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22 강(11:27-12:17) 모퉁이의 머릿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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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 복음 제 22 강
말씀 마가복음 11:27 - 12:17
요절 마가복음 12:10,11
모퉁이의 머릿돌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우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생애에 이루어질 비극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사람들에게는 버린바가 되셨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의 권위와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포도원 농부의 비유(11:27-12:12) : 예수님 일행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따졌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집어 놓으시자 두렵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일에 대항하는 예수가 도대체 무슨 권위를 가지고 이런 대담무쌍한 짓을 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보증이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성전에서 장사를 할 수 없고 선생 노릇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갖은 권위를 다 뽐내면서 예수님을 겁주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권위를 가지고 예수님을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이는 예수님께서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되묻는 질문은 당시 랍비들이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그들은 서로 의논을 했습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비겁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이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 돌을 골라내고 땅을 일구어 거름을 주었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들짐승들이 포도원을 해치지 못하도록 산울타리를 둘렀습니다. 추수를 하면 바로 포도주로 만들 수 있도록 최신설비를 갖추었습니다. 현대식 시설을 갖춘 포도주 생산 공장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만들고 몇 년 묵은 것인지 표시하여 창고에 저장해 놓도록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도둑놈들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망대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일자리가 없는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일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은 인자하여 세도 싸게 쳐주었습니다.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가는 주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농부들이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고 열심히 일하여 행복을 누리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들이 주인이 없는 동안 창의적으로 일하여 좋은 소출을 내기를 바랐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주인과 바른 관계를 맺고 감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포도원을 주십니다. 이 포도원은 아담에게는 에덴 동산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포도원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의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홍대 캠퍼스와 이 나라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말씀과 영적인 훈련, 가정, 직장, 건강, 은사와 생명을 주셨습니다. 섬길 수 있는 양들과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세계 233개국 캠퍼스에 나아가 일생 동안 젊은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때가 이르자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농들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습니다.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습니다.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이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습니다. 우리가 전세를 살 때 한두 달 내지 않으면 주인이 무엇이라고 할까요? 당장 방 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주인은 세를 내지 않고 세를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는데도 왜 이렇게 오래 참는 것일까요? 그가 농부들과 사업적인 관계를 맺었다면 이렇게 오래 참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사업주든지 고용인들이 성과를 내지 않고 손해를 끼치면 당장 해고를 시키고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참을 수 있습니까? 그가 물이기 때문입니까? 힘이 없어서일까요? 고용할 사람들이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 주인은 힘도 있고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고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주인은 농부들과 사업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아버지와 자식과 같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서 어떤 이익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정말로 사랑하고 그들을 축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주인에게 소출을 드리지 않고 종들을 죽였을까요? 그들은 자기가 땀을 흘리고 일하여 추수를 했기 때문에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에게 값없이 주어졌지만 오랫동안 주인이 보이지 않자 자기들이 주인인 것처럼 착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많은 열매를 보고 탐욕이 생겼습니다.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바다 속에 빠뜨릴 수 있지만 탐욕은 다 빠뜨릴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탐욕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탐욕 때문입니다.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주어진 것조차도 누리지 못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결코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계적으로 12위 정도로 잘 살고 있지만 행복지수는 세계 153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우리 안에 탐욕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탐욕은 회개하고 버릴 것이지 껴안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농부들은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들을 주시고 성전을 주시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축복을 깨닫지 못하고 강대한 이방 나라들과 자신들을 비교했습니다.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좁은가? 왜 우리는 이렇게 약할까? 그들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을 했지만 마음은 섭섭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께 소출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 소출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로 살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해석자라는 타이틀을 놓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권위 아래 모든 백성들이 움직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상으로 백성들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돕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이 왕 노릇하고자 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소출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사랑하고 양육하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우리가 드려야 할 소출입니다. 우리 각자는 센터를 관리하는 직분을 맡았습니다. 청소 구역도 있고, 받은 바 달란트를 드려서 섬기는 부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 맡은 일에 충성을 할 때 양들이 와서 쉼을 누리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일 때 믿음으로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감당하되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고 감당해야 합니다. 주인의식이 지나쳐서 자기 의가 되면 그것도 위험합니다. 정말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으로 인해 감사할 때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내 삶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축복해 주십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과 힘과 지혜를 주신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고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는 사랑은 완악한 죄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런 주는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농부들은 끊임없이 받고자만 하는데 비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배울 때만 우리는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주는 사람은 기쁨을 누립니다. 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주는 것보다 받는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빈손으로 이 세상에 온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기억하고 주는 생활을 할 때 항상 심령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업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인은 그의 주권을 거부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은 그 아들을 보내면서 소작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아들을 존대하는 것이 주인을 존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아들을 영접하면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는 용서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끝까지 농부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하면서까지 죄인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라.” 그들은 주인의 유산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유산을 차지하려고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도를 넘어서 버렸습니다. 이는 반역입니다. 자기들이 주인이 되고자 하는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주인은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포도원 주인은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줍니다. 이 예언대로 하나님은 로마 군을 통해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전 세계에 흩어져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사명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제사장 직무는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렇지만 농부들에게 죽으신 그 아들은 어떻게 됩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건축자들에 의해서 버린 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아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시키심으로 유일한 구원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은 집을 짓는 기준이 되는 돌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집의 기준이 되십니다. 농부들은 자기들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와서 그 기준을 헐고 새로 지으려고 하니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전통으로 백성들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통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 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그 집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에베소서 2:20,21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버린바 되셨지만 신약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배척하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줄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 놓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역사에 쓰임 받으려면 예수님과 같은 순종, 사랑, 믿음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7-11).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 거기서 영적인 권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영적인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의 거룩함과 정직성, 신성한 권위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주님과의 신실한 교제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권위가 무너지면 일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교회의 영적인 권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편이 되시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회개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둘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13-17) :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인줄 알고 그를 잡고자 했지만 무리를 두려워하여 꽁무니를 빼고 물러갔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자 다시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두 당파는 본래 원수지간이었지만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세금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그들의 말은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해도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바리새인들과 민중의 반발을 살 것이요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헤롯당이 당장 체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함을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와 보이자 물으셨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기가막히게 훌륭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가이사의 것이란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가 자기들의 세금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국가 제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국가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국가를 통해서 백성들을 보호하고 사회 질서를 세웁니다. 또한 국가를 통해서 도로, 전기, 수도, 안전, 식량, 물 등을 공급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중시민권자로서 이 세상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재능을 주셨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과 지혜와 지식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고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누릴 때 영적인 권위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종을 세우시고 인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누구든지 과거의 죄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한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청지기 자세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출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마가복음 11:27 - 12:17
요절 마가복음 12:10,11
모퉁이의 머릿돌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우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생애에 이루어질 비극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사람들에게는 버린바가 되셨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의 권위와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포도원 농부의 비유(11:27-12:12) : 예수님 일행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따졌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뒤집어 놓으시자 두렵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일에 대항하는 예수가 도대체 무슨 권위를 가지고 이런 대담무쌍한 짓을 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보증이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성전에서 장사를 할 수 없고 선생 노릇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갖은 권위를 다 뽐내면서 예수님을 겁주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권위를 가지고 예수님을 굴복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이는 예수님께서 대답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되묻는 질문은 당시 랍비들이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그들은 서로 의논을 했습니다.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비겁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이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 돌을 골라내고 땅을 일구어 거름을 주었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들짐승들이 포도원을 해치지 못하도록 산울타리를 둘렀습니다. 추수를 하면 바로 포도주로 만들 수 있도록 최신설비를 갖추었습니다. 현대식 시설을 갖춘 포도주 생산 공장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만들고 몇 년 묵은 것인지 표시하여 창고에 저장해 놓도록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도둑놈들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망대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일자리가 없는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일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은 인자하여 세도 싸게 쳐주었습니다.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가는 주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농부들이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고 열심히 일하여 행복을 누리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들이 주인이 없는 동안 창의적으로 일하여 좋은 소출을 내기를 바랐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주인과 바른 관계를 맺고 감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포도원을 주십니다. 이 포도원은 아담에게는 에덴 동산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포도원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의 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홍대 캠퍼스와 이 나라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말씀과 영적인 훈련, 가정, 직장, 건강, 은사와 생명을 주셨습니다. 섬길 수 있는 양들과 자녀들을 주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세계 233개국 캠퍼스에 나아가 일생 동안 젊은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때가 이르자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농들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습니다.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습니다.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이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습니다. 우리가 전세를 살 때 한두 달 내지 않으면 주인이 무엇이라고 할까요? 당장 방 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주인은 세를 내지 않고 세를 받으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는데도 왜 이렇게 오래 참는 것일까요? 그가 농부들과 사업적인 관계를 맺었다면 이렇게 오래 참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사업주든지 고용인들이 성과를 내지 않고 손해를 끼치면 당장 해고를 시키고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참을 수 있습니까? 그가 물이기 때문입니까? 힘이 없어서일까요? 고용할 사람들이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 주인은 힘도 있고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을 고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주인은 농부들과 사업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아버지와 자식과 같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서 어떤 이익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정말로 사랑하고 그들을 축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주인에게 소출을 드리지 않고 종들을 죽였을까요? 그들은 자기가 땀을 흘리고 일하여 추수를 했기 때문에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에게 값없이 주어졌지만 오랫동안 주인이 보이지 않자 자기들이 주인인 것처럼 착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많은 열매를 보고 탐욕이 생겼습니다.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바다 속에 빠뜨릴 수 있지만 탐욕은 다 빠뜨릴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탐욕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탐욕 때문입니다.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주어진 것조차도 누리지 못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결코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계적으로 12위 정도로 잘 살고 있지만 행복지수는 세계 153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우리 안에 탐욕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탐욕은 회개하고 버릴 것이지 껴안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농부들은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들을 주시고 성전을 주시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축복을 깨닫지 못하고 강대한 이방 나라들과 자신들을 비교했습니다.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좁은가? 왜 우리는 이렇게 약할까? 그들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을 했지만 마음은 섭섭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께 소출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 소출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은혜로 살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해석자라는 타이틀을 놓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권위 아래 모든 백성들이 움직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상으로 백성들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돕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이 왕 노릇하고자 했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소출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사랑하고 양육하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우리가 드려야 할 소출입니다. 우리 각자는 센터를 관리하는 직분을 맡았습니다. 청소 구역도 있고, 받은 바 달란트를 드려서 섬기는 부도 있습니다. 우리 각자 맡은 일에 충성을 할 때 양들이 와서 쉼을 누리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일 때 믿음으로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감당하되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지고 감당해야 합니다. 주인의식이 지나쳐서 자기 의가 되면 그것도 위험합니다. 정말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으로 인해 감사할 때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내 삶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축복해 주십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과 힘과 지혜를 주신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고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는 사랑은 완악한 죄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런 주는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농부들은 끊임없이 받고자만 하는데 비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배울 때만 우리는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주는 사람은 기쁨을 누립니다. 주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주는 것보다 받는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빈손으로 이 세상에 온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기억하고 주는 생활을 할 때 항상 심령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업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인은 그의 주권을 거부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은 그 아들을 보내면서 소작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아들을 존대하는 것이 주인을 존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아들을 영접하면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는 용서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끝까지 농부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하면서까지 죄인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라.” 그들은 주인의 유산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유산을 차지하려고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도를 넘어서 버렸습니다. 이는 반역입니다. 자기들이 주인이 되고자 하는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주인은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포도원 주인은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줍니다. 이 예언대로 하나님은 로마 군을 통해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전 세계에 흩어져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사명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제사장 직무는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렇지만 농부들에게 죽으신 그 아들은 어떻게 됩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건축자들에 의해서 버린 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아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시키심으로 유일한 구원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은 집을 짓는 기준이 되는 돌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집의 기준이 되십니다. 농부들은 자기들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와서 그 기준을 헐고 새로 지으려고 하니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전통으로 백성들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통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복음 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그 집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에베소서 2:20,21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버린바 되셨지만 신약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배척하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줄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 놓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역사에 쓰임 받으려면 예수님과 같은 순종, 사랑, 믿음을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빌2:7-11).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 거기서 영적인 권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영적인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교회의 거룩함과 정직성, 신성한 권위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주님과의 신실한 교제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권위가 무너지면 일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교회의 영적인 권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편이 되시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회개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둘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13-17) :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인줄 알고 그를 잡고자 했지만 무리를 두려워하여 꽁무니를 빼고 물러갔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자 다시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두 당파는 본래 원수지간이었지만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세금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그들의 말은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해도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바리새인들과 민중의 반발을 살 것이요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헤롯당이 당장 체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함을 아시고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와 보이자 물으셨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기가막히게 훌륭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가이사의 것이란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가 자기들의 세금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국가 제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국가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국가를 통해서 백성들을 보호하고 사회 질서를 세웁니다. 또한 국가를 통해서 도로, 전기, 수도, 안전, 식량, 물 등을 공급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중시민권자로서 이 세상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고, 재능을 주셨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과 지혜와 지식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고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누릴 때 영적인 권위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종을 세우시고 인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누구든지 과거의 죄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한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청지기 자세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출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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