 박태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1조 살을 먹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80년대에는 문선명의 통일교와 정명석의 JMS가 극성을 부렸습니다. 90년대에는 박용호의 엘리야복음전도단, 조희성의 영생교, 대순진리회가 학생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이만희의 신천지,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 좀 윔버의 빈야드 운동, 엘리스 베일리의 뉴에이지 운동의 환상예술 등이 날뛰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이단들을 경계하고 삼가야 합니다.
  어떻게 삼갈 수 있을까요? 23절을 봅시다.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아 여기저기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면 바로 여기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환란의 때에 더욱 말씀으로 돌아가 신앙의 뿌리를 견고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예수님(24~27)
  위와 같은 환난 후 천체에 이변이 일어납니다. 24,25절을 봅시다.  “그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이는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우주의 종말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도 이 역사를 계시록에 예언했습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계6:12~14)
  세상은 어둡고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바로 그때 인자가 오십니다. 26절을 봅시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 예수님이 때가 되면 다시 오십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희망을 줍니까?
  예수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는 몇 사람만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하지만 다시 오실 때는 처음 오실 때처럼 조용하게, 지극히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이 오시지 않습니다.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십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주로,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주로의 오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심이 만방에 입증될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성도들은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빛도 없었고 세상에서 살아갈 힘도 없었습니다. 알아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믿음이 헛되게 여겨지고 과거로 돌아갈 것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이 길을 가야 하나?’ ‘아니 갈 수 있을까?’ 이런 그들에게 마가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만일 다시 오실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양들을 위해 오늘도 캠퍼스에 올라 복음을 증거하는 목자님들은 헛고생하는 것입니다. 가장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빛도 이름도 세상의 영광도 없이 살았던 분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십니까?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십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만 바라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영광이나 힘이나 빛이나 이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남몰래 많은 고생을 감수하며 양들을 섬기고 계신 목자님들에게 빛과 힘이 되시는 분은 오직 다시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손양원(1902-1950) 목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분은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66권 신구약 성경대로 살려는 자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나에게 있어서 생명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기록입니다. 성경은 나의 유일한 신조요 신앙의 목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전부 그대로 굳게 믿고 전부가 실현될 것으로 믿어 마지않습니다.” 손 목사에게 다가온 가장 큰 사건은 1948년 10월, “여수· 순천반란” 사건에서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좌익분자들에게 총살당한 일입니다. 손 목사는 이 일을 주도한 청년 안재선이 붙잡혔을 때 탄원했습니다.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해 달라. 절대 구타도 하지 말라. 그 사람을 내 아들로 삼겠다.” 그의 딸은 ‘오빠들을 죽인 원수를 오빠 삼으라’는 아버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손 목사는 말했습니다. “동희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켜 가면서 감옥 생활을 견디어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그런데 그 학생이 안 잡혔다면 모르되 일단 잡힌 이상 모른 척 할 수가 없구나. 제1계명과 제2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그 명령은 순종하면서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그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 있겠느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종치 않았다면 과거 5년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들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 없다. 그를 살리고 그 영혼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뿐 아니라 한 인간의 타락한 영혼을 구제해 준 보람도 느낄 수 있지 않느냐? 두 오빠는 천국 갔으나 오빠를 죽인 자는 지옥 갈 것이 분명 한데 내 전도하는 자로서 지옥으로 가는 그를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그의 사랑은 ‘한센병’ 환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며 극진한 사랑과 위로를 베푼 병동은 의사들도 포기하고 빨리 자리를 뜨려고 했던 중환자실이었습니다. 손 목사는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는 말씀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신앙의 뿌리에는 다시 오실 예수님께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손 목사님이 지은 “주님 고대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각자의 삶에서 혹은 한 사회나 국가의 역사에서도 환난이 극심할 때가 있습니다. 즉 하늘의 해가 어두워지듯이 온통 캄캄해지는 때가 있고 밤의 달도 그 빛을 감추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 빛이 보이지 않고 벼랑 끝에 내몰린 것처럼 절박할 때가 있습니다. 나를 지탱하던 것들이 무너지고 삶을 유지할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복음역사에도 이러한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지만 아무런 변화의 역사도 아무런 희망의 역사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때를 지난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선지자들도 그런 시기를 거쳤습니다. 시139:11에서 다윗은 말했습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예레미야는 자신의 애가에서 말했습니다.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애3:6) 이사야 8:22에서 말했습니다.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그런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그런데 그런 때에라도 우리가 바라볼 예수님이 계십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예수님은 큰 권능과 영광으로 각자에게 오십니다. 빛으로 임하시고 권능으로 임하십니다. 우리 중 어떤 분은 결혼 생활이 오래되었는데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에서 살고 계십니다. 형제들은 장마 내내 습기 찬 지하방에서 여름을 나느라 고생했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회개도 없는 양을 섬기기 위해 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양의 자취방으로 심방가시는 목자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평신도 목자님은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겠지요?”하며 짧게 전망을 요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빛으로 임하십니다. 죄로 병든 영혼들에게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시길 기도합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샛방에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시길 기도합니다. 환난으로 이제 믿음마저 잃어버린 분들에게도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시길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가을 학기 아카데미를 통해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27절을 봅시다.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택하신 자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인내하며 믿음을 지킨 모든 성도들을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흘린 모든 눈물을 하늘나라에서 씻겨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나라에서 주와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냥 즐겁게 웃으며 안락한 삶을 누리며 산 자들은 주님께서 오셔도 씻겨줄 눈물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로 애통해 본 일이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의 죄를 인해 아파해본일 없는 사람은 주님께 받을 위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신과 양들의 죄를 위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이 살았던 우리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시며 한없는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세세토록 변함없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믿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에 날에 임할 영원한 영광에 참예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제3장 깨어 있으라(28-37)
  그러면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그리스도는 언제 오실까요? 28,29절을 봅시다. 무화과나무의 가지와 잎사귀를 보고 여름이 가까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주님 오실 때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우리 세대가 지나나기 전에 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지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30,31).
  다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날에 갑자기 오십니다(32). 그러므로 제자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은 본문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4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34~36절을 봅시다.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여기서 깨어있다는 것은 주인이 맡긴 사무를 깨어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시든지 하던 일을 보고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맡긴 일에 대해서 주인 앞에서 결산을 해야 합니다. 주인이 올 때를 나름대로 계산하지 않고 주인이 내일이라도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다는 것이요 기다리는 제자로서의 바른 자세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무는 무엇입니까? 2041년까지 10만 명의 선교사를 양성하여 전 세계 가운데 파송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일 오실지, 아니면 우리가 내일 주님 앞에 갈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오늘 감당하는 한 사람과의 일대일을 깨어서 감당하므로 주님 오실 날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세상의 종말이 있다는 것과 그 끝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성경 마지막에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 고백은 우리 신앙의 뿌리입니다. 세상의 환난 가운데서 큰 영광과 권능으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앙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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