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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07년 마가 제 21 강(11:1-26) 하나님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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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85회 작성일 07-08-1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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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가복음 제 21 강                                                               
말씀 마가복음 11:1 - 26
요절 마가복음 11:22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이 어떤 왕이신지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요 겸손한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강도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제도나 형식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있는 사람보다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참된 믿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가 쓰시겠다(1-10) :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예수님은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고자 하실까요? 이는 스가랴서에 예언된 말씀을 이루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평화의 왕, 겸손의 왕, 구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사람들과 눈 높이가 비슷했을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친근하게 서로 마주보며 손을 잡고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나귀의 주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내용입니다. 그는 주가 쓰시겠다고 했을 때 즉시 어린 나귀를 보냈습니다. 그는 삶에서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기에게 귀중한 재산을 내드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생각을 좇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물질, 시간, 재능, 능력, 생명을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바쁜 현대를 사는 우리가 주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너무 바쁘기 때문에 주일에도 예배 시간에 늦고 어떤 사람은 예배를 드리지도 못합니다.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할 시간이 아까와서 그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고, 사업을 해야 하고 직장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부를 끝내고, 직장 일을 다 하고 은퇴를 한 다음에 하나님께 시간을 드릴 수 있을까요? 은퇴한 분들을 보면 너무 바쁘다고 합니다. 놀러 다니기가 바쁩니다. 가야 할 곳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주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우리가 쓰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사단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것을 쓰기를 원하시는데 남아서 드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게 있는 귀한 것을 드리는 마음입니다.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나의 것을 드리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치하시고 보호하며 인도해주시는 왕이란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분께서 쓰고자 하실 때 드려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가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만드셨으니 나의 주인이십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피값을 주고 나를 사셨기 때문입니다(고전 6:19,20). 우리는 이 소중한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정욕의 종, 음란의 종이 되어 폐인처럼 살 수밖에 없는 자신, 허무와 무기력으로 어두움의 종되어 고통하며 살던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다 까먹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방자해지기 쉽습니다. 자기 욕심과 세상 소원을 좇아 자기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요 왕 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꿈도, 우리의 장래도, 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악 된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은혜를 결코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 나귀 주인이 허락을 했습니다.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자신들도 귀한 겉옷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귀에 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마치 왕의 행차에 양탄자를 까는 것과 같았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질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란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야로 생각하고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드리심으로 죄가 사해지고 내 안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자신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번 뿐인 인생을 이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참된 예배와 참된 열매(11-19) :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헤롯 궁으로 쳐들어가지 않으시고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이튿날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시장하셨습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화가 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전지하신 능력으로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을 아시고 그 상황으로 제자들을 교훈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했습니다(미 4:4, 슥3:10).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서 이스라엘이 “다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중심적인 도구가 되지 못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메시야를 배척하고 죽임으로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특권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의 내적인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거룩한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져야 하는데 도리어 장사치들의 소리로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갑자기 성전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자로 임하셨습니다. 성전은 사람들이 편리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따로 구별된 장소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방인들도 이곳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상인들의 물건 때문에 성전 바깥뜰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성전 바깥뜰이 소음과 혼잡함과 악취로 범벅이 된 시장 바닥으로 바뀜으로, 이방인들은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빼앗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몰아내심으로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를 듣고 회개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하고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강도와 같았습니다. 성전이 부정직한 상행위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불의한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 일행은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오래될수록 요령이 생겨서 겉모습은 그럴듯하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생명력이 없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마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이 행해지는 것들이 있다면 참으로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드리는 두 렙돈을 많은 사람이 드리는 많은 헌금보다 많게 여기는 분이십니다.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믿음으로 드렸을 때 이를 받으시고 오천 명을 먹이신 것처럼 우리가 드리는 작은 헌신을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드린다면 놀랍게 쓰십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이라도 마음을 드려서 주님께 드림으로 참된 예배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음과 진심의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으라(20-26) : 다음 날 아침에 예수님 일행이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가 놀란 것은 기적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도 빨리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데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랐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철저한 멸망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종교적인 형식과 죄악으로 인해 심판받을 민족의 장래를 생각할 때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성전이 아니라 믿음과 기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나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물질이나 경력을 의지하고 살기 쉽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돈을 의지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돈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돈이 사랑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 가운데 살아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립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할 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자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할 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능력이 있어야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큰 능력을 구합니다. 자신을 능력있는 사람들과 비교해보고 좀 부족하다 싶으면 나는 무엇이 부족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쓰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습니다. 하나님 제가 목자 생활한지가 몇 년째인지 아십니까? 내 나이가 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무언가 확 뚫리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연약한 그대로, 부족한 그대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머문다고 하십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내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느 정도 큰일을 할 수 있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지운다.”는 말은 불가능한 일을 가리키는 유대인의 속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산은 그 특징이 요지부동입니다. 유사 이래로 많은 사람이 산의 요지부동에서 오는 고고함과 장엄함과 불변함 때문에 경외심을 가지고 산에 대해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산을 움직이는 믿음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불가능한 일이 가능케 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어 믿음으로 살고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애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의 제자를 양성하는 일이야말로 정말로 위대한 일입니다. 변화될 것 같지 않던 한 사람의 변화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하시며 세상을 섬기며 변화시키는 일을 이루십니다. 더 나아가 한 나라를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이번에 오베드로 선교사님은 믿음이 한 나라를 어떻게 강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복음신앙이 한 사람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한 나라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한국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역사상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을 가능케 한 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폐병을 비롯해서 각종 질병으로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병든 자들에 대한 상한 심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도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키가 작았습니다. 전요한선교사님도 말이 어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했던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었던 비범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누구든지”를 강조하심으로 누구나 하나님을 믿으면 산을 옮기는 역사를 이룰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창조한 믿음의 영웅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한계적인 인간조건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인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말씀하심으로 기도에 어떤 제한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라고 격려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용서에 대한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적대자들에 대한 용서를 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인생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 때에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어떠한 장애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해도 우리는 기도를 통해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용서를 받고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원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예수님의 주되심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오 왕이 되심을 영접하고 그분께서 쓰고자 하실 때 기꺼이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헌신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을 믿고 용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함으로 풍성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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